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은 패션이다] 편견 깼더니 황금알.. '미스터트롯' 이유있는 대박
2011년 개국한 종편들이 이제 종합검진을 받을 시점에 이르렀는데 그중 예능 분야를 중심으로 간단한 문진표를 작성해보는 것도 괜찮을 성싶다.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 개그맨 조세호(양배추)의 순진한 질문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다. ‘세 바퀴’(2015 MBC)에서 탤런트 안재욱의 결혼식에 왜 안 왔냐는 김흥국의 뚱딴지같은 질책에 조세호가 황당한 표정으로 내뱉은 말이다. 안재욱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아니라 결혼식에 초대받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본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그와 상관없이 말 한마디의 위력으로 2001년 SBS 6기 공채 개그맨에 합격한 양배추는 15년 만에 본명 조세호로 확실히 거듭난다. 예능의 촌철살인이란 이런 것이다.
종편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지상파 3사(KMS)의 예능PD 중에는 ‘앞날을 모르는데 어떻게 가나’ 망설인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조건이 안 맞아서 거부한 PD도 있었을 거다. 내가 직접 만나서 함께 일해 본 PD들의 진심 어린 고백에 따르면 꼭 돈이나 직위가 첫 번째 이적 요인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무엇이 그들을 움직였을까.
아이디어 하나가 프로그램이 돼 방송으로 나가기까지는 실로 많은 의사결정과정을 거친다. 지상파에서 예능PD가 ‘썰전’(JTBC)이라는 프로의 기획안을 냈다고 가정해보자. 제목이 그게 뭐냐, 그런 프로를 왜 하느냐, 그런 프로가 될 것 같으냐, 광고가 얼마나 붙을 것 같으냐, 김구라가 시사토론MC라는 게 말이 되느냐, 출연자 중에 그 사람은 문제가 많지 않느냐 등 층층시하에서 태클을 걸 가능성이 상존한다. 예외는 있겠지만 종편에선 번거로운 중간단계가 대폭 생략된다. 제목과 PD, 기획안과 출연자 이름만 보고도 결재가 쉽게 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결국은 이름값이 몸값을 결정하는데 이름이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선 먼저 실적을 보여야 한다. 어느 분야에서건 실력의 동의어는 실적이다.
나는 후배에게 무엇을 의뢰할 때 ‘임과 함께’라는 말을 즐겨 쓴다. 이른바 ‘임’(任)의 행진이다. 잘 맞는지 살펴본(적임) 후 신중하게 고르고(선임) 믿음이 가면(신임) 권력(?)을 대폭 이양한다(위임). 일을 맡은 자가 그에 상응하는 책무를 다하는지 지켜보고(책임) 그 일을 계속 맡기거나(연임) 사안에 따라서는 그가 중간에 그만둘 수도 있고(사임) 기한이 차서 물러날(퇴임) 수도 있다. 그 어떤 단계에서도 방임이란 없다.
여기서 잠깐. 비화(?) 한 가지를 공개한다. 내 기억으로 SBS가 개국(1990)할 때 MBC 예능국에선 현업에서 단 한 사람도 이적하지 않았다. 몰라서 못 간 게 아니라 알아서 안 간 것이다. 뭘 알았을까. 당시 MBC에는 PD들끼리 즐거운 경쟁문화가 있었다. 말 그대로 선의의 경쟁이었다. 선배라고 후배를 짓누르는 ‘나잇값문화’도 거의 없었다. 이를테면 창의와 예의가 공존하는 ‘문화방송’이었다. 모험심을 버리고 안정을 택한 게 아니라 새로운 방송사에서 과열경쟁을 하는 게 소모적이란 생각이 그들은 강했다.
종편의 시작은 험난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국했을 때 예전 드라마에 나오는 상투적 소재에 빗대어 조롱하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출생의 비밀(정치적 배경)에서부터 시한부 생명, 기억상실, 신분 상승, 복수 등 저주 섞인 예측도 많았다. 실제로 초기엔 애국가 시청률보다 낮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믿지 못하겠지만 시청률 2%를 넘었을 때 작은 파티를 연 적도 있었다.
