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1) 차 사랑 지극했던 예술가 황제 '송나라 휘종' -'말차' 기원은..백성의 고혈 짜낸 '용봉단차'

2020. 11. 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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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부터 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칼럼을 새로 시작합니다. 저자 신정현은 이화여대에서 중문학을 전공한 후 차의 세계에 빠져 중국 윈난농업대 다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했습니다. 윈난성에 있는 동안 보이차 산지를 찾아다니며 직접 차를 재배했고 현재 중국차 수입 업체 죽로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보이차의 매혹’ ‘처음 읽는 보이차 경제사’, 공저 ‘퇴근길 인문학 수업: 전환’, 번역서로는 ‘운남보이차과학’ ‘북경고궁박물관의 옛 물건’ 등이 있습니다.

중국 역대 황제 중 예술적 감수성이 가장 뛰어난 사람을 딱 한 명만 꼽으라면 단연 송나라 휘종이다. 휘종은 옛 화가의 그림을 수집하고 베껴 그리기를 즐겼다. 대표적인 그림이 당나라 때 화가 장훤이 비단 가공 과정을 그린 ‘도련도’다. 장훤이 그린 원본은 이미 사라졌지만 휘종이 베껴 그린 그림은 현재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휘종이 남의 그림을 베끼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직접 창작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서학도’다. 높은 궁궐 담장 너머 새파란 하늘 위로 떼 지어 날아오르는 학 떼를 그린 작품이다. 또한 그는 뛰어난 서예가였다. 그가 창안한 수금체는 날렵하고 날카롭고 힘이 넘친다. 글씨가 사람의 인격을 반영한다면 수금체 창안자는 대쪽 같은 성품에 청렴할 것 같지만, 휘종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후궁이 3000명이 넘었으나 늘 미복을 하고 밖으로 나갔고 그것도 부족해 기생을 후궁으로 들이기도 했다. 본래 황제의 여인은 반드시 처녀여야 했지만 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송나라 마지막 황제 ‘휘종’의 초상화.
한없이 정교한 그의 예술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휘종이 언제 정사를 돌봤을까 궁금증이 생긴다. 그는 오직 자신의 예술 세계에 빠져들었다. 당시 송나라는 세계 GDP의 22.7%를 차지하는 부자 나라였다. 도시와 시장이 발달해 모두 넉넉히 잘 먹고 잘살았다. 그러니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봉기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휘종 시대에 송나라가 망했다.

원인은 외국의 침입이었다. 송나라는 온통 이민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쪽 요나라와 금나라는 매우 적대적이었고 서쪽 서하와 티베트는 그럭저럭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이였다. 송나라는 금나라에 망했다. 금나라 군대가 쳐들어올 때 휘종은 자신이 앉아 있던 높은 의자에서 그대로 기절해 데구루루 굴러떨어졌다. 어의와 시녀들이 달려들어 얼굴에 물수건을 갖다 대고 손등을 꼬집자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했다. 그리고 멋진 수금체로 ‘황위를 동궁에게 넘긴다’고 쓴 후 궁궐을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2년 후 휘종과 그에게 급히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 아들 흠종 그리고 황실 구성원들과 수많은 고관대작이 포로로 잡혀 금나라로 이송됐다. 금나라에 도착한 휘종과 흠종은 금나라 황제가 종묘에서 조상들께 승전을 보고할 때 흰색 옷으로 갈아입고 끌려 나가 무릎을 꿇어야 했다. 금나라에서 포로로 7년을 지내다 휘종은 쓸쓸히 죽었다.

휘종은 지독한 차 애호가였다. 휘종 황제가 마셨던 차는 지금 우리가 마시는 차와는 다르다. 차 표면에 용과 봉황을 새겨서 용봉단차라고 한다. 실물이 남아 있지 않지만, 다행히 책에 그림으로 담겨 있다. (휘종도 차에 대한 열정으로 차 전문 서적을 집필했다. 차에 대한 전문 서적을 쓴 황제는 휘종이 유일했다. ‘차론’이라는 책이다.)

