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소민의 슬기로운 예술소비] 샤넬이 시샘한 옷 잘 만드는 아티스트 '엘사 스키아파렐리'

데스크 2021. 5. 2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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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 스키아파렐리의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와 작업한 랍스터 드레스(좌), 랍스터 드레스를 입은 심프슨부인(우)(1937)ⓒ위키피디아

시대를 앞서 자신이 만든 의상을 예술이라고 표현한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는 1934년에 여성 디자이너 최초로 타임지 커버를 장식할 만큼 유명한 디자이너였다. 또한 1930년대 당시에는 브랜드 샤넬을 이끄는 코코 사넬(Coco Chanel)의 라이벌 이었으며, 샤넬은 그녀를 가리켜 “옷 잘 만드는 이탈리안 아티스트잖아!” 라며 질투심을 들어냈다고 한다. 이렇게 스키아파렐리를 아티스트로 설명하게 된 배경은 1930년대를 중심으로 마르셀 뒤샹(MarcelDuchamp), 만레이(ManRay), 앨프리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등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고 지적, 문화적으로 교류를 지속한 데에 있다. 이러한 교류는 그녀에게 패션을 통하여 그녀의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을 표현할 수 있게 한 연결고리가 된 것이었다.


샤넬이 합리적이고 대중적인 패션을 제시하며 192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면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패션을 예술로 승화시켜 당시 대표적인 예술사조 였던 초현실주의를 자신의 패션디자인에 담아낸 예술가였다. 특히 그녀는 당대 저명한 예술가들과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진행했는데, 오늘날 예술과 패션 콜라보레이션의 시초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약 100년 전, 유럽에서는 일군의 호기심 많고 창의적인 예술가들이 인간 보편적 정신 현상을 미술의 영감으로 포착하고 ’초현실주의(surrealsism)'라 이름 한 새로운 미술 운동을 일으켰다. 초현실주의는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사조 가운데 하나였으며, ‘꿈(dream)'이라는 몽환적인 무의식의 시간을 다뤘다. 우리가 잠든 사이 꿈이라는 또 다른 의식 세계를 통해 전혀 상상치 못한 색다르고 생경한 맥락과 상황이 재등장한다는 사실을 시각예술로 표현해 낸 미술 운동이 바로 초현실주의다.


1920~50년 유럽대륙은 유럽의 예술인들에게 상상을 넘어선 ‘초현실적’ 상황이 펼쳐진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난 후 유럽인들은 전쟁의 후유증 속에서 경제적 불황을 면치 못했고, 사회 부조리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소련 공산주의와 독일 나치주의 확산에 불을 지폈다. 나치주의의 확산과 프랑스 점령 이후 수많은 근대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한 것을 계기로 미국, 특히 뉴욕에서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유럽 초현실주의의 대유행 기를 맞았다. 현실과의 틀에 박힌 창조적 과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초현실주의는 예술가에게 환상의 자유를 허락했고 디자이너에게는 디자인이란 잘 작동해야 하는 기능성 물건이어야 한다는 바우하우스 전통의 기능주의 도그마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러한 초현실주의 미술과 디자인은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심리분석학 이론에 기초한다.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1930년대 코코샤넬(Coco Chanel)과 함께 파리 패션을 주도할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했으며 1920, 30년대를 중심으로 다다(Dada)와 초현실주의(Surrealsim) 등 아방가르드 예술가 그룹과 활발하게 교류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스키아파렐리에게 옷은 영감과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예술의 장으로서 발전하게 되고, 이는 그녀만의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아이디어를 끌어냈고, 사물을 외관 그대로 표현하기 보다는 독창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디자인했다.


그녀는 패션업계 최초로 아티스트들과 컬래버레이션 작품을 선보인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특히 달리와의 작업은 신발을 거꾸로 머리에 쓰는 슈 햇(Shoe Hat, 1937), 로브스터(바닷가재)가 중앙에 프린트된 로브스터 드레스(Lobster Dress, 1937) 등을 탄생시켰다. 스키아파렐리의 디자인은 점점 기이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띠는 초현실주의 패션으로서 정점을 찍었다. 1938년 서커스 컬렉션에서는 의상의 앞뒤를 바꾼 백워드 슈트(Backward Suit)를 제작해 기존 의복의 기능과 목적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으며, 위트를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옷의 새로운 기능을 제안했다. 초현실주의 패션을 통해 옷의 기능과 목적, 가치에 대한 고정 관념에 도전하였고 몸 위의 캔버스로서 옷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예술과 패션의 만남을 통해 창조된 스키아파렐리의 독창적인 의상들은 심프슨 부인(Wallis Simpson) 등 기이하고 위트 있는 스타일 모험을 즐기는 부유한 베스트 드레서 고객들의 선택을 받으며 1930년대 패션을 이끌었다. 그녀의 고객으로는 미국의 배우 매 웨스트(Mae West)가 있었으며 그녀의 몸매를 본떠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향수인 ‘쇼킹핑크’의 바틀을 만들기도 했다.