방송사 개국 초기는 6년근 인삼을 재배하는 농부의 심경이나 처지와 비슷하다. 6년 동안은 수익을 내기보다 잘 관리하고 재배하는 데 정성을 쏟아야 한다. 품질판단은 경쟁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한다. 예능도 비슷하다. 경쟁사나 평론가가 아니라 시청자가 최종판단을 한다. 다만 시청률이라는 정량평가와 화제성이라는 정성평가 외에도 방송의 공공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무작정 눈길 끌기에 매몰돼선 곤란하다. 저질은 시청자가 잡아내지만 악질 솎아내는 덴 전문가의 도움도 일정 부분 필요하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개그콘서트’(KBS2TV)에서 박성광이 유행시킨 말이다. 종편 예능 10년의 시청률 최강자는 ‘내일은 미스터트롯’(TV조선)이다. “한물간 트로트가 뭐가 신선해?” 그렇지 않다. 트로트가 한물간 게 아니라 트로트는 한물갔다고 여기는 고정관념이 한물간 거다. 여전히 트로트를 부르거나 듣는 사람들이 많다는 현실, 중장년 아닌 청년 중에도 그 장르의 노래를 전문으로 부르는 무명이 많다는 현실, 그들 중에도 재능과 스토리를 가진 매력적인 예비스타들이 많다는 현실, 경쟁(오디션)을 통해 우승자가 탄생하는 영웅담은 언제라도 먹힌다는 현실 등이 시원시원한 자막과 어우러져 대박을 친 것이다. 거기서 탄생한 트로트 스타들을 주축으로 만든 ‘사랑의 콜센터’와 ‘뽕숭아학당’은 TV조선이 일궈낸 보너스 트랙이었다.
JTBC에선 스포츠와 예능의 결합이 성과를 냈다. 여행을 주제로 ‘뭉쳐야 뜬다’고 시작했지만 실제로 뜬 건 ‘뭉쳐야 찬다’(축구)와 ‘뭉쳐야 쏜다’(농구)다. 씨름선수 출신의 강호동과 농구선수 출신의 서장훈이 주축이 된 ‘아는 형님’도 순항 중이다. 모창 가수와 실제 가수의 대결이라는 기발한 발상의 ‘히든싱어’, 외국인들이 한국어로 토론하는 ‘비정상회담’ 등도 주목을 받았다.
MBN의 대표품목 ‘나는 자연인이다’는 중장년층 남성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다만 ‘트로트퀸’ ‘보이스트롯’ ‘트롯파이터’ 등은 시청률에 비해 아쉬움을 남겼다.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핵심부품 아이디어를 차용했다고 보는 시각은 여전히 남는다. 채널A는 시청률보다 화제성이 큰 예능프로를 주로 만들었다. 로맨스예능 ‘하트시그널’을 시즌3까지 제작했고 ‘도시어부’와 ‘강철부대’도 계속 전진 중이다.
즐거운 경쟁은 결국 즐거움의 신선도가 좌우한다. 연습과 답습은 하늘땅 차이다. 시행착오와 시대착오는 엄연히 다르다. 결국은 새로운 시도다. ‘새로움’이라는 말이 버거우면 그걸 다양함으로 바꾸면 된다. 소재를 어디서 찾느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삼라만상이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삼라만상이란 우주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을 말한다. 내가 최근에 이런 시(?)를 썼다. ‘눈을 뜨면 소주가 보이지만 눈을 감으면 우주가 보인다.’ 2연도 있다. ‘눈을 뜨면 진주가 보이지만 눈을 감으면 우주가 보인다.’ 보이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삼라만상에서 소재를 찾고 그것들을 잘 연결해보라.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이 있다. 실은 뻔하면 지는 거다. 요즘은 지상파 3사에서 종편의 아이디어를 살짝 빌려 간 프로도 눈에 띈다. 시청자들은 눈 귀만 있는 게 아니다. 머리도 있고 가슴도 있다. 예전에도 궁지에 몰리면 벗기기 베끼기 겹치기가 횡행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재활용이 어렵다.
다시 종편으로 돌아가자. 편집은 고르는 일이고 편성은 배치하는 일이다. 잘 고르고 잘 배치하려면 안목과 양식이 필요하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숲에서 나와야 숲이 보이듯 종편에서 나오니 이제야 종편이 보인다. 과거 10년의 결과물을 보고 미래의 10년을 예측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도 그렇지만 최초 최고보다 최선 최후가 중요하다. 성적표를 나눠주는 건 자만에 빠지라는 권고가 아니다. 지혜로운 자들에겐 성적표가 이정표다.
주철환 프로듀서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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