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여성과 디스토피아 세계관.. 소름 끼치는 상상력

이학후 2020. 12. 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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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날카로운 은유와 선명한 주제 의식으로 가득한 페미니즘 영화 <레벨 16>

[이학후 기자]

 
▲ <레벨 16> 영화 포스터
ⓒ (주)제이브로
외부와 접촉이 차단된 기숙사 학교 '베스탈리스'. 이곳에서 비비안(케이티 더글라스 분)을 비롯한 10대 소녀들은 단 한 번도 외부로 나가지 못한 채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표대로 생활하면서 복종, 청결 인내 등 지켜야 할 일곱 가지 덕목과 호기심, 분노, 문란 등 피해야 할 일곱 가지 악행을 교육받는다. 

그런데 기숙사 소녀 중 소피아(셀리나 마틴 분)는 이곳의 목적이 입양이 아닌 또 다른 음모가 있음을 눈치챈다. 소피아는 비비안에게 브릭실(사라 캐닝 분) 선생이 주는 비타민을 절대로 먹어선 안 된다고 충고한다.

영화 <레벨 16>은 좋은 곳으로 입양되기를 원하는 소녀들을 교육하는 기숙사의 이면에 엄청난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내용을 그린 스릴러, 공상과학 영화다. 각본과 연출은 캐나다 출신의 데니시카 에스텔하지 감독이 맡았다.
 
▲ <레벨 16> 영화의 한 장면
ⓒ (주)제이브로
데니시카 에스텔하지 감독은 자매와 한 남자 사이에 벌어진 1870년대 어두운 비극을 소재로 삼은 <블랙 필드>(2009)로 장편 데뷔하여 그해 '토론토 여성의 눈 필름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캐나다 영화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 H 앤 G >(2013), <레벨 13>에 이르기까지 사회와 체제, 그리고 그 안의 여성의 역할과 자리에 대해 장르를 통하여 끊임없이 탐구를 거듭했다.

<레벨 16>은 데니시카 에스텔하지 감독이 10년 전에 처음 구상했던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엔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공상과학 영화에 투자하기를 다들 꺼리는 상황이라 제작을 할 수 없었다고 감독은 설명한다. 

이후 <헝거게임> 시리즈와 <다이버전트> 시리즈 등 10대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공상과학 영화가 흥행하고 드라마 <핸드메이즈 테일: 시녀 이야기>가 성공하면서 투자 환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 결과, <레벨 16>은 빛을 보게 되었다.
 
▲ <레벨 16> 영화의 한 장면
ⓒ (주)제이브로
제목 <레벨 16>은 베스탈리스의 마지막 단계를 의미한다. 베스탈리스의 삼엄한 감시와 통제 아래 생활하는 소녀들은 레벨 16에 올라 입양이 되길 갈망한다. 이곳에선 소녀들에게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만 좋은 가정이 생기며 바깥세상은 오염으로 가득해 절대 나가선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호기심은 가장 큰 죄악이라 어떤 의문도 가져선 안 된다. 글조차 가르쳐주지 않는다.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이에겐 혹독한 처벌을 내린다. 

'베스탈리스'란 이름은 소녀들을 뽑아 베스타 신전의 여신에게 바쳐 불이 꺼지 않는 역할을 맡겼던 고대 로마의 '베스탈 버진(Vestal Virgins)'에 유래한다. 베스탈 버진은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는데 쓰인 희생양이었다. 

<레벨 16>은 희생양의 개념을 두 가지로 활용하는 영리함을 보여준다. 하나는 공상과학 영화에서 흔히 접하는 장르 소재로서의 희생양이다. 부유한 자들이 젊고 건강한 신체를 탐하는 욕망엔 마이클 베이의 <아일랜드>(2005)와 마크 로마넥의 <네버 렛 미 고>(2010)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다. 한편으론 <겟 아웃>(2017)도 떠오른다.
 
▲ <레벨 16> 영화의 한 장면
ⓒ (주)제이브로
다른 하나는 남성중심,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희생양이다. 베스탈리스는 남성이 지배하는 시스템에 순응하는 여성을 양성하는 교육 기관으로 기능한다. 소녀들에겐 과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인 '비비안' 리, '소피아' 로렌, '리타' 헤이워드 등에서 가져온 이름을 붙여졌다. 

이것은 소녀들이 지식보단 외모를 중요시하고 남성에게 무조건 순응해야 했던 '과거의 여성상'에 머물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레벨 16>은 브라이언 포브스의 <스텝포드 와이브스>(1975)와 뤼실 하지할릴러비치의 <이노센스>(2004)를 잇는 여성 영화의 계보에 속한다.

<레벨 16>은 대부분 전개가 베스텔리스 안에서 벌어진다. 공간의 중요성을 간파한 데니시카 에스텔하지 감독은 두 개의 세트만을 사용한 <큐브>(1997)에 참여한 다이아나 매그너스 미술감독과 손을 잡았다. 다이아나 매그너스는 베스탈리스를 지배하는 색상을 회색으로 정해 소녀들을 억압하는 정서와 단조로운 일상을 표현한다. 비비안이 자유를 갈망하면서 영화에 나오는 색상은 점차 늘어난다.
 
▲ <레벨 16> 영화의 한 장면
ⓒ (주)제이브로
 
<레벨 16>은 저예산인 관계로 한정된 공간과 인원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헨드메이즈 테일: 시녀 이야기>의 억압된 여성과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가져와 <겟 아웃>을 연상케 하는 소름 끼치는 풀어가는 상상력이 일품이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것들을 효과적으로 잘 엮었다. 무엇보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묘사한다.

<레벨 16>은 지금 시대를 향한 날카로운 은유와 선명한 주제 의식으로 가득한 모범적인 페미니즘 영화다. 영화는 국가와 사회의 체계적이고 차별적인 성 억압에 맞서려면 여성이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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