ⓒGoogle image Search

1930년대 파리 방돔 광장은 하이 패션의 중심지였다. 이곳 21번지에는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아틀리에가 있었고 광장과 연결된 캉봉 거리에는 마드무아젤 샤넬의 메종이 있었다. 코코 샤넬은 이탈리아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랠리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는데, 둘은 서로 지향하는 스타일이 달랐다. 샤넬은 비교적 값비싸고 우아한 실용적 스타일임에 반해 스키아파렐리는 초현실주의적인 개성 있고 대담한 표현을 좋아했다. 이러한 스키아파렐리에게 샤넬은 “옷이나 만드는 이탈리안 아티스트”라고 폄하했고, 스키아파렐리는 샤넬을 두고 “그저 모자 만드는 여자“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로 손꼽혔던 이 둘은 각각 극단적으로 다른 스타일을 추구했다. 샤넬이 단아하면서도 여성적인 우아함을 추구했다면, 스키아파렐리는 과감하고 실험적이며 예술적이었다. 그녀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구두 모양의 모자는 초현실주의의 데파이즈망(위치교환법) 기법의 대표적인 예로 소개되곤 한다. 그녀를 패션 디자이너로 처음 널리 알려지게 만들었던 이른바 트롱프뢰유(착시 효과를 통해 평면을 입체처럼 표현하는 방법) 스웨터 작품은 1927년 니트웨어 컬렉션으로 선보였는데, 이 눈속임을 일으키는 리본 매듭 패턴의 디자인은 패션 잡지 보그(Vogue)로부터 예술적인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쇼킹 핑크’는 그녀는 대표하는 컬러이다. 또한 피카소와 브라크등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받은 듯한 ‘서커스 컬렉션(Circus Collection)’, ‘파간 컬렉션(pagan collection)’등을 1938년 선보였으며, 이렇게 음악, 예술, 미술과 다양한 소재와 제품을 패션에 접목시킴으로서 현대 패션의 다양성과 상상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디자이너다.


이태리 출신이지만 프랑스를 너무 사랑해 프랑스인이 되었고 프랑스를 위해 2차 세계대전 당시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오가며 프랑스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당시 독일군의 스파이였다는 문서가 발견된 프랑스 출신인 샤넬과는 정말 대조적인 인생을 살았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코코 샤넬은 리츠 호텔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은 후에 파리 나치 사령부 본부가 되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함께 살롱 문이 닫히고 파리가 나치의 손에 넘어간 상황에서 샤넬은 독일군의 장교와 교제했고, 나치에 적극 협력해 그녀의 옛 애인인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친구인 처칠 수상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던 공작에 적극 가담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종전 후 샤넬의 이러한 행위가 밝혀지면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샤넬은 배신자로 낙인 되었고, 이로 인해 스위스로 망명을 떠났다. 망명 후 돌아와 다시 리츠 호텔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무려 1937년부터 37년간 리츠 호텔에 장기 투숙한 셈이다.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거처를 옮겨 강의를 하다 전쟁 종료 후 다시 파리로 돌아오지만 디올의 ‘New Look’이 휩쓸고 있는 패션계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1954년 은퇴를 하고 자신의 자서전 ‘쇼킹라이프(shoking pink)’을 집필하면서 여생을 보낸다.


그렇게 끝이 났던 스키아파렐리의 디자인 라이프는 2007년 토즈그룹 회장 디에고 델라 발레가 그녀의 브랜드를 인수, 새롭게 리뉴얼을 시작하고 수장으로 파리다 켈파를 임명했다. 2013년에 그녀의 디자인의 세계관을 이어받은 디자인하우스가 다시 오픈하면서 그녀의 작품세계관을 이어가고 있다.


