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기름 짜던 개성 아낙 DNA 흐르나..'어진 맛' 아모레 신사옥[궁금한 미술]

손영옥 2020. 10. 21.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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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데이비드 치퍼필드 설계 아모레퍼시픽 본사
서울 용산 도심에 꾸임없이 당당하게 들어 앉은 아모레퍼시픽 신사옥. 윤성호 기자

리도 헤어린스, 리도 푸로틴 샴푸…. 1970∼80년대 유행한 이들 제품을 2층 아모레퍼시픽 아카이브실에서 발견하니 와락 반가움이 밀려왔다. “아침에 샴푸하세요.” 그 때 이런 TV광고 캠페인을 통해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화학공업사)은 대한민국의 아침풍경을 바꾸었던 것이다. 기업 규모는 날로 커져 화장품업계 1위가 된 이 회사는 지금 서울 도심 용산지구에 또 하나의 미(美) 심벌을 보유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세계적인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67)가 설계한 신축 사옥. 일명 ‘달 항아리 건물’로 불리는 신사옥의 속살이 궁금해 10월 중순 아모레퍼시픽 본사를 찾았다.

동백기름 짜던 개성 아낙의 부엌에서 출발

창업주 서성환 선대 회장의 어머니 윤독정 여사. 아모레퍼시픽 제공

아카이브실에서 뜻밖에 기업 탄생의 소박했던 순간을 알게 됐다. 아모레퍼시픽은 1930년대 장날에 내다팔기 위해 동백기름을 짜서 개성 아낙의 부엌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흑백사진 속 단아한 한복차림의 쪽진 머리 미솟 짓는 여성. 바로 서경배(57) 현 회장의 할머니 윤독정 여사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의 아들 서성환 선대회장은 어머니가 팔던 동백기름을 사업화하기 위해 해방과 함께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창업했다. 최초의 브랜드 화장품 메로디크림(1948), 남성용 제품 ‘ABC포마드’(1951) 등 히트상품을 잇달아 출시했다. 1958년엔 전후의 피폐함이 가시지 않은 상황인데도 서울 용산 3층짜리 번듯한 사옥을 인수해 입주했다. 1976년엔 사옥을 10층으로 증축할 정도로 사세가 커졌다. 이제 그녀의 손자 서경배 회장은 2018년 지하 7층 지상 22층 사옥을 신축해 새 시대를 열고 있다. 신사옥 연면적은 188,902㎡(5만7000평)이다. 처음 용산시대를 연 1958년의 구사옥(연면적 1,804㎡(545평)에 비해 100배가 커진 셈이다.

1951년 출시된 'ABC포마드' 신문광고.

그러나 용산의 랜드마크가 된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을 덩치로만 자랑한다면 그건 모욕이다. 꾸밈없으면서도 당당하고 기품 있는 이런 ‘단아한 입방체’ 건축물이 서울 도심에서 다시 나오기는 힘들 거 같아서다. 동행한 서울시립대 이충기 교수는 “통상 이런 규모의 대지 면적이라면 건물을 두, 세 동 짓기 마련”이라며 “하지만 치퍼필드는 대지 위에 거대한 큐브 하나만 내려놓았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건물은 폭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빌딩(옛 대우빌딩)이 주는 위압적인 느낌과 비교해보면 안다.

그걸 달항아리 효과라고 해야 할까. 건축가 치퍼필드는 조선시대 달 항아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는 “백자에는 조용히, 그러면서도 당당히 빛나는 아름다움이 있다"며 "하지만 노골적으로 한국미를 표방하는 건물이 아니라 그 본질이 드러날 수 있는 건물”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장방형의 당당한 형태, 희디 흰 색의 순정한 맛, 어떤 장식도 없는 단순미 등을 통해 달 항아리 이미지를 추상화한 것이다. ‘한국미의 재발견자’로 불렸던 혜곡 최순우는 백자 달항아리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둥근 원이 흰 바탕색과 어울려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하다.” ‘어진 맛’.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에도 달 항아리의 그 어진 맛이 느껴졌다. 아주 단순한 입방체 형태로 오히려 경쟁하듯 뽐내는 주변의 마천루 빌딩을 어머니처럼 푸근하게 품고 있기 때문이다.

대나무 같은 차양+공중정원이 부리는 마술

5층의 공중정원. 아모레퍼시픽 제공

장방형의 단순한 형태에 우아함을 입힌 것은 수직 루버(louver·건물 앞면에 설치한 길고 가는 평판으로 직사광선을 막는 기능을 함)다. 수직 루버가 부리는 마술 덕분이었다. 루버는 가까이서 보면 회색이다. 이게 햇빛을 받으면 빛의 난반사 탓에 멀리서는 흰색으로 보인다. 이런 효과를 내는회색을 찾기 위해 건축가와 시공사는 3층 규모 모형 건물을 지어 몇 달간이나 실험을 했을 정도. 건축가는 또 22층에 걸친 총 길이 100여m의 루버를 몇 등분해 엇갈리게 설치함으로써 리듬감을 살렸다. 이게 멀리서는 대나무 마디처럼 보였다. 루버 차양을 걷어내면 그냥 민둥민둥한 유리건물일 뿐인데, 루버가 부리는 마법 덕분에 신사옥은 마치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백색 달 항아리 같은 정취를 자아냈다.

