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피난수도에서 85세로 서거

김삼웅 2020. 8. 3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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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회] "너희들은 내 뜻을 받들어 언제나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위하는 사람이 되어라"

[김삼웅 기자]

 
 이시영(1868-1953)
ⓒ 독립기념관
 
이시영은 정계에서 물러났지만 나랏일에 대한 걱정은 한 시도 내려놓지 않았다.

내려놓을 수 없는, 그의 숙명이었다. 어떻게 되찾은 나라이고 새로세운 정부인가. 자신을 포함하여 국정을 책임진 정부 요인들이 전쟁을 막지 못하고, 참혹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란 중에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강행하고 1952년 8월 정ㆍ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 이시영은 이를 막고자 했으나 전시체계인데다 야당의 힘이 부족했다. 휴전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반대하고 있었다. 전혀 현실성이 없는 북진통일론을 펴고 이를 정략에 이용했다.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냈고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는데도 그는 휴전협상을 반대하였다.
  
▲ 성재 이시영 선생님 묘소. 이곳은 왠지 효창공원의 애국열사 묘역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성재 이시영 선생님 묘소. 이곳은 왠지 효창공원의 애국열사 묘역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 이양훈
 
1953년 4월 13일 피난수도 부산 동래의 우거에서 성재 이시영선생은 8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파란곡절 파란만장의 생애였다.

성재 이시영은 운명이 경각에 다달았음을 알고 분명한 소리로 유언하였다.

"내가 죽어도 장례식은 아주 간단하게 치르거라. 내가 나랏일을 다하지 못하고 가야 하니 원통하구나. 너희들은 내 뜻을 받들어 언제나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위하는 사람이 되어라." (주석 3)

성재의 부음은 6ㆍ25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고 이승만 정권의 폭정이 계속되는 시기여서 국민에게는 더욱 큰 충격과 슬픔으로 전해졌다. 국내외에서 유명 무명의 많은 인사들이 조전과 조사를 보냈다. 4월 25일 발인식에 이어 국민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어 서울 정릉동 남쪽에 임시로 예장하였다. (1964년에 수유동 현 위치로 이장)
  
▲ 1945년 11월 5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환송하는 모임 사진. 화환을 걸친 김구 주석 왼편으로 조완구, 김규식 선생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며느님 안미생, 이규열(이시영 선생 차남), 이시영 선생이 보인다. 김구 선생 앞에 태극기를 든 소년이 어린 시절의 이종찬 전 의원이다. 1945년 11월 5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환송하는 모임 사진. 화환을 걸친 김구 주석 왼편으로 조완구, 김규식 선생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며느님 안미생, 이규열(이시영 선생 차남), 이시영 선생이 보인다. 김구 선생 앞에 태극기를 든 소년이 어린 시절의 이종찬 전 의원이다.
ⓒ 우당기념관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이 조사를 전해왔다. (원문은 한문)

 하루밤 사이 큰별이 강으로 떨어지니
 하늘이 슬퍼 흔들리고
 골짜기의 물 마져 슬퍼 스스로 우니
 원통한 마음에 첩첩이 쌓여있는
 큰 산이 나를 누른다 하여도
 가벼이 느껴지누나.

국내에서는 신익희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함태영 부통령, 이범석 국무총리, 독립운동가 김창숙, 신흥학우단, 대종교본사, 대한노총연맹, 심지어 훼절자 최남선 등 각계 각층에서 수많은 추모사ㆍ조사ㆍ만장이 답지했다. 임의로 몇 사람의 내용을 골라서 요약한다.
                              
국회의장 해공 신익희 조사

막막한 만주의 광야풍설(曠野風雪)이 온 누리를 얼어 붙게하는 시베리아 벌판에서는 망국의 한을 품고 가족과 함께 유리(流離)할 때에 누가 있어 선생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선생의  고단(孤單)한 길을 도왔으리까. 그러나 선생은 불굴의 용기를 고무하여 간도(間島)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청년 장교를 양성하여 조국 광복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후일 일도구(一道溝)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왜적과 대결하던 청년 사병의 대부분이 이 학교에서 어린 다리에 힘을 올리고 부등깃이 난 것입니다. 이 나라 민족의 성장과 함께 35년 전에 전세계를 진감(震撼)하던 3ㆍ1운동은 실로 해내 해외에서 선생과 같은 지사들이 씨를 뿌리고 싹을 가꾼 결과이었습니다.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를 맡았을 때 나도 그 기관의 말석에 있으면서 선생의 높은 지도와 자성스런 실천에 계발된 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국무총리 철기 이범석 조사