용봉단차를 보면 용과 봉황이 대충 새겨진 것이 아니다. 정교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시대 사람들은 ‘차에 새겨진 용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다’고 평가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차를 만들 수 있을까?

우선 새벽 일찍 이슬에 젖은 잎을 딴다. 잎을 물로 깨끗이 씻어 먼지를 제거한다. 잎을 분류한다. 수증기로 찐다. 여기까지는 별문제가 없다. 다음부터 좀 이상하다. 그것도 매우 이상하다. 찻잎을 압착기에 넣고 물을 짜낸다. 물이 빠진 찻잎을 큰 압착기로 옮기고 초록색 기름이 빠져나올 때까지 짜낸다. 작은 압착기와 큰 압착기를 옮겨가며 물과 기름을 짜는 과정을 밤새 반복한다. 이렇게 밤새 차에서 물과 기름을 짜내면 부드러운 조직은 다 으깨져서 빠져나가고 섬유질만 남는다. 이번에는 이 허연 섬유질을 절구에 넣고 간다. 밤새 물과 기름을 다 짜냈으니 잘 갈아질 리가 없다. 물을 한 컵 붓는다. 한참을 갈다 보면 물이 사라지고 없다. 갈리고 있는 섬유질 속으로 흡수된 탓이다. 물을 또 한 컵 붓는다. 또 한참 갈면 물이 섬유질 속으로 또 흡수된다. 이게 특히 고된 작업이었다. 송나라 때 기록에 ‘팔심이 센 사람을 골라서 이 일을 시켜라’라고 했다. 물을 여러 컵 부을수록 차는 곱게 갈렸다. 물 12컵을 붓는 차는 하루에 한 편 만들 분량밖에 갈지 못했다.

용과 봉황이 정교하게 새겨진 ‘용봉단차’는 그야말로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만든 차다. 왼쪽 사진은 책에 남겨진 용봉단차의 문양. 오른쪽 사진은 휘종이 직접 그린 ‘서학도’.

▶차에 대한 전문서적 쓴 유일한 중국 황제 ‘휘종’

이렇게 갈고, 갈고 또 갈면 찻잎은 먼지보다 고운 가루가 됐다. 이 가루를 용과 봉황이 정교하게 새겨진 틀에 넣고 찍어냈다. ‘남는 것이라고는 섬유질뿐인데 대체 왜 이렇게 차를 만들었단 말인가?’ 당시 사람들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이렇게 해야 차의 맛이 진하고 오래간다’고 여겼다.

이 최고급 차는 황제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중국에서 용 문양을 쓸 수 있는 것은 황제뿐이었다. 어쩌다 황제가 기분이 좋아 신하에게 한 편 하사하면 신하는 엎드려 절을 하고 시를 쓰고 찬양했다. 시중으로 흘러나온 차는 고위 관리 1년 치 녹봉에 맞먹는 값에 거래됐다.

그렇다면 송나라 때 평범한 시민들은 차를 마셔보지도 못했을까? 송나라 때는 차가 전국적으로 유행해서 가난한 사람과 부자 모두 차를 마셨다. 그 시절 생활필수품을 땔감, 쌀, 기름, 소금, 간장, 식초, 차 이렇게 7가지로 꼽을 정도였다. 7가지 생필품에 차가 들어가는데 술이 없다. 당시 사람들이 술을 안 마신 것도 아니다. 그만큼 차가 유행했다는 의미다.

이 많은 사람이 용봉단차를 마셨을 리 없다. 당시 백성은 잎차를 마셨다. 엽차라 불리는 잎차는 차나무 잎을 따서 수증기로 찌고 말린 것이다. 엽차는 가공하기도 편했고, 마시기도 편했고, 무엇보다 차즙이며 기름까지 모두 짜내지 않았기 때문에 용봉단차보다 훨씬 차의 맛이 났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백성의 고혈을 갈아 만든’ 용봉단차는 오래가지 못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명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다.

용봉단차는 사라졌지만 명맥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다. 송나라 다법이 고스란히 전해진 일본에서 ‘말차’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신정현 죽로재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85호 (2020.11.25~12.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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