공중정원을 내려다본 모습. 윤성호 기자

건물 5층에 올라가본 뒤 몇 번이나 탄성을 질렀다. 우선 꼭대기도, 지하도 아닌 금싸라기 중간층에 구내식당을 둔 게 파격이었다. 구내식당을 지나면 공중정원이 나와 또 한 번 놀랐다. 물이 흐르는 수변 정원. 잔잔한 연못과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조화를 이루는, 탁 트인 하늘이 보이는 공중정원이 건물 허리에서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을 상상해보라.

연못의 바닥은 신사옥의 자랑인 거대한 아트리움의 유리 천장과 닿아 있다. 자연채광이 건물 로비까지 투과하도록 얕은 물로 채워놓았다. 연못 너머로는 유려한 곡선 형태의 단풍나무 정원이 펼쳐지며 건물 전체의 격자형 이미지가 주는 딱딱함을 보완했다. 이 숲을 조성하기 위해 건물 1개 층을 토심으로 쓰는 건축주의 배려가 놀라웠다. 공중정원의 끝까지 걸어가 보니 유리 울타리 너머로 민족공원으로 거듭날 용산 미군기지가 앞마당처럼 펼쳐졌다. 갑자기 이 사옥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난 뒤 공중정원에서 매일 산책할 아모레퍼시픽 직원들이 질투가 날 만큼 부러워졌다.

외부 풍경을 끌어들이는 공중정원. 멀리 남산 타워가 보인다. 윤성호 기자

이 사옥엔 이런 공중정원이 무려 세 개나 된다. 5층에 이어 11층, 17층에 있는데, 각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6개 층의 공간만큼 옆구리를 뻥 뚫어(오프닝) 사방의 풍경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였다. 5층은 동남쪽으로 용산 미군기지가, 11층은 남서쪽으로 용산 도심 풍경이, 17층은 북동쪽으로 남산타워가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오프닝을 만들었다. 동양 건축에서 말하는 ‘차경(자연의 경치를 빌리는 것)’의 효과를 한껏 살린 것이다. 자신을 비움으로써 세상의 풍경을 다 끌어안았다. 서구의 건축가가 구현한 동양적 미학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궐의 회랑, 서양의 신전 같은 기둥…도심 속 명상의 공간

열주를 통해 서양의 신전이나 전통 건축의 회랑을 연상시키는 외부.

사실, 비움의 미학은 이 건물에 들어서기 전부터 느낄 수 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건물 입구로 들어가려고 하면 기둥에서 기둥으로 이어지는 긴 회랑에 놀라게 된다. 옛 궁궐의 회랑이나 고대 그리스 신전 기둥 같은 외관 때문에 장엄함과 숭고함이 감돈다. 자동차 경적 소리 시끄러운 용산의 도심 한가운데 있는데도 마치 도시 속 은둔의 공간으로 순간 이동한 기분마저 든다. 통상 1층엔 상가를 입주시켜 이익을 극대화하기 마련이지만,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이렇게 경제적 이익조차 비워냈다.

올라퍼 앨리아슨의 작품. 윤성호 기자

회랑으로 둘러싸인 신사옥에서 그중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용산우체국에 면한 측면이다. 이곳에는 덴마크 작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야외 설치 작품이 있다. 둥근 수반과 둥근 거울이 대구를 이루는 이 작품은 행인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찍는 포토 존이기도 하다. 건물 안팎에는 곳곳에 미술 작품이 설치돼 건축주의 안목과 수준 높은 취향을 증거하고 있었다. 서성환 선대회장, 서경배 현 회장 부자는 달 항아리, 고서화 같은 고미술품에서 출발해 동시대 현대미술 작품까지 대를 이어 수집해온 한국의 대표적인 컬렉터이다. 그런 컬렉션을 기반으로 지하에는 아모레퍼시픽미술관도 두었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을 설계한 데이비드 치퍼필드. 아모레퍼시픽 제공

치퍼필드는 독일 베를린의 노이에스뮤지엄(2009), 에센의 폴크방미술관(2010), 스페인 발렌시아의 아메리카 컵 빌딩(2006) 등 전 세계의 랜드마크적인 건축물의 설계를 했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단일 건물로는 그가 설계한 최대 건축물이다. 건물이 완공된 뒤 건축가 치퍼칠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설계했던 대로 작품이 완공된 건 처음이다. 행복하고 고맙다.” 미를 아는 건축주와 실력파 건축가의 환상적 궁합이 달 항아리 같은 어진 맛의 건축물을 탄생시켰음에 틀림이 없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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