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달N사주 하는 분들, 모두 들어오세요! 사주 봐드립니다

2021. 8. 2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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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주를 진지하게 공부한 여자가 있다. 그의 은밀한 취미는 가까운 친구들의 사주를 보는 것. 사주 앱에 '찐친'들의 생년월일시를 입력해두고 틈틈이 그들의 운명을 헤아리며 속 깊은 충고를 건네는 그에게 사주란 구시대적인 운명 결정론도, 불경한 미신도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덕질'이요, 뜨거운 우정의 '엔터테인먼트'다.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전해 듣는 '친구들의 사주를 보는 즐거움'.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쯤 누구 하나가 운을 뗀다. 그러면 나는 휴대폰 홈 화면에 깔아놓은 앱을 열고, 상대의 생년월일시를 입력해 사주명식을 확인한다. 나이 지긋한 역술가를 찾았다면 손때 묻은 만세력 책을 팔락거리며 명식 뽑는 장면을 볼 수 있었겠지만 요즘은 ‘강헌의 좌파명리학’, ‘점신’, ‘원광만세력’ 같은 앱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사주(四柱)란 뭘까? 명리 고전 〈적천수〉에 따르면 ‘우주에는 음양과 오행의 기운이 흐르고 있어 인간은 태어나는 장소, 연, 월, 일, 시에 따라 서로 다른 음양과 오행의 기운을 부여받는데, 이것이 하늘의 뜻이며 인간의 운명’이다. 한마디로 그 사람의 기질을 결정하는 4개의 시간 기둥, 8개의 글자가 바로 사주팔자(四柱八字)다.

알록달록한 8개의 네모 칸 중앙에 고딕체 한자가 쿵쿵 박힌 휴대폰 화면을 보며 내가 입을 털기 시작하면 이내 “맞아, 맞아!” 하는 격한 공감이 터지고 “내 사주는 왜 이 모양이냐”라는 한탄이 새어 나온다. 한쪽에선 전화를 걸기도 한다. “엄마, 나 아빠 퇴근할 때쯤 태어났다 그랬지?” 그렇게 내 휴대폰 화면에는 수십 명의 사주명식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몇 날 몇 시 태어났는지에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니 과학기술이 발전하다 못해 메타버스 시대가 도래한 마당에 이 무슨 해괴한 소리냐며 혀를 차는 사람도 많다는 것, 잘 안다. 사주명리학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면 일단 동공 지진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런 반응은 “현대 샤먼”이라는 놀림부터 “거참 낡은 학문을 가지고…”라는 까닭 모를 핀잔, “나는 크리스천이긴 한데…”라며 넌지시 생년월일시를 건네는 웃픈 상황으로 이어지곤 한다.

4개의 시간 기둥, 8개의 글자를 부여받아 태어난 개인의 운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음양오행론은 ‘쉼 없이 변한다’는 것이 제1의 특성이다. 음양은 남과 여, 상승과 하강, 외향과 내향처럼 분절되고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태극 문양처럼 언제든 전복될 수 있는 유기적인 성질을 지녔다. 우주 만물을 이루는 5가지 원소인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에 따라 자연현상이나 인간사를 해석하는 오행론도 결국 지구가 태양을 구심점으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거나 계절의 순환처럼 돌고 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에 더해 모든 사람이 맞는 운의 흐름은 대운(10년마다 바뀌는 운)과 세운(지난해는 경자년, 올해는 신축년, 내년은 임인년인 것처럼 해마다 바뀌는 운)에 따라 다이내믹하게 변화한다.

근사한 한자의 필체를 감상하며 사주팔자를 뚫어져라 들여다볼 때마다 그것이 생동하는 3차원 키네틱 아트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나에게 사주란 구시대적인 운명 결정론도, 불경한 미신도 아닌 ‘덕질’이요, ‘엔터테인먼트’다. 내가 미천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사주 좀 봐달라”라는 요청에 기꺼이 응하는 건 저마다의 사주가 가진 고유의 아름다움을 나름대로 해석해 전달하는 즐거움 이 크기 때문이다. 팟캐스트와 각종 책, 프로페셔널 사주 상담가에게 돈을 내고 받은 개인 수업 등에서 주워들은 이론에 나만의 직관을 한 스푼 얹어 ‘썰을 푸는’ 희열이 있다. 사주는 우리 내면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인다. 10세기 후반 중국의 도교 수련가였던 서자평이라는 이가 그 이론 체계를 정립한 사주명리학은 중국인들의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사고가 그대로 담겨 있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 시험에서 사주, 풍수, 한의학을 ‘잡과’라는 과목으로 다루는 등 사주명리학을 나라의 대소사에 실질적으로 활용했다.

