백두산 인삼도 중국 거? 중국 또 시작할까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백두산에서 '장백산 인삼'이 표기된 돌비석이 발견됐다고 중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백두산 북쪽 산기슭인 옌벤(연변)조선족자치주 안투(安圖)현에서 발견됐다는 보도가 9일 <신화통신> 지린채널(길림채널)에 이어, 23일엔 옌볜(연변) 지역 언론들에서 나왔다.
▲ 백두산에서 ‘장백산 인삼’ 비석이 발견됐다는 <신화통신> 보도. |
ⓒ 신화통신 |
장백산 인삼 보도, 왜?
재질이 백색 대리석인 이 비석은 높이가 88센티미터, 너비가 45~50센티, 두께는 11~13센티다. 기사 속의 사진에 따르면, 비석에는 현대 중국인들이 쓰는 간체자 중국어가 아닌 과거의 번체자가 표기됐다.
현대 중국인들은 길 장(長)을 长으로 표기하지만, 비석에는 옛날 글자가 적혀 있다. 삼(蔘)과 더불어 인삼 표기에 쓰이는 또 다른 글자인 삼(參)이 참(叅)으로 적혀 있다. 삼(參)과 참(叅)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모양이 비슷한 글자를 혼용하는 사례는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예전부터 비석을 봐왔다는 현지 주민의 진술이 있었다. 올해 49세인 판종즈(潘忠志) 씨는 어릴 때부터 비석 일부가 땅에 묻혀 있는 것을 봤지만, '장백산' 부분만 보였기 때문에 '인삼'이란 글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작고한 그의 할아버지가 '관리들이 비석을 세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신화통신>은 보도했다. 판종즈 씨의 아버지가 80세이므로, 할아버지는 적어도 100년 전후 혹은 그 이전 사람이다.
비석이 세워진 연대에 관해서는 23일자 <옌벤신문>이 좀 더 상세히 보도했다. 제목이 '안투현에서 장백산 인삼 석비 발견(安图县发现长白山人参石碑)'인 <옌벤신문> 기사는 "이 비석은 청나라 말기에서 민국 시기에 건립"됐다며 향토 역사 전문가인 안쉐빈(安学斌)의 분석을 인용했다. 안쉐빈은 청색 벽돌이 비석 받침돌로 쓰인 점 등을 근거로 벽돌 가마가 안도현에 세워진 1910년 무렵 이후 시점에 제작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제작 경위나 연도에 관해서는 좀 더 많은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 비석이 앞으로 어떤 용도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는지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이 비석이 장백산 역사문화, 특히 인삼문화 연구에 대해 중요한 가치를 띠고 있다고 말한다", "장백산 인삼 비석은 인삼문화의 역사적 증거품이며 지린성 인삼산업 발전을 돕는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신화통신> 기사는 중국인들이 이 비석을 근거로 자국 인삼을 홍보할 가능성과 더불어 '인삼의 원조'를 놓고 논쟁을 본격화할 가능성을 점치게 할 만하다.
고려 인삼 혹은 조선 인삼의 명성이 예로부터 유명하다는 것은 중국인들도 잘 알고 있다. 물물교환 형식으로 진행된 한국과의 조공무역에서 중국 왕조들이 가장 선호한 제품 중 하나가 인삼이나 홍삼이었다. 향후 중국인들이 한국 인삼의 명성에 대항할 때 이런 비석이 도구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2004년 기사 떠올라
동북공정 때문에 한중관계가 좋지 않았던 2004년 여름에도 유사한 보도가 있었다. 그때 나온 <신화통신> 지린채널 기사 "장백산 기석(奇石) 모은 지 10년, '중화만세'가 생일을 축하하다(长白奇石集十载 中华万岁贺华诞)"에도 기이한 돌이 백두산에서 나왔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그해 8월 5일자 <오마이뉴스> '백두산서 중국만세 돌이 나왔다고?(http://omn.kr/4enl)'에도 소개된 <신화통신> 기사의 요지는 이렇다.
