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은 패션이다] 욕망의 삼각주와 비슷.. 대리체험 통한 '인간 내면 엿보기'

2021. 4. 17.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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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로맨스 예능: 사랑의 스튜디오서 하트시그널까지
봄날의 기억은 교실로 향한다. 관심사는 캐스팅이었다. 내 짝은 누가 될까. 나는 누구 짝이 될까. 담임은 교장이 배정해도 짝만큼은 내 뜻대로 고를 거야. 하지만 복도에 일렬로 줄 서본 후로는 현실을 자각한다. 나보다 한 뼘 이상 차이나는 친구가 내 짝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능 짝짓기 프로그램의 ‘원조’로 불린 MBC ‘사랑의 스튜디오’는 1994년 10월부터 7년 동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MC 임성훈의 재치와 품격을 바탕으로 2800여명이 출연해 47쌍이 이어졌다. 유튜브 캡처

교실은 그렇다 해도 사회는 어떤가. 부모는 운명이라 쳐도 짝은 최고를 만나고 싶다. 이런 욕망을 감지하고 만들어낸 예능이 짝짓기프로다. 하지만 기획단계에서부터 논란이 제기됐다. 짝짓기는 동물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문제 삼은 이들은 ‘서로 마음에 드는 상대끼리 짝을 이루거나 짝이 이뤄지게 하는 일’이라는 정의를 읽어줘도 항의를 멈추지 않았다. 대안으로 나온 게 ‘짝 찾기’인데 원어의 온도에는 못 미쳤다.

다음엔 원조(元祖)논쟁이다. 족발 떡볶이 순두부는 ‘우리가 원조’라고 우겨도 그러거나 말거나 대충 넘어간다. 손님들은 원조라서가 아니라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원조라서 보는 게 아니라 재미있어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예능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다면 오리지널을 살피는 작업도 필요할 것 같다.

‘사랑의 스튜디오’(MBC)가 첫 방송된 1994년 10월 이전 흑백TV시절에도 짝짓기프로는 존재했다. 최초의 상업방송인 TBC(동양방송TV, 현재 KBS2TV)의 ‘행운의 청춘열차’다. 김웅래 PD가 연출하고 코미디언 배일집씨가 진행했다. 기사에 따르면 ‘남녀회사원들이 출연, 싱그러운 대화를 통해 건전한 교제를 주선하는 프로로 특히 미혼남녀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중앙일보 1978년 10월 21일자) 순결 같은 예민한 주제로 출연자끼리 토론을 벌이기도 했고 결혼이 성사된 커플은 뉴스로도 소개됐다.

로맨스 하면 퍼뜩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김만준의 ‘모모’다. ‘모모는 환상가/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에서건 야외에서건 끝없이 사랑은 변주된다. 이 불멸의 소재를 예능이 마다할 리 있겠는가. ‘사랑의 스튜디오’ 별칭은 ‘사랑의 작대기’다. 호감 가는 상대를 누르면 그래픽이 화살로 이어졌고 제작진에겐 자연스럽게 빅 데이터가 마련됐다. 객관적(?) 선호도 1등과 1등, 2등과 2등 이런 순서로 연결되면 4쌍이 다 이루어졌다. 출연자끼리도 저 사람 정도면 날 누르겠지 하는 심리가 은연중 작동한 것일까. 내가 선택한 사람이 타인을 찍을 경우에 닥쳐올 자존심의 붕괴를 스스로 차단했다는 얘기다.

인기가 대단했다. 신청 후 6개월 정도 기다리는 건 예사였다. 잇달아 SBS의 ‘선택남녀’같은 프로그램이 생겼다. 박경림은 자신이 MC인 KBS2TV의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결과적으론 ‘사심방송’이었던 셈인데 아무튼 제목의 의미를 잘 살려준 에피소드로 기록됐다. ‘남희석 이휘재의 멋진 만남’(SBS)에서도 진행자 남희석이 출연자였던 치과의사와 결혼해 화제를 낳았다. 박경림 남희석은 결혼 후 화목한 가정을 꾸렸으니 이 프로들은 사랑의 산파 역할을 제대로 한 셈이다.


‘사랑의 스튜디오’에는 7년 동안 2800여명이 출연해 47쌍이 결실을 봤다. MC 임성훈의 재치와 품격도 인기 유지에 한몫했지만 이 프로가 낳은 최고스타는 메인작가 김영현이었다. 남녀심리연구의 대가로 등극하는가 싶더니 마침내 세계인을 사로잡은 사극 ‘대장금’을 집필하는 저력까지 발휘했다.