친구들의 사주를 보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사람들이 자기 욕망만 제대로 알아도 인생이 더 행복해지고 관계가 더 평화로워진다는 거다. 예컨대 친구 A는 출중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커리어를 쌓아왔지만 아무리 좋은 회사도 1년 반이 지나면 어김없이 사표를 냈다. 그는 위기를 기회 삼아 더 좋은 자리로 이직했지만 수차례의 불화와 변화 콤보를 겪고 난 후 기력을 잃고 침울해했다. 나는 발산하고 펼치려는 기운이 강한 동시에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고 소심한 A의 사주명식을 보며 “자신감은 높은데 자존감은 낮은 것 같다”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A는 남들에게 인정받는 데 집착했고, 인정받아도 그걸 100%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렇게 말하는 데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라는 의심을 품었다. 그런 마음은 불필요한 자기방어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직장 동료들과의 마찰로 이어졌다. 타인과의 협력 국면에서 A는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 좋은데 이 부분만 고치면 어떨까요?”라는 말은 A의 마음속에서 ‘팀장이라는 사람이 이 정도밖에 안 돼?’라는 굴절을 일으키며 상처를 남기기 일쑤였고 그것은 이내 히스테리컬한 리액션과 불필요한 변명으로 이어졌다. 몇 차례의 사소한 마찰은 점점 더 A를 고립시켰고 그 후로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지만 실상 그 안에는 연약하고 작은 아이가 숨어 있어. 그 아이는 어디서부터 기인하는지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여 떨고 있지.” 그리고 나는 이것 한 가지만 지켜보자고 덧붙였다. “아무도 사실상 남에게 그리 큰 관심이 없어. 사람들은 네가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평가하기 전에 그냥 모두가 자기 포지션에서 각자 맡은 바를 온전히 책임져주길 바랄 뿐이야. 그러니 새 회사에 가서는 남들이 뭐라고 하건 그 말의 속뜻이나 진짜 의도 같은 건 파악하려 하지 말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해봐.”

한편 자기 분야에서 꽤 성공한 친구 B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나는 일이 더 잘되는 게 두려워. 지금이 딱 좋아.” 공통의 친구인 C는 B의 그런 말이 얄밉기만 하다. 미혼일 때는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아이 둘을 낳고 기르는 동안 자연스럽게 경력이 단절된 C는 둘째까지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나서야 어렵게 프리랜스 편집자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론 회한에 잠긴다. B와 C는 서로의 인생에서 자신이 놓쳐버린 것을 본다.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좋아하고 응원하는가와는 별개로 각자의 복잡한 상황과 마음 때문에 둘 사이에 미묘한 대화와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가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질투와 우월감, 불안감 등이 혼재된 미묘한 감정에 휩싸여 못난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나온 말들은 함께 와인을 마시는 동안 무시로 흘러가지만 친구들과 헤어지고 난 후 설거지할 때 홀연히 떠올라 상대방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B의 불안은 잘나가는 여성들이 자신의 성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언젠가 내 바닥이 드러날 것 같다”라고 불안해하는 가면 증후군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아상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감이 원인이다. B는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이 자신에게 상냥한 애티튜드와 긍정적인 피드백만 돌려줬다고 말한다. “처음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이 모든 라벨을 다 떼어내고 나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줄까?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앞만 보며 달려온 건 아닐까? 남들 말고 진짜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은 뭐지?” B는 무명의 자신과 남을 마지막 순간이 두렵다고 했다. 앞으로는 그 순간을 위해 여행이든 미술이든 사주든 더 다채로운 경험 속에 자신을 노출시키며 살고 싶다고.

사주명식을 앞에 두면 웬만한 사람들은 마음의 빗장을 풀고 거대한 빙산 아래 잠복된 자신의 진짜 욕망을 들여다본다. 나는 처음에는 대화를 이끌지만 종국에는 그저 듣다 온다. 사실 ‘나는 어떤 인간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저마다 괜찮은 답을 갖고 있다. 이쯤에서 내가 가진 고민도 털어놓아야겠다. 내가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해부하고 조언을 건넨다 해서 나 자신을 정제되고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쓸데없이 비대한 호기심과 모든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하는 환영받지 못하는 욕망을 지녔다. 이처럼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 시선을 두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좇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해결하지 못한 온갖 현실적인 문제에 파묻혀, 영화 〈매기스 플랜〉에서 매기의 대사 “나는 나로 사는 게 지긋지긋해요”를 수시로 토해내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친구들의 사주를 봐주면서 때때로 “내 코가 석 자”, “나나 잘할 것이지” 하는 현타의 순간이 찾아오지만 이토록 불확실한 세상에서 잠시 잠깐의 재미와 위안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게 뭐 대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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