선생님이 상해 시대에 주신 말씀 "기(旣) 연(年)이 신(新)하고 일(日)이 신하니 성(誠)과 역(力)이 체신하여 아(我)의 직(職)을 신케하며, 아의 사(事)를 신케 하여 진진불기(進進不已)로 정신과 행위에 노력점(努力點)을 작(作)하여 구(舊)의 불급(不及)을 보(補)하며 신(新)의 광휘를 조장하는도다. 심(心)이 일(一)하며 덕(德)이 일하였나니 군휘(群彙)와 군력(群力)이 하강(何剛)을 절(折)치 못하며 하예(何銳)를 좌(挫)치 못하리오" 하신 유지는, 지금 3천만 동포가 가슴 속에 뿌리 깊이 감명되어 영원히 민족의 신념으로서 국가 독립과 민족자유를 수호하는 의력(毅力)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을 건국 초대 부통령으로 전민족이 받들어 모신 것은, 선생님의 전생애를 조국 광복과 민족 해방에 공헌하신 고절을 흠모하던 국민의 공동한 정성이었음은 말씀할 것도 없습니다만, 선생님은 하야하신 뒤도 제세구민을 몽매간에 잊지 않으셨사오니, 성고(聖高)하신 절의와 적성(赤誠)은 길이 이 나라에 광명을 비추실 줄로 믿사오나 인자하신 존안옥음(尊顔玉音) 다시 모실 길 없사오니 복바치는 슬픔 자제할 길 없습니다.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조사

단기 4281년 8월 15일. 우리 국권을 회복하고 빛나는 독립의 성업을 이룩하였을 때 우리는 선생을 초대 부통령으로 받들어 뫼셨습니다. 선생은 춘추 높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밤낮으로 국무에 영일이 없었으며 높으신 지위에 걔셨지마는 마음은 일상 민중에 두셔서 대통령 보좌의 중임을 다하시니, 우리 국민은 항상 선생을 믿고 살아왔더이다.

선생이 부통령의 자리를 물러나실 때는 우리 국민은 더욱더 선생의 뜻을 받들어 가슴에 새기었고, 이 나라 국운이 위태할 때마다 우리 국민은 일층 선생의 덕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청렴 결백하시어 평소 청빈한 생활을 하시고 피난 이래 동래우사(東萊禹舍)에서 기거하시며 때로는 시량(柴糧)조차 곤란하였다 하니, 이 무슨 국가 원로에 대한 보답이오며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 애국 지사에 대한 민족의 도리가 되오리까. 선생의 뜻은 바라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선생을 편히 모셔 드리지 못하였음이 이제 더욱 부끄럽고 죄스러우며, 국민적인 자계자경지심(自誡自警之心)이 더욱 간절하오이다.

아아, 슬프다!
선생 이미 가셔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생전에 받들지 못한 마음 백배 뉘우침이 있는 것보다 통일된 국가에서 민족의 발전을 기대할 날도 아직 먼데, 우리는 선생을 여의고 누구를 믿고 의지하여 이 민족의 성업을 수행하여 나갈까 더욱 걱정이 크오이다. 실로 민족의 전도는 암담하오이다.
 
 1950. 10. 24. 이시영 부통령이 ‘유엔의 날’ 기념식에서 만세 삼창을 선창하고 있다(왼쪽 프란체스카 이승만 대통령 부인).
ⓒ NARA
 
신흥대학 학우단원 일동 추모사

3천만 민족을 그렇게도 아끼시고 사랑하시며 조국 통일을 염원하시더니 끝내 통일을 못 보시고 자자각각(字字刻刻) 바로 새기신 듯한 고귀하신 혈흔만 남기시고 피난하신 우거에서 저희 무리를 남기시고 영원히, 영원히 가셨단 말씀입니까. 그러나 선생은 천탑(天榻)이 길이 높으시사 하늘의 부르심에 응하시어 진세(塵世)를 떠나가셨으나 우리 학우단은 선생의 정신을 생생하게 계승하여 재세시(在世時) 선생의 맥박과 같이 성재 학원의 진흥을 꾀하옵고, 또 후세에 전하오며 이나라 민족의 당당한 독립 민족으로서 선생의 위대하신 사적(事蹟)을 받을 것을 맹세하오며, 길이길이 안면하옵소서.

육당 최남선 추모사

일체를 다 버리고 대의(大義) 하나 취하실새 요연로도수검산(遼燕瀘刀水劒山) 눈에 두지 않으시니, 그 정신 고국에 옮겨 점점 빛나시도다.

보려고 이루려고 애써 오신 나라 이룩, 실끝도 안 잡히고 앞이 가장 캄캄한 때 누구를 믿으시겠다 눈을 감으시니까.

그래도 이 어른이 계시거니 하였더라. 별안간 삼천리가 휘어진 것 같을시고, 이 뒤야 청풍고표(淸風高標)를 어디 다시 보리요.

정부는 1949년 8월 15일 성재 선생에게 건국대훈장을 수여하고, 1984년 12월에는〈성재 이시영선생 기념사업회〉(초대회장 윤택중)가 설립되었다. 기념사업회는 1986년 서울 남산 백범 김구선생 동상 곁에 성재 이시영선생 동상을 세움으로써, 해방 뒤 한때 갈라섰던 두 분이 저승에서라도 다시 함께 하길 기원하였다.

'빛나되 번쩍거리지 않는(光而不耀)' 성재 이시영 선생의 생애는 우리 근현대사의 정맥(正脈)이고, 정통(正統)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표(師表)이며, 선비형 지사의 표상(表象)이 아닐까.

주석
3> 이경남, 『선구자』, 70쪽, 지문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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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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