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아십니까? 저는 농촌 다락방에서 체험했습니다 [프로골퍼의 좌충우돌 마을기업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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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영 기자]
▲ 함양군 백전면 음천마을 전경 |
ⓒ 노일영 |
마을 회의 다음날인 2020년 10월 22일부터 나와 남편은 마을기업을 제안한 분과 함께 예비 마을기업 사업신청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모집 공고에서 내려받은 파일을 처음 열었을 때, 사업신청서의 그 무시무시한 첫인상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첫인상으로 상대를 예단하는 것은 생양아치나 하는 짓이지만, 경악과 공포의 감정이 덜컥 생겨난 건 어쩔 수 없었다.
각각의 페이지 상단에는 흉악한 표정의 제목들만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펼쳐진 여백과 공백의 고요한 세계. 파란색 글자로 작성 요령과 예시가 적혀 있었지만 한 번 읽고 지워버렸다.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겐 파란색의 작성 요령이 오히려 헛다리 짚기 같은 축구 페인팅 기술로 보여서 눈이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그 파란색 글자들을 잘 활용하는 듯했다. 우리는 각자 따로 사업계획서를 적고 중간중간 토론을 통해 의견을 취합하는 방식으로 신청서를 작성했다.
어쨌든 텅 빈 사업신청서는 멀찍이서 구경만 한번 하고 싶지, 다가가기도 싫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미 18명이 마을기업 회원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겉모습은 흉하지만, 속에는 모든 현상을 공(空)으로 여기는 도인이 들어있으니, 친해지자고.
마을기업 설립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당부를 드리고 싶다. 일단 주변의 마을기업 지원기관부터 찾아봐야 한다. 함양군이 속한 경상남도의 18개 시·군 지역은 경남대학교 공동체지원단을 통해 여러 가지 컨설팅과 교육 같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지원을 잘 활용한다면, 마을기업에 진입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리고 지원사업 중에는 사업신청서 관련 교육도 있어서, 이 사업신청서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얼마나 온순한 첫인상을 지니고 있는지 경험할 기회도 있다.
경남 이외의 지역에서 마을기업 설립을 고민하는 분들과 단체도 꼭 해당 지역의 지원기관과 연계해서 준비하시길 권한다. 2020년 당시 우리는 경남대 공동체지원단의 존재도 모를 만큼 마을기업에 무지했기에, 우리 조합이 예비 마을기업에 선정된 것은 그저 운이 좋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 예비 마을기업 사업신청서의 첫번째 페이지 |
ⓒ 노일영 |
1. 신청법인·단체 소개
2. 신청법인·단체 소개
가. 마을기업 설립과정–마을기업의 회원 구성과 설립 배경을 시간 순서대로 기재 (공동체성)
나-➀ 마을기업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와 필요성 (공공성)
나-➁ 지역사회공헌 목표와 기대효과 (공공성)
다. 마을기업의 지역적 특성 (지역성)
라. 마을기업의 기업성 (기업성)
1) 주요 제품·서비스
2) 주요 고객
3) 사업전략
4) 구성원의 전문성
3. 예비 마을기업 사업계획서
3-1. 예비 마을기업 사업계획서 개요
3-2. 예비 마을기업 세부사업 계획
3-3. 연간 수입 및 지출계획서
3-4. 사진 (사업장 및 기존활동 사진을 설명과 함께 첨부)
첨부 자료 : 회의록, 마을기업 회원 명단, 개인 및 기업정보 수집·이용·제공 동의서, 법인 정관, 주주 혹은 조합원 명부(출자금액 명시), 자부담 통장, 토지 및 건축물 대장, 주사업장 임대일 경우 임대차계약서, 지역사회공헌 증빙자료 등등.
시골 농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작성해야 할 내용은 차치하고 목차와 첨부할 자료 목록만 봐도 찔끔 지릴 지경이다. 워낙에 압도적이고 스펙터클한 규모라서 거대한 태풍이나 우박 같은 자연재해 앞에서 삽 한 자루만 들고 밭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사실 우리도 그 엄청난 무게에 짓눌려서 살짝 지려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어떻게 사업신청서를 작성했는지 잠깐 둘러보자.
