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시대다] 파격적 결말.. 우아한 불륜극.. 사랑과 존재의 본질을 묻다

2020. 10. 1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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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내 남자의 여자' '밀회'
올해 시청자들의 심장을 가장 세게 움켜쥔 드라마는 ‘부부의 세계’일 것이다. 원작 드라마는 물론이고 과거 김희애의 출연작들을 ‘다시 보기’ 하는 시청자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덕분에 ‘내 남자의 여자’(SBS·2007)와 ‘밀회’(JTBC·2014)가 새삼 화제에 올랐다. 왜 이토록 오랫동안 불륜 치정극이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불륜 치정극이 사랑의 본질과 결혼 제도의 모순을 파헤치기에 적합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불륜 치정극이 이런 성취를 보여주진 않으며 가부장제를 반복 시연하는 지리멸렬한 통속극이 되기 쉽다.

그러나 불륜을 통해 사랑과 결혼이 무엇인지 탐문하는 걸출한 수작이 존재하며 이런 작품들은 당대의 욕망과 윤리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불륜 치정극인 JTBC ‘부부의 세계’의 신드롬급 인기 이후 주인공 김희애의 전작들에 관심이 쏠렸다. 특히 같은 장르인 SBS의 ‘내 남자의 여자’(위)와 JTBC의 ‘밀회’가 회자됐다. 이토록 오랫동안 불륜 치정극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사랑의 본질과 결혼 제도의 모순을 파헤치기에 적합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불륜을 통해 사랑과 결혼이 무엇인지 탐문하는 걸출한 수작들은 당대의 욕망과 윤리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각 방송사 제공

평범한 여자의 행복이라는 가짜 가치

가장 화끈한 불륜 치정극이 아닐까. 친구 남편과 불륜에 빠진다는 설정으로도 분노가 높아지는데, 첫 회 만에 불륜 사실이 발각되는 폭풍 전개로 몰입감이 극대화된다. 드라마는 둘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나 불륜이 발각되는 과정이 주는 조마조마함을 과감히 생략한다. 드라마가 집중하는 것은 불륜이 까발려진 후 세 사람의 감정과 태도와 실천이다.

드라마는 직설적인 대사와 연극적인 연출, 난투극도 마다하지 않는 ‘막장’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인간 심리에 대한 정교한 이해를 바탕에 깔고 있다. 또한 기존의 불륜 치정극과는 다른 결말을 통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상대화하는 효과를 낸다. 예컨대 도입부에서 드라마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쟁탈전처럼 보이지만, 곧 그들이 쟁탈하려는 것의 실체가 허망함을 드러낸다. 지긋지긋한 밥투정으로 대표되는 남자의 비겁함과 유약함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며 두 여자 모두 남자를 떠나는 결말은 가부장제 속의 남자가 과연 욕망의 대상일 수 있는지 자문하게 만든다. 또한 남편을 빼앗긴 지수(배종옥)는 멋진 연하남과의 연애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지지 속에 자영업자로 소박한 독립을 꾀한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줌마-렐라’식 해피엔딩과 다르며, 여자의 결핍이 반드시 남자를 통해 충족될 필요가 없음을 일깨우는 점에서 오히려 전향적이다.

마지막에 가장 비참해지는 것은 준표(김상중)이다. 그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남자였지만, 결국 두 여자는 물론이고 교수 임용도 사회적 평판도 부모의 인정과 유산도 다 잃는다. 그런데 더욱 불쌍한 이유는 그가 이 난리를 겪고도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두 여자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자기 욕망의 모순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는 두 여자의 성장극으로도 읽힌다.

드라마는 상간녀 이화영(김희애)을 단순한 악녀로 그리지 않고, 그의 욕망을 세세히 그릴 뿐 아니라 그 욕망이 어떻게 자기모순에 의해 괴멸되어 가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화영은 스스로 “수치심이 없는 여자”라고 말할 만큼 뻔뻔하게 자기 욕망을 추구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기껏 ‘평범한 여자의 행복’이었다. 그는 미모의 성형외과 의사였지만, 부모나 전남편에게 안정된 사랑을 얻지 못했다. 화영은 그 결핍을 준표와의 알콩달콩한 재혼 생활로 메우고자 한다. 그는 요리학원에 다니고, 임신을 위해 남몰래 애썼지만, 모든 노력은 무망한 것이었다. 준표가 이혼서류 제출을 미루고 정관수술을 했다는 사실은 안 화영은 폭발한다.