1989년 공화국 탄생 50주년(40주년의 오기)의 바로 전날 장백산에서 지린성 바이산시 방송국 직원 쑨옌카이가 화(華)라고 새겨진 돌을 발견했다. 쑨엔카이는 이로써 근 10년 만에 중화만세(中華萬歲)가 적힌 4개의 기석을 모두 수집하게 됐다.
기석 수집가인 그는 틈만 나면 장백산과 훈강 유역에서 기석을 모았으며, 현재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화만세라는 4개의 기석 중에서 중(中)이 쓰인 돌은 9년 전인 1980년에, 만(萬) 및 세(歲)가 쓰인 것은 그 얼마 뒤에, 맨 마지막으로 화(華)가 쓰인 기석은 공화국 창건 50주년 바로 전날인 1989년 9월 30일 발견됐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40주년 전날인 1989년 9월 30일까지 중·화·만·세라는 4개의 돌이 수집됐다는 기사가 중국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느낌이 있다. 그 느낌과 비슷한 것이 이번 '장백산 인삼' 비석에 관한 보도에서도 느껴진다.
과거의 중국에서도 인삼이 많이 재배됐던 것은 사실이다. 중국은 인삼을 많이 수입했지만, 자체적으로도 많이 생산했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것은 비석 건립 연도로 추정되는 1910년 무렵 혹은 그 후 한동안은 중국 인삼에 대한 평판이 높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이전 오랫동안 중국 인삼 산업이 쇠퇴해 있었기 때문이다.
"인삼 재배는 열강 침탈이 가속화되던 동아시아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중략) 이미 1812년 <옵저버>는 중국과 러시아가 상호 방위 지역(국경지대)에서 인삼 재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중국 측 생산물은 질이 형편없어 전량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한국산이 북경에서 은의 5배 가치로 거래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중국은 1858년 중·러 아이훈조약, 1860년 중·러 베이징조약에 의해 인삼의 주요 생산지인 헤이룽강 이북과 우수리강 동쪽 지역을 상실한다."
자료에 담긴 중국 인삼과 한국 인삼
"1886년에는 전문가로 구성된 영국인들이 최초로 만주를 탐사하기 위해 떠났다. <타임스> 등은 이 탐사의 결과물인 <백두산 등정기>의 출간 소식을 자세히 전하기도 했다. 인도총독부 관리 제임스가 쓴 이 책에는 만주에 사는 사냥꾼과 심마니, 그리고 한국에서 유입된 인삼 재배자들의 모습이 비교적 상세히 그려지고 있다."
'장백산 인삼' 비석이 중국 인삼산업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비석 건립 연도로부터 수십 년 동안에 중국 인삼에 대한 평가가 좋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 시기에 서양인들은 동아시아 인삼 하면 조선 인삼을 먼저 떠올렸다. 위 논문에 이런 대목도 있다.
"1886년 <글래스고 헤럴드>는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약재로 사용되는 인삼은 거의 전체가 한국에서 난다'고 단언했다. 이 말은 서구에서 인삼 재배법을 다룬 최초의 입문서 가운데 하나인 루트의 <인삼이란 무엇인가>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현재 일본의 통제 하에 놓인 한국은 중국의 가장 주된 인삼 공급원'이었고, '중국인이 한국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정치도 지정학적 위치도 아닌 한국 산에서 나오는 인삼뿐이다'라는 표현 말이다."
이처럼 19세기 후반에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동아시아 인삼은 중국 인삼이 아니라 한국 인삼이었다. 백두산 지역에서 인삼 재배를 주도한 사람들 역시 중국인들이 아니라 한국인들이었다.
위의 8월 9일자 <신화통신>은 "장백산 인삼 비석은 인삼문화의 역사적 증거품"이라면서 "지린성 인삼산업 발전을 돕는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 비석이 중국 인삼문화의 증거품이며 향후 중국 인삼산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보도는 향후 중국인들이 국제 인삼산업의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해 19세기 및 20세기 초반의 동아시아 인삼산업에 관한 논쟁을 벌일 가능성을 예측케 한다. 한국 인삼산업의 국제적 경쟁력에 영향을 미칠 만한 움직임이 중국에서 나오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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