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메모리즈㉓] '청년' 홍서범..사랑꾼, 로커, 월든에 놀러간 니체

홍종선 2021. 4. 3.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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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로커 홍서범 ⓒ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뭔가 좀 어른인 척하고 싶고, 더이상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그때 ‘불놀이야’라는 노래가 세상에 나왔다. TBC(현 JTBC의 전신) ‘젊은이의 가요제’ 금상에 빛나는 곡이었다. ‘옥슨80’이라는 밴드명도 멋있고, 록을 하는 보컬 홍서범의 힘 있으면서도 칼칼한 목소리는 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서정적 느낌의 ‘그대 떠난 이 밤에’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한창 감성 풍부한 중학교 시절, ‘가난한 연인들의 기도’, ‘걷잡을 수 없어요’를 들으며 설렜다, 색달라서 좋았다.


대학생이 됐을 때, 홍서범은 솔로 가수였다. 아쉬움을 밀어낸 건 노래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였다. 이후 홍서범은 재미있는 가사에 날 것 같은 노래 ‘구인광고’, 독창적이고도 대단한 랩송 ‘김삿갓’, 장차 부인이 될 연인이자 가창력 풍부한 가수 조갑경과 ‘내 사랑 투유’를 불렀다. 아, ‘이별을 위한 랩소디’를 빼놓을 수 없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었다. 방심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다음엔 또 어떤 노래로, 새로움을 경험하게 할까, 기대했다.


1979년 탄생한 록밴드 '옥슨79'에서 기타리스로 활동한 홍서범은 이듬해 리더를 맡고 '옥슨80'으로 '젊은이의 가요제'에 참가, 불세출의 명곡 '불놀이야'로 금상을 받았다. ⓒ

1994년, 처음 볼 때부터 반해 ‘미녀가수’라 부르며 마음에 담은 조갑경과 결혼했다. 와, ‘구인광고’ 노래 속 이상형과 결혼했네! 가수는 정말 노래처럼 되는 건가 싶은, 신랑 홍서범의 머리 위에서 불꽃놀이가 펼쳐지는 것 같은 결혼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방송에 자주 등장했다. 연예인 부부이고 알콩달콩 잘사는 부부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 연예가이기에 러브콜이 잦았다. ‘종합예술인’이라 불릴 만큼 예능 감각이 있는 홍서범인 것도 한몫했다. 부인 조갑경 역시 신인 시절, MBC ‘청춘행진곡’ 내 최병서의 ‘병팔이의 일기’가 ‘병팔이랑 갑경이랑’으로 바뀔 만큼 예능감을 자랑한 인물. 두 사람의 방송 활약은 예견된 결과였다.


오랜만에 가수 홍서범이 노래 잘하는 가수임을 확인시킨 무대가 있었다. 지난해 3월 MBC ‘복면가왕’에 ‘강변북로’라는 가면과 이름으로 출연한 때다. 이후 각종 블로그와 SNS에는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줄 몰랐다’, ‘자꾸 흥얼흥얼하게 된다’는 글들이 올랐다. 음역대가 높은 여자 가수의 노래를 정말 깨끗하게 잘 불렀다. 목소리의 힘도 좋았다. 판정단이 젊은 층에서 가면 속 인물을 추측할 수밖에 없는 무대였다.


개인적으로 더욱 눈길이 간 건 선곡이었다. 이런 사랑꾼을 봤나. 간만에 ‘가수 홍서범’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무대에서 부른 게 아내 조갑경의 데뷔곡 ‘바보 같은 미소’였다. 사실 고음 좋은 가수 조갑경이 편하게 불러 그렇지, 결코 쉬운 노래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홍서범은 살아있다’를 아내 노래를 통해 만방에 알리다니. 부부간에 사랑의 적금통장이 있다면 1년 치 납입금을 한 번에 붓는 무대였다.