가. 마을기업 설립과정 – 마을기업의 회원 구성과 설립 배경을 시간 순서대로 기재
(공동체성) 여기에 우리는 2020년 늦은 봄에 결성된 '지리산의식주연구회'의 활동을 시간순으로 적었다. 물론 잃어버린 낫 때문에 발생한 김 영감 아저씨와 박 영감 아저씨의 몸싸움 그리고 사생활까지 공격한 심리적인 난타전은 생략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한 번으로 끝나버린 공동 작업도. 그렇다고 우리가 작성한 사업신청서를 양심 불량이라고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 조합뿐만 아니라 다른 조합이 작성한 모든 사업신청서의 행간에도 이러한 분란과 갈등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 단정적으로 말한 것 같다. 이러한 분란과 갈등이 다른 조합에서도 존재할 수도 있다고 기대해 본다.
나-➀ 마을기업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와 필요성 (공공성)
뭐 이 부분은 사실 할 말이 좀 많았다. 밤농사가 끝나고 10월 중순이 되면, 주민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오가는 대화들, 가벼운 욕설에서 출발해 무지막지한 쌍욕으로 끝나기 일쑤인 그 대화들을 순화시키고 압축·정리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술판에서 나뒹굴던 토막 난 음성 언어를 문장으로 옮기는 게 생각보다 쉽진 않았다. 더구나 이 사업신청서란 것을 마을의 주민들만 보는 게 아니라 심사를 맡은 분들이 검토할 거라 생각하니, 의외로 작성하기 힘들었다.
알지도 못하는 심사위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은 문장들은 자꾸만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의 힘에 기대려고 했다. 교언영색은 남에게 잘 보이려고 그럴듯하게 꾸며 대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 라고 사전에 나온다.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몇 가지 버전을 만들어 봤는데, 쉽지 않았다. 어떤 것은 너무 원색적이라 '지리산의식주연구회'가 마초 집단처럼 보였고, 다른 버전은 흐느적거리는 샌님처럼 매가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하기로 했다. 생얼을 유지하되 기초화장만 살짝 하는 정도로 가자고. 심사위원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➁ 지역사회공헌 목표와 기대 효과 (공공성)
이 대목은 실로 마의 구간이라 할 만했다. 체력이 방전된 상태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오르막을 대하는 마라토너의 심정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목표는 정성적, 정량적 두 가지로 분류해서 작성해야 했는데, 그냥 원론적인 얘기밖에 할 수 없었다.
공동체를 회복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 자원을 활용하고, 주민들과 조합원들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사실 농촌 사회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협동조합이나 마을기업의 목적은 단 한 가지라고 생각된다. 지역 주민이 다 함께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으면서 사라진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것.
▲ 나를 잠깐 도(道)의 세계로 인도한 마을기업의 지역적 특성란 |
ⓒ 노일영 |
이 제목 밑으로 펼쳐진 아무것도 없는 여백을 초점이 없는 눈으로 한참이나 노려본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마치 면벽 수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흰 화면을 거의 한 시간가량 응시한 것 같다. 그때, 별안간 모든 것이 덧없고 물욕조차 하찮게 느껴지려 했고, 그래서 이러면 안 된다, 나는 한가롭게 도나 닦고 있을 시간이 없다, 우리 마을은 도가 아니라 돈이 좀 필요하다, 라고 생각하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뜻밖의 순간도 사업신청서를 쓰게 되면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보너스라 할 수 있다.
이 지역성을 적는 자리에서 지역의 범위 때문에 한참을 헤맸다. 그러다 일단은 행정안전부의 시행지침을 따르기로 했다. 행안부의 '마을기업 육성사업 시행지침'에서는 마을기업 지역의 범위를 농촌지역은 읍·면을 기본으로 하고, 도시지역은 구(자치·행정구)를 기본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강 3가지 정도로 이 공백을 메웠다. 돌이켜보면, 과한 의욕으로 인해 진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 나를 자학의 길로 빠트린 마을기업의 기업성 |
ⓒ 노일영 |
라. 마을기업의 기업성 (기업성)
여기에서 시작해서 서류의 거의 끝까지 자학의 구간이 이어진다. 왜 나는 경제학·경영학·회계학 같은 학문의 비범함을 예전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까. 대학의 교양 과목에서 애덤 스미스가 어쩌구, 보이지 않는 손이 저쩌구 할 때, 보이지도 않는데 그게 손인지 발인지 어떻게 알아, 라며 깔깔거리던 내 얼굴을 쥐어뜯어 버리고 싶었다. 기억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자학이 시작되는 느낌이다.
