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안망] '시말서 황금USB'를 찾는 당신에게

정진용 2020. 12. 19.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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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입버릇처럼 ‘이생망’을 외치며 이번 생은 망했다고 자조하는 2030세대. 그러나 사람의 일생을 하루로 환산하면 30세는 고작 오전 8시30분. 점심도 먹기 전에 하루를 망하게 둘 수 없다. 이번 생이 망할 것 같은 순간 꺼내 볼 치트키를 쿠키뉴스 2030 기자들이 모아봤다.

▲그래픽= 윤기만 디자이너.

[쿠키뉴스] 정진용 기자 = “정진용 기자, 내일까지 시말서 제출하세요.”

올 게 왔다. 청천벽력 같은 팀장의 지시를 받고 자리로 돌아온 사회초년생 정 사원. 두근거리는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이대로 잘리는 걸까’,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걸까’, ‘엄마 아빠 미안해…’ 등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어젯밤 친구가 보내준 방송인 전현무의 ‘경위서 황금USB’ 썰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시말서 작성은 정 사원을 기다리는 산전수전 회사생활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무작정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할 이 세상 모든 정 사원들에게 다음 ‘시말서 안내서’를 읽어보길 권한다. 


‘시말서 안내서’ 제1장 사전준비 ①

◇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본 적 없는 ‘취업규칙’을 살펴보자”

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내 어딘가에 존재할 전설의 문서 ‘취업규칙’을 찾아보는 것이다. 회사 인사팀에 요청하거나, 문서 양식을 모아놓은 사내 자료 게시판을 뒤져보면 높은 확률로 취업규칙을 얻을 수 있다.

취업규칙을 찾았다면 자신의 회사에선 ‘시말서 작성이 징계에 해당하는지’, ‘나의 행위가 징계 사유에 해당하는지’, ‘상사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지시한 것인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자. 또 시말서 작성이 추후 승진이나 상여금 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규정이 있는지도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좋다.

→ 만약 절차가 정당하지 않거나 내 행위가 징계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부당한 업무지시이기 때문에 제출명령을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 또 사측은 이를 징계 사유나 징계양정 사유로 삼을 수 없다.
→ 시말서 작성이 상사의 정당한 권한에 속하는 지시라면? 이유 없이 시말서 작성을 하지 않을 경우 징계로 이어질 수 있다.


‘시말서 안내서’ 제1장 사전준비 ②

◇ “경위서와 시말서를 구분하자”

경위서와 시말서는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엄밀히 다르다. 국립국어원이 일본식 표현인 시말서(始末書)를 경위서(經緯書)로 순화하라고 했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구분해서 쓰이는 곳이 많다.

경위서는 가벼운 과실이거나 정당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 작성하게 된다. 법인 카드 분실, 한두 번의 지각 등의 사안이 여기에 해당한다.

시말서는 중대한 사고나 비위행위 등을 저지른 경우에 해당한다. 업무 중 사고·재해를 당했을 경우, 근태에 지속적 문제가 생겼을 경우, 고소나 범죄 사건에 연루된 경우, 직장 동료와 심하게 다퉜을 경우 등이 여기에 속한다. 소속된 회사 취업규칙에 따라 시말서 작성 자체가 징계조치(견책)에 해당하기도 하니 직접 확인하는 걸 추천한다.


‘시말서 안내서’ 제2장 본문 작성 ①

◇ “두 가지만 기억하자… 육하원칙, 사실관계”

이제 빈 종이를 채울 시간이다. 회사에서 양식을 준다면 그에 맞춰서 쓰면 된다. 준비된 양식이 없다 해도 걱정하지 말자.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보면 수많은 사회인 선배들이 ‘전현무의 황금USB’ 못지않게 많은 예시와 자료를 올려놓았으니 참고하는 것이 좋다.

중요한 건 시말서 양식보다 내용이다. 육하원칙에 따라 상세하게 서술하자. 시말서는 어떤 사건이나 사고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일이 벌어진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의 문서다.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작성하면 문서를 읽는 상사가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실관계 위주로 담백하게 쓰자. 개인 의견이나 주장은 변명처럼 느껴질 수 있으니 주의하자. 

만약 본인의 과실로 회사, 동료에 피해를 끼쳤다면 이 사실을 적어 인지하고 있음을 알린다. 앞으로의 개선 방향과 재발 방지를 위한 본인의 노력·다짐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사진= ‘대역죄인’ 모드의 시말서 작성은 권하지 않는다. KBS 캡처


‘시말서 안내서’ 제2장 본문 작성 ②

◇ “시말서는 반성문이 아니다”

시말서와 경위서는 반성문이 아니다. 본인이 진정으로 반성할 사안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사측에 적극 알리고 싶다면 반성문처럼 적어도 좋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누구도 당신에게 “죄송합니다”나 “잘못했습니다”라는 문구를 넣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한 번만 더 비슷한 일이 발생하면 어떤 불이익도 감수하겠다”는 문구도 마찬가지. 이를 본문에 추가하라고 강요해도 곧이곧대로 따르는 건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내가 대역죄인이오’ 식의 저자세 역시 금물. 작은 잘못을 큰 과실로 포장해서 쓴다면 순간의 위기는 면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예를 들면 나중에 회사와 갈등이 생겼을 때 인사팀이 당신의 시말서를 조용히 꺼내 들 수 있다. 이를 꼬투리 잡아 권고사직을 유도할 수 있다는 노무사의 전언에 밑줄을 치자. 

→ 상사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라고 반려했다면? 거부할 수 있다.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이는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업무상 정당한 명령으로 볼 수 없다.


‘시말서 안내서’ 제3장 위기대응

◇ “과도한 시말서 지시엔 증거를 모으자”

아무리 생각해도 시말서를 쓸 일이 아닌데도 써야하는 극한 상황을 만날 수 있다. 가령 1분 일찍 퇴근을 했다, 간식을 먹었다는 등의 이유다. 믿을 수 없겠지만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다. 고용노동부의 ‘직장내 괴롭힘’ 매뉴얼에서는 시말서 강요를 직장내 괴롭힘으로 명시하고 있다. 

시말서로 겁박하는 회사에서 다른 갑질 행위가 없을 리 없다. 가혹행위, 폭언, 시말서 작성 지시 등을 노동일지 형식으로 기록하면 추후 간접증거로 인정될 수 있다. 녹음 파일도 좋다. 피해를 입은 동료가 한 둘이 아니라면, 서로가 ‘품앗이’로 미리 증언을 뒷받침할 진술을 해두면 도움이 된다. 증거가 충분히 모아졌다면 사내 신고 혹은 관할 지방 노동청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다.

신고가 부담되면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자.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서는 직장인의 상담 및 제보를 받아 상담, 조언, 법적 도움을 주고 있다. 카카오톡 오픈채팅에 ‘직장갑질119’를 검색하거나, 인터넷 주소창에 ‘gabjil119.com’을 입력하여 제보하면 된다. 이메일(gabjil119@gmail.com)을 통한 제보나 상담도 가능하다. 신원은 공개되지 않으며 답변까지 3~4일의 시간이 걸린다.

취재 도움=최혜인 직장갑질119 노무사, 권태용 영해 노동인권 연구소 대표

jjy479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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