짝짓기프로의 시청률은 처음과 끝의 5분이 좌우한다. 어떤 매력을 가진 인물들이 나왔나, 최종적으로 누구누구가 맺어졌나가 시청흡인의 바로미터다.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도 회사홍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아마 연인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했으리라. 방송 다음 날에는 출연자 중 성사가 안 된 사람의 연락처를 묻는 전화가 유독 많았다. 녹화당일 출연자가 펑크를 내 방송관계자가 현장에서 대신 출연하는 일도 간혹 벌어졌다.

연예인 짝짓기프로그램도 덩달아 생겨났다. 처음으로 본인의 이름을 내건 ‘강호동의 천생연분’(MBC)은 원래 ‘목표달성 토요일’의 한 코너였다. 시작할 때 ‘논픽션 시츄에이션 러브버라이어티’라고 외치는 걸로 유명했다. 여기서 많은 유행어가 탄생했다. ‘신토불이’는 ‘신나는 토요일 불타는 이 밤’을 줄인 말이다. 출연자의 댄스신고식과 개인기 발표는 이 프로를 통해 정착됐다. 한때 전혜빈의 별명이 ‘이사돈’이었는데 댄스 신고식 때 ‘24시간 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 강호동은 로맨스예능의 최강자였다. ‘리얼 로망스 연애편지’(SBS) ‘애정만세’(MBC) ‘산장미팅-장미의 전쟁’(KBS2TV) 등 방송3사를 러브스토리로 평정했다.

여자1호, 남자1호 등의 호칭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짝’(SBS)은 예능과 다큐의 경계선상에 있었다. 이 프로는 종영 전에 사회면에도 크게 등장했는데 출연자 중 한 명이 SNS를 통해 ‘다들 커플인데 나만 혼자다. 그런 나를 카메라가 집요하게 따라다녀 모멸감을 느낀다’는 말을 남긴 후 극단적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이 프로를 제작했던 남규홍 PD가 최근 ‘스트레인저’라는 프로를 선보였는데 출연자 12명의 심리와 행동을 예리하게 파헤치는 관찰예능프로그램으로 주목받았다.

채널A에서 2018년 3월 방영한 ‘하트시그널 시즌2’ 포스터. 하트시그널은 시그널 하우스에 입주하게 된 청춘 남녀들이 서로 ‘썸’을 타고, 연예인 예측단이 이들의 심리를 추리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채널A 제공


로맨스예능은 지상파와 종편, 케이블의 편성표를 꾸준히 장식하고 있다. 시간의 순서와 무관하게 더듬어보면 ‘연애의 맛’(TV조선)은 오랫동안 연애를 못 했던 연예인들에게 제작진이 소개팅을 시켜주는 프로그램이다. ‘하트시그널’(채널A)에선 숨겨진 사랑의 시그널을 예측단원들이 추리력을 동원해 찾아내는 게 재미의 축이다. ‘리얼 연애-부러우면 지는 거다’(MBC)에선 속맘을 공개한 실제 연예인커플의 일상을 담아낸다. ‘썸바디’(Mnet)가 10인의 댄서들이 춤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는 댄싱로맨스예능이라면 같은 채널의 ‘러브캐처’는 일종의 연애심리게임이다. ‘선다방’(tvN)은 맞선 볼 때의 ‘선’에 다방을 붙인 것이다. 시즌에 따라 봄여름, 가을겨울 편으로 나눠 방송한다. 사랑의 적자생존방식을 리얼하게 보여준 ‘솔로워즈’(JTBC)는 2012년에 일어난 솔로대첩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일반인남녀 100명이 참여해 7라운드를 거치며 적나라하게 호감을 쟁취하는 모습을 담은 서바이벌미팅게임이다.

이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 결혼했어요’(MBC)는 어디까지가 리얼이고 어디까지가 대본일까. 개그맨 윤정수와 김숙이 이른바 쇼윈도부부로 출연한 ‘님과 함께 시즌2’의 부제는 ‘최고의 사랑’이었는데 그들은 정말 최소한이나마 사랑을 했을까. 가상과 현실이 뒤섞이며 윤정수는 파산 이후 성공적으로 방송에 복귀했다. 여성 시청자들이 김숙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다는 기사도 나왔다. 당시 두 사람은 시청률이 7% 넘을 경우 실제로 결혼하겠다는 대국민 공약까지 했다. 천진한 시청자라면 그들의 연기를 눈치 못 채다가 나중에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문득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제목이 떠오른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화면 속의 사실과 화면 밖의 진실 사이에 현실이 있다. 그들이 TV에 출연하는 진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진짜로 사랑을 찾아서? 아니면 관심받고 싶어서? 로맨스예능은 욕망의 삼각주와 비슷하다. 출연자와 제작진, 시청자의 욕망이 뒤섞여 있다. 제작진은 적은 제작비로 시청률을 높이고 싶다. 시청자는 대리체험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길 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게 진짜 내면의 풍경일까. 삼각주가 범람원이 되는 게 바로 그 지점이다.

주철환 프로듀서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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