화영의 실패는 단지 준표가 우유부단하고 이기적이었기에 초래된 결과가 아니다. 애초에 ‘평범한 여자로서의 행복’ 자체가 대단히 취약하고 모순적인 욕망이다. 이는 지수의 사례를 통해 증명된다. 지수는 남편의 일상을 챙겨주며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았지만, 이는 남편의 변심만으로 언제든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세계였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성취할 수도 없고, 자신이 점점 사라져야만 도달할 수 있는 허상의 행복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지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차츰 자존심을 회복한다. 그에겐 든든한 우군이 있기 때문이다. 대신 싸우고 욕해주는 언니, 엄마의 편인 아들, 제 아들보다 며느리를 지지하는 시부모, 그리고 불륜을 지탄하고 ‘남편 빼앗긴 자의 무고함’에 공감하는 공동체의 규범이 그를 지켜주었다. 남자의 바람에 관대하고 피해 여성을 비난했던 과거의 뒤틀린 가부장제 사회나, ‘부부의 세계’에서 보았던 남의 일에 무관심하거나 불륜도 쿨하게 받아들이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는 피해자의 회복이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셀프 구원 ‘밀회’

세상에나! 마흔 살의 상류사회 유부녀랑 가난한 스무 살 청년이 불륜을 저지른다고? 그것도 사제지간으로 만나서? 몹시 거슬리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드라마는 둘의 사랑을 설득해낸다. 결말에 이르면 둘의 사랑을 간절히 응원하게 되는데, 이는 드라마가 사랑을 그저 감정의 이끌림으로 그리지 않는 까닭이다. 드라마는 고급예술에 가려진 상류사회의 추악한 이면을 고발해내는 동시에, 오혜원(김희애)이라는 여자가 선재(유아인)라는 청년을 만나 거짓된 삶의 욕망을 버리고 빛나는 진심을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사랑이란 그저 타자를 향한 들뜬 열정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혁명적인 과정임을 드라마가 깨닫게 한다.

오혜원은 재벌가 소유의 아트센터 실장이다. 자신의 힘으로 상류사회 일원이 될 만큼 영민한 야심가에 고상함이 넘치지만, 그의 일상은 녹록지 않다.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며, 집에서도 근무하는 것 같다. 때로는 재벌가의 폭력과 갑질도 견뎌야 한다. 오혜원의 미국 유학, 억대 연봉, 좋은 집과 차, 남편의 교수 자리가 모두 친구인 영우 집안에서 받은 것이다. 오혜원은 재벌 딸인 영우와 영우 계모 그리고 영우 아버지를 위해 일한다. 이들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삼중 첩자 노릇을 하고, 이들이 벌이는 돈과 섹스에 얽힌 추악한 뒤처리를 해준다.

그러던 오혜원이 선재의 연주를 처음 듣고 눈물을 흘린다. 피아니스트를 꿈꾸었던 오혜원이 오랫동안 동경해왔으나 이제는 잊고 살아가는 ‘예술’의 아름다움에 저도 모르게 도취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우아한 노비’로 살아가고 있다는 지독한 ‘현타’(현실 자각 타임)를 맞는다.

선재는 천재적인 재능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지녔지만, 가난한 탓에 고급예술의 세계와 백만 광년의 거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돕는 오혜원에게 정서적 교감을 느끼다 ‘감히’ 사랑해버린다. 그는 자기감정에 솔직하며, 뒤틀림이나 비굴함이 없다. 그는 상류사회를 ‘선망하면서 증오하는’ 모순된 감정에 빠져있지 않은데, 이는 자존감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오혜원은 선재의 다가옴에 화를 내면서도 진심을 내비친다. 선재는 그런 오혜원의 욕망을 간파하고 더욱 용기를 낸다. 그리고 오혜원의 열정과 매력과 결핍을 알아보고, 진심으로 힘이 되어주려 애쓴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는 선재의 말은 오혜원에게 존재를 건 결단을 내리게 한다.

선재의 순수하고 용감하며 의젓한 태도는 오혜원의 남편과 대비돼 더욱 두드러진다. 오혜원의 남편(박혁권)은 음대 교수지만 실력도 열정도 정치력도 없으며 인격마저 용렬하다. 질투와 허세와 속물근성만 가득한 그의 인격을 드라마는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는 오혜원과 선재의 사랑을 눈치채고도 오혜원을 통해 누리는 부귀를 내놓지 않기 위해 참는다. 특히 현장을 잡겠다며 동분서주하던 그가 “오혜원, 제발 한남동(영우네 집)에 가!”라고 외치는 장면은 비굴함의 끝을 보여준다.

드라마는 남편을 비롯해 두 사람의 사랑을 흥정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주변의 치사함을 대비시켜 오혜원과 선재의 사랑이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고결한 가치임을 납득시킨다. 우리 중 아무도 그 관계를 비난할 수 없다는 냉철한 영우 남편의 말이나 남편의 간통죄 고발이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처리되는 장면도 이들을 도덕적으로 단죄할 수 없다는 믿음을 더욱 굳히게 만든다.

오혜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비리를 지렛대 삼아 음악의 세계와 성공의 자리를 모두 얻는 최후의 승자가 될까 잠깐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을 버림으로써 구원하는 올곧은 결단에 이른다. 마지막 회의 법정 장면은 그 어떤 대문호의 작품보다 감동을 안긴다. “모두가 나를 성공의 도구로만 대했다. 심지어 나조차도”라는 오혜원의 최후진술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넘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사랑을 통해 ‘셀프 구원’에 이르는 상간녀라니, 이토록 우아한 불륜극이 어디 있으랴.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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