이렇게 연옥에서 지옥으로 이어지는 '기업성' 코스는 4개의 홀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제품·서비스라고 이름 붙은 1번 홀은 시각적으로 비교적 무난해 보이지만, 그린의 만만치 않은 경사도가 발목을, 아니 사업신청서를 쓰는 손목을 비틀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주요 제품으로 알밤, 깐밤, 밤잼, 밤말랭이, 밤채, 산수유까지 총 6개를 적었다. 참 많기도 많다. 이 정도 수준이면 냉면 전문점에서 짬뽕도 함께 끼워 팔겠다는 심산이다. 왜? 냉면에 자신이 없으니까. 이런 오류를 범하지 말길 바란다.
2번 홀은 주요 고객이라는 곳인데, 이 정도 난이도면 인터넷 캐디의 도움을 받아 대강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어서,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아, 드디어 내겐 지옥의 문이었던 사업전략이라고 불리는 3번 홀이다. 이곳에서 골프채를 내던지고 시합을 중도 포기한 골퍼가 한두 명이 아니다. 페어웨이 좌측은 밀림이 우거져 있고, 우측에는 그린 주변까지 이어진 워터 해저드(연못, 도랑 같은 물을 이용한 장애물)가 입을 벌리고 있다. 핸디캡 1번이다.
딱 14일이었다. 사업신청서를 내려받고 완성해서 제출해야 할 시간이. 그런데 사업도 모르고, 전략도 모르는, 총체적으로 쥐뿔도 모르는 내가 사업전략이라는 걸 무슨 수로 쥐어짜 낼 수 있겠는가. 일단은 밤잼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인터넷에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니 잼과 관련해서 유독 한 분이 두드러지게 등장했다.
잼에 관한 서적을 7권 정도 집필하신 분인데, 배필성 선생님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그분과 함께 밤잼을 개발하겠다고 적어버렸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뭐 만약 예비 마을기업에 선정되면, 읍소와 땡깡(생떼)을 적절히 배분한 전략을 통해, 배필성 선생님을 이 찐득찐득한 밤잼의 수렁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섣부른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예비 마을기업에 선정이 되고, 배필성 선생님에게 이메일로 우리의 사업신청서와 몇 가지 서류 등을 보냈다. 연락처를 구할 수 없어서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친절한 분이었다. 읍소와 땡깡 따위는 필요도 없었다. 따라서 우리가 개수작을 부릴 이유도 없었다. 사업계획서를 보시고 참 좋은 취지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으니.
구성원의 전문성이라는 4번 홀은 그린 주위에 3개의 벙커가 도사리고 있어서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그다지 어려운 구간은 아니었다. 박 영감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밤농사 몇 년 했어요, 나는 뭐 거의 30년은 했지, 그래서 아저씨의 경영역량 칸에다 농업경영 전문가, 라고 적었다.
그리고 귀촌하신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예전에 천안에서 농협 구내식당 운영하셨다고 했죠, 응, 몇 년 하셨어요, 대강 10년 정도는 한 것 같은데, 그래서 그 언니의 제품관련역량 칸에다 먹거리개발, 이라고 적었다.
이게 약간 사기성이 있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적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고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아마도 심사위원들이 구성원의 전문성이라는 이 대목에서 우리 서류를 읽으며 피식 웃어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제까지 지옥의 입구에서 어슬렁거렸다. 생지옥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3. 예비 마을기업 사업계획서'가 아직 남아있다. 여기는 무간지옥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무간(無間)의 의미는 그곳에서 받는 고통이, 간극이 없이 계속된다는 뜻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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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노일영 기자는 프로 골퍼로 KLPGA 정회원입니다. 현재 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 이사장과 마을기업 대표, 함양군 백전면 음천마을 이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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