가수 조갑경의 남편 홍서범 ⓒ'불후의명곡' 방송화면

그로부터 딱 1년 뒤인 지난 3월, 홍서범은 다시 멋진 무대를 선보였다. KBS2 ‘불후의 명곡’이 마련한 ‘사랑꾼 남편’ 특집에서다. 존 덴버의 ‘Annie's Song’을 불렀는데,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본래 한 곡이었던가 싶은 편곡 실력을 과시했고, 20대 청년 같은 청아한 음색과 힘 있는 성대로 듣는 이를 놀라게 했다. 당당히 우승했다.


좋은 노래의 제일 요소는 진심이다. 뛰어난 작곡과 가창력뿐이었다면 감동을 선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TV조선 ‘인생감정쇼, 얼마예요?’에 1년여 함께 출연하면서 곁에서 보니 홍서범 조갑경, 조갑경 홍서범 부부는 결혼 25주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사랑한다. 사랑하기에 토라지고 싸움도 하고 화해도 잘한다. 싸우다가도 ‘미녀가수’ 한마디에 웃음이 도는 아내, 아내가 화났다 싶으면 슬쩍 짝꿍이 좋아하는 떡볶이를 사다가 놓는 남편, 그 떡볶이 한 접시에 화를 푸는 소박한 아내. 그 자상함과 착함이 참 보기에 좋더라.


당시, ‘Annie's Song’(애니의 노래) 무대가 너무 좋아서 “어서 앨범 내시라”고 팬심을 무기로 압박했다. 가수 홍서범의 신곡을 향한 목마름이 폭증한 탓이었다. 모르고 한 얘기였는데, 바로 나흘 뒤 거짓말처럼 신곡이 나왔다. 바로 ‘월든에 간 니체’이다.


록으로의 회귀! 2018년 발매된 앨범 'R2R' ⓒ

일평생 록을 하되, 예상을 허락하지 않는 노래들을 교차로 선보이는 가수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머리를 크게 한 방 맞았다.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인지에 대한 삶의 성찰을 담은 가사를 고루하지 않고 신나게 적었고, 메시지에 딱 어울리는 경쾌한 리듬으로 온몸을 들썩거리게 만든다. 사람 홍서범이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가사, 설사 가사를 듣지 않는다 해도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작곡, 홍서범 자체였다.


놀라운 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 ‘월든’과 니체의 철학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하나로 연결한 해석이다. 하버드대를 나온 헨리 데이브드 소로는 28세에 친구에게 빌린 도끼 하나를 들고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월든 호숫가로 갔다. 소나무를 한 그루를 찍어 방 한 칸짜리의 작은 집을 지었고,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자연에서 얻어 자급자족했다. 그가 숲으로 간 것은 ‘더 빨리! 더 많이!’의 구호 아래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사회 흐름 속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본질’을 직면하고자 함이었다.


1845년부터 2년 2개월, 서른 살까지 숲속 호숫가에서 생활한 소로는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구조 속에서도 건강과 균형을 잃지 않는 자연의 상호작용을 체득하며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 영혼의 존재를 깨닫는다. 육체와 물질문명 이상으로 영혼에도 성장 단계가 있고, 사람의 삶은 자신의 영혼을 성장시키는 것에 힘을 쓰는 데 본질이 있다고 소로는 힘주어 말한다. 생각을 다듬고 다듬어 숲에서 나온 뒤 7년이 지나서야 책 ‘월든’을 출간했지만, 자본주의 발달 초기 19세기 중반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리고 100년 이상이 흘러 웰빙, 잘사는 법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월든’은 재평가되었고 많은 이들의 ‘다독’(2번 이상 다시 읽기)을 부르고 있다.