스키아파렐리는 패션디자이너로 이름을 남겼지만 그녀의 도전정신과 세계관은 복식예술 작품을 통하여 표현되었으며, 기존의 형식을 깨트리고 새로운 세계로 확장될 수 있는 역사적인 기록물이라 전해진다. 자신의 가치 세계관을 정립하고 창작하고 표현하는 이를 예술가라고 정의 내린다면 그녀는 당대 시대를 이끌던 하나의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지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순히 디자이너 이었다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독특한 생전 철학은 ‘옷을 몸 위의 캔버스로 다룬 초현실주의 패션 예술가’로서 기억되고 있다.


엘사 스키아파렐리ⓒGoogle image Search


BONUS NOTE:

통상 ‘패션 디자이너’라고는 하지만 ‘패션 예술가’라는 표현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패션은 디자인의 영역일까 예술의 영역일까? 먼저, 예술(art)이란 어원을 살펴보자면 라틴어 아르스(Ars)에서 유래된 것으로 물건, 집, 도기,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기술(장인 예술)을 의미했다. 따라서 16세기에는 옷을 만드는 복식인 패션은 예술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인식은 17세기부터 변화하기 시작해서 18세기에 이르러 예술의 의미가 ‘미적예술’, 즉 ‘순수예술’로 분류되었고 복식과 공예는 예술의 영역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윌리엄 모리스에 의해 ‘순수예술과 실용예술을 차별하는 것은 오류이며 장인적 기여를 진정한 예술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미술공예운동’ 이후, 복식은 예술의 한 분야로 다시 환원 되었다. 이로써 패션 디자이너의 순수 의지에서 나오는 창의성과 표현력을 통하여 제작되는 패션을 예술로 정의 할 수 있게 되었다.


21세기에 이르러 브랜드를 이끄는 전문 아트디렉터들 중에는 패션쇼와 공연을 기획하며 패션전시 및 사진, 회화 전을 여는 등 아티스트로서의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쳐나가는 이들도 등장했다. 또한,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같은 유명한 예술가들 역시도 패션과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통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넓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예술가들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우리는 틀림없이 그들의 예술 세계관을 공감하고 동경하며 일상의 짜릿한 일탈을 경험할 것이다. ‘꿈(dream)'이라는 몽환적인 무의식의 시간을 다룬 초현실주의 시대를 살았던 그녀의 예술작품은 지금보아도 전혀 촌스럽거나 뒤쳐짐 없이 세련미 그 이상이다. 이태리의 명문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그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 남과 다른 자신 만의 것을 찾기 위한 초현실주의자를 갈망하는 그녀의 열정의 ‘꿈(dream)'은 현재를 미리보기(꿈) 할수 있었고,바로 지금 세상에서 실현 중이다. 이처럼 예술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꿈(dream)'을 실현케 한다.


엘사 스키아파렐리ⓒGoogle image Search

1.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 항상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2. 비싼 드레스를 사서 수선했다가 망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돈낭비는 없다.

3. 대부분의 여성과 남성은 색채에 무지하다.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하라.

4. 여성의 20퍼센트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70퍼센트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음을 기억하라.

5. 여성의 90퍼센트가 남의 눈에 튀는 것과 타인이 내뱉는 말을 두려워 한다. 그들이 회색 수트를 사는 이유다. 남과 구별되도록 노력하라.

6. 여성은 항상 경청하며 적절한 비판과 조언을 듣고 수용해야 한다.

7. 여성은 남자와 함께, 혹은 혼자서도 옷을 고를 수 있어야 한다.

8. 결코 다른 여자와 쇼핑하지 마라. 그들은 때때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질투에 빠지기 쉽다.

9. 옷을 많이 사지 마라. 최고의 것이 아니라면 가장 싼 것을 사라.

10. 절대로 몸에 옷을 맞추지 말고 옷이 맞도록 몸을 훈련하라.

11. 진정한 여성은 자신을 알아주고 존중해주는 한 곳에서 구매한다. 유행을 따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 마라.

12. 옷값은 자기 돈으로 계산하라.


그녀의 자서전 ‘쇼킹라이프’ 말미에 여성들을 위한 스키아파렐리의 12가지 조언이다. 필자는 1번, 3번, 6번, 특히 10번에 눈길이 갔는데, 당대를 휩쓸고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스키아파렐리의 조언은 왠지 주목해야만 할것 같다. 남녀를 불문하고 건강을 위해서라도 몸을 훈련시켜볼 것을 추천해본다. 오늘부터 1일!


홍소민 이서갤러리 대표 aya@artcorebrow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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