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꿈은 안녕하십니까] 집 없는 자의 절망… "벼락거지가 됐다"
집값 잡겠다는 정부정책
신뢰한 무주택자들 전세난민
청년층은 '패닉바잉'
분양시장은 로또로 변질
일부계층 혜택 집중에
세대간 갈등까지 커져
[아시아경제 이춘희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할퀴고 간 2020년을 변곡점으로 국내 경기 흐름은 뚜렷한 'K'자형 양극화 커브를 그릴 것으로 전망된다. 소득과 자산 상위층은 빠르고 강한 회복세를, 하위층은 급전직하의 내리막길을 향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 사이 우리 앞에 나열되던 생애주기별 과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닿기 힘든 '꿈'이 돼가고 있다. 나름의 노력을 다 했는데도 별안간 빈털털이로 전락했다는 '벼락거지'라는 자조는 과거와 결이 다른 상대적 빈곤을 말한다.
이에 아시아경제는 '2021년, 당신의 꿈은 안녕하십니까' 기획을 통해 부동산, 일자리, 출산, 자영업, 교육 등 올해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진단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한다.
'벼락거지'. 지난해 부동산시장을 대표하는 말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3년7개월간 치솟은 집값은 유주택자를 '벼락부자'로 만들었다. 반면 "집값을 안정시키겠다"는 정부의 정책을 신뢰한 무주택자들은 멀어진 내 집 마련 꿈에 스스로를 '벼락거지'로 부르고 있다.
집을 둘러싼 절망은 특정 세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젊은 층은 평생을 벌어도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좌절을 토로한다. 정부의 고강도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면 집값이 떨어질 것이란 판단에 주택 구입을 미룬 중년층 역시 치솟는 전셋값에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집값을 잡겠다며 정부가 추진한 분양가 통제는 아파트 분양시장을 소수의 현금부자가 이익을 향유하는 '로또'로 변질시켰고 젊은 층의 '패닉 바잉(공황에 따른 매수)'을 촉발해 가뜩이나 치솟은 집값을 더 자극하는 악순환을 양산하는 모습이다.
한번 팔면 다시 못사는 집
직장인 최모(47)씨의 사례를 보자. 그는 2018년 말 서울 성북구의 아파트를 8억5000만원에 팔았다. 정부의 고강도 대책에 "이제 집값 하락할 일만 남았다"는 말이 돌던 시기다. 당분간 전세로 살면서 집값이 더 떨어지면 더 나은 입지의 아파트를 매입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처분한 아파트는 이후 가격이 8억원 아래로 떨어졌다. 집값이 더 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수세도 붙지 않는 모습이었다. 집을 판 돈으로 인근 새 아파트에 전셋집을 마련한 최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판단했다.
2년이 지난 지금, 그의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최씨는 "2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집을 팔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판 아파트는 최근 12억원까지 가격이 급등했다. 2년 전세계약 만료를 앞두고 현재 사는 집의 전세 시세는 어느새 2년 전 집을 판 가격과 엇비슷해졌다. 계약갱신요구권제 덕에 5%만 오른 전셋값에 계약을 연장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하다. 계약이 만료되는 2년 후 전셋값이 얼마나 더 치솟아 있을지 몰라서다. 최씨는 "무주택 기간이 짧아 청약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인데 집값은 더 오를 것만 같다"며 "이대로 영영 붙잡지 못한 채로 '벼락거지'가 될까봐 걱정만 된다"고 한탄했다.
꿈에서나 가능해진 내집마련
절망에 시달리는 건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부동산 시장을 대표한 또 다른 단어는 '청포족(청약포기족)'이다.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 내 84㎡(전용면적) 이하 아파트 청약 일반공급이 전량 가점제로 공급되면서 당첨 커트라인은 치솟았다. 인기 단지는 4인 가족이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인 69점까지 커트라인이 높아져 사실상 45세 이하 세대주에게 청약 일반공급 당첨은 '넘사벽(넘을 수 없는 벽)'이 됐다.
최근 결혼식을 올린 김모(30)씨가 아직 법적으로는 미혼인 것도 집 때문이다. 그는 "당장 일반 아파트 구입자금을 마련할 돈은 없고, 일반공급을 통해서는 청약이 어렵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김씨 부부는 아이를 낳은 후 혼인신고를 하기로 결정했다. 혼인 기간이 짧고 아이가 많을수록 당첨 가능성 높아지는 신혼부부 특별공급 말고는 내 집 마련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청포족이 된 청년들은 '영끌'을 통한 이른바 패닉 바잉에 나섰다. 신모(33)씨는 지난해 9월 구로구 외곽의 아파트를 구매했다. 원래 남편과 자신의 직장인 강남에 가까운 동작구에 전세를 살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영영 내 집을 못 살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당장 동원 가능한 금액을 모두 끌어모아 급히 집을 샀다. 그는 "출퇴근이 더 힘들어졌어도 이대로 가다가는 서울 내에서는 전세도 못 살 것 같다는 압박이 심했다"며 "내 집이 있으니 이제는 안심이 된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지난해 서울 아파트를 가장 많이 매입한 연령층은 30대였다. 4일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11월까지 집계된 서울 아파트 매매거래 건수는 총 8만5020건이다. 30대의 거래량은 2만7984건(32.9%)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정부가 30대의 패닉 바잉을 잠재우겠다며 각종 특별공급 물량 증대와 소득요건 완화 방안을 제시한 이유다.
사회를 갈라친 정부 대책
하지만 젊은 세대에 혜택을 집중시킨 부동산 정책은 세대 간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기간 무주택자로 살아온 중·장년층의 반발이 이어진 것이다. 이들은 '정부 정책에 맞춰 오랫동안 무주택을 유지했는데 그때는 아무런 지원도 없더니 이제 와서 청년층에게만 혜택을 준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대책 없는 '땜질식' 부동산 정책이 오히려 세대 갈등만 조장한 꼴이다.
이러한 집값 상승에 따른 부동산 문제는 더 커질 가능성이 크다. 시장 참여자 대부분이 올해 집값이 더 오를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KB국민은행이 집계하는 매매가격 전망지수는 지난달 기준 124.5를 기록했다. KB국민은행이 해당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13년 4월 이후 사상 최고치다. 이 수치는 부동산 중개업소의 향후 3개월 이내 아파트값 전망을 수치화한 것으로 100 이상이면 상승할 것이라는 의견이 더 많다는 뜻이다.
한국은행의 주택가격전망지수 역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은의 '2020년 12월 소비자동향조사'에 따르면 지난달 주택가격전망 소비자동향지수(CSI)는 132로 2013년 집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지수 역시 100 이상이면 주택 가격이 더 오를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특히 40세 미만 청년층 주택가격전망지수는 137에 달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지난해는 '부동산의 나라'에 가까웠던 한 해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정부의 지속적인 규제가 부동산 가격을 올리는 결과만 낳으면서 사회적 갈등까지 심화시키는 결과만 낳았다"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지금처럼 자본 이득에 대한 차익이 벌어질수록 서민과 부유층 간 갈등이 심해지면서 중산층은 사라지는 양극화가 일어날 것"이라며 "올해에도 집값 상승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이러한 부동산의 나라 현상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 글 싣는 순서
① 욕망 또는 좌절이 된 부동산
② 일 못하는 청년, 일 못 놓는 장년
③ 아이 낳기 힘들어진 나라
④ 벼랑 끝, 퇴로 없는 자영업
⑤ 교육의 세습, 용 못되는 가붕개
이춘희 기자 spr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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