홍서범의 노래 ‘월든에 간 니체’를 통해 새로이 알게 된 것이, 생각해 보니 짜라투스트라도 서른에 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고독하게 살며 깨달음을 얻었으니 현재 있는 대로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 ‘최후의 인간’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을 극복해 내는 인간, ‘초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사람들 속으로 내려와 깨달음을 알렸으나, 대중은 감화되기는커녕 되레 그를 조롱했다. 영혼보다는 육체, 정신보다는 물질을 중시하는 지금의 자리에 안주해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1883년 짜라투스트라를 통해 초인 사상을 역설한 프레드리히 빌헬름 니체 역시 산으로 간 적이 있다. 반복적 편두통, 시력감퇴를 동반한 안질, 소화 장애와 마비 증세로 고통을 겪던 그는 고향인 독일을 떠나 스위스 산악 지역으로 들어가 신선한 공기로 건강을 도모했다. 홍서범은 그 니체를 소로가 갔던 월든 호숫가로 초대한다, 그것도 ‘놀러 오게’ 한다.


해맑은 미소가 어울리는 어른 홍서범 ⓒ'복면가왕' 방송화면

월든 호숫가에서 삼라만상과 함께 눈뜨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만큼은 못 돼도 아침을 ‘월든에 간 니체’로 시작한다.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노래만 듣다가, 곡이 나온 지 보름이 훌쩍 넘어서야 전화했다. “잘 지냈어?” 정겹게 받던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노래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자 바로 경어체로 바뀐다.


“나이가 드니 노래 가사 쓰기가 쉽지 않아요. ‘사랑’ ‘이별’에 관해 적을 수도 없고(마음속으로 혼자 외쳤다. 왜요, 사랑과 이별에 관한 명곡들을 그토록 잘 만들었으면서). 제가 지금 살아가면서 고민하는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삶의 성찰’이 됐습니다.”


“책 ‘월든’을 처음 읽은 건 오래됐죠, 너무 좋아서 다시 읽기도 했고. 최근에는 오디오북으로 차에서 들으며 다녔어요. 사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하버드대 나와서 사회적 성공 일로를 걸을 수도 있었지만, 대자연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한 거잖아요. 구절구절 우리에게 주는 좋은 얘기들이 많고요. ‘짜라투스트라…’는 고교 시절 선물로 받았어요. 그때는 읽어도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싶었는데, 이제는 절반은 이해가 되더라고요.”


“오디오북을 듣다가 문득, ‘아, 안질도 있고 니체가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소로가 사는 월든에 가게 하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실제로 니체가 스위스 질스 마리아 지역에 요양 갔을 때 호숫가에 있는 주를레이 바위 앞에서 깨달음을 얻어 ‘짜라투스트라…’를 쓴 거잖아요. 니체를 월든 호숫가에 보내자, 그것도 ‘놀러 가게’ 하자. ‘잘 노는 게 잘사는 거다!’라는 게 저의 신조니까요. 그 바탕에는 소로의 월든도,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도 있을 겁니다.”


니체(1844~1900)가 월든 호숫가에 가서 소로(1817~62)를 만나는 상상 만큼이나 '짜릿'한 노래 ⓒ이상 홍서범 제공

잘 노는 게 잘사는 거다! 평소 ‘자유인’으로 불리는 홍서범. 니체가 말하는 ‘중력의 영’에 지배받는 무거운 영혼 아니고, 중력 떨쳐내고 가벼이 날아오르는 ‘비행술’ 익힌 사람처럼 경쾌한 발걸음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삶과 생각을 노래 ‘월든에 간 니체’로 풀어냈다. 일상에 철학을 뿌리내린 사람, 초인 김삿갓이 홍서범에게서 보였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당장 ‘월든에 간 니체’, 가사를 음미하며 리듬에 몸을 맡겨 보자. 영혼이 밝아진다. 가수 홍서범의 노래는 라이브로 들을 때 더욱 소름 돋는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잠잠해져 콘서트 현장에서 싱어송라이터 홍서범의 숱한 명곡들을 듣고 싶다. 초대 가수로 조갑경의 노래도 들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

데일리안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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