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 박사의 '당신이 모르는 三國志'] 삼국지에서 가장 저평가된 '손견' 관우가 죽인 화웅(동탁의 맹장), 사실은 손견이 죽였다

2020. 8. 1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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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은 신흥 종교가 반란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건이었으며 향후 중국 왕조 시대에 무수히 발생할 민중반란의 시작이었다. 반란을 진압하거나 혁명을 시도하는 입장에서 황건적의 난은 소중한 교훈이었다.

가장 먼저 사건의 의미를 깨달았을 것 같은 곳은 바로 한나라 조정이다. 관료 입장에서 보면 황건적의 난은 규모나 성격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음에도 쉽게 진압한 편이었다. 관료들은 태풍이 될 뻔한 사건을 쉽게 마무리했다고 더 안심하고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비난이 들끓었지만, 그들이 대비했던 부분이 없지도 않았다. 황보숭과 주준 같은 유능한 지휘관을 발탁해 신속하게 황건적의 중심부를 공략했다. 이런 날을 대비해 양성해놓은 인재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주준 휘하에서 맹활약한 오나라 손견이다.

▶오나라를 세운 손견

▷실력만으로 나라 기틀 다져

소설 삼국지를 보면 오나라 장수들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다. 촉의 장수들은 없던 얘기까지 만들어 영웅이 됐지만, 오나라 장수들은 있던 영웅담이 삭제되기도 했다. 능력이 저평가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오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손견 또한 비슷했다. 실제 손견은 삼국지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 중 한 명이었지만 단명으로 인해 저평가받는 인물로 꼽힌다.

손견은 오나라를 설립한 손책과 손권의 아버지다. 손견의 고향은 현재의 장쑤성(강소성) 쑤저우(소주). 수당 시대 이후 쑤저우와 항저우는 강남의 중심이자 부의 중심지가 되지만, 당시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손견은 춘추시대 병법가인 손무의 후손이라고 알려졌다.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는 제나라 사람이지만 어쩐 일인지 제나라에서는 등용되지 못하고, 한족들로부터는 변방 민족으로 취급받던 신흥 강국 오나라로 가서 오왕 구천 밑에서 출세했다. 이 오나라 수도가 쑤저우였다. 한나라는 과거 영광을 존중해 쑤저우를 오군이라고 명명했다. 오군이 고향이고 성이 손씨이니 손무의 후손이라고 불렸거나 그렇게 포장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는 손견이 가난하고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고 했다. 가난과 미천이라는 표현은 주관적, 상대적이다. 천민에 가까운 빈민 집안일 수도 있지만, 명문 귀족의 눈높이로 보면 지방에서 장원을 가진 호족도 가난하고 미천할 수 있다. 정확한 기준은 알 수 없지만 진수가 삼국지를 쓸 때 평민의 눈높이로 세상을 보지는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정사 삼국지의 독자는 황제, 관료, 지방의 호족과 고급 지식인층이었다(아직 과거제도가 생기기 전이어서 현대인의 생각처럼 폭넓은 독서층이 형성되지 않았다).

손견이 어린 나이에 오군 관리로 임용된 것을 보면 평민 수준은 아니고 지역의 중하급 토호 수준 정도로 보인다. 세상의 중심에서 안주하는 권세가들과 달리 손견은 일찍부터 폭풍 속에 뛰어들 준비가 됐었다. 17살 때 그는 부친과 길을 가다 해적 무리가 주민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부친이 모른 척하라고 말렸지만 손견은 홀로 언덕 위로 뛰어올라가 칼을 뽑아들고 지휘하는 흉내를 냈다. 1소대는 좌로, 2소대는 우로 하는 식이었을 거다. 그 광경을 본 해적들은 놀라서 바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장면을 보면 손견이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성격에 용감하며,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손견이 지휘관 흉내를 내자 해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했다. 이것이 도적 떼와 군대, 조직된 집단과 리더십도 조직력도 없는 집단의 차이다. 이들의 반응을 예상했던 손견은 즉시 두령을 추격해 목을 베고 돌아왔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손견은 오군의 장교로 등용됐다.

▶혼란의 시기 승승장구했지만

▷37세 나이에 화살에 맞아 숨져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기 전부터 한나라 치안은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도적 혹은 봉기가 발생했다.

172년 허창이라는 인물이 오군 주변에서 발호(권세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림)했다. 손견은 의용병을 모아 허창을 소탕한다. 이 공으로 그는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됐다. 손견은 공을 세울 때마다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는다. 이 사실은 그의 집안이 지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이 있었다는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강남 지역은 중앙정부로부터 멀고 자연 환경이 이질적이다. 화북 지역보다는 토호 재량권이 높고, 정부도 우대를 했다. 아마도 이런 환경이 손견의 출세에 보탬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손견의 개인적 역량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그는 오군의 다른 토호, 어쩌면 그의 집안보다 명성도 높고 전통도 오래된 집안이 많았음에도 오로지 실력으로 이들을 이겨내고 승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모집했던 의용병을 즉시 사병화했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터졌을 때 손견은 하비에서 승으로 근무 중이었다. 주준이 그를 등용하자 손견은 즉시 예전의 부하를 포함한 1000명을 모집해서 주준 휘하로 갔다.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운 그는 중앙 무장으로 등용돼 장온의 휘하로 배치됐다. 장온이 장안에 주둔할 때, 동탁도 장온 휘하에 있었다. 서북 변경의 군벌인 동탁은 장온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손견은 장온에게 동탁을 죽이자고 건의했지만 장온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손견을 귀환시켜버린다. 삼국지 팬들은 이 장면을 아쉬워하니 당시 사람들은 더 아쉬워하지 않았을까.

덕분에 손견의 명성이 자자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장온이 동탁을 죽였으면 유목군대를 흡수해 전국 최강이었던 서북군단이 무슨 일을 벌였을지 모른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해도 장온이 죽은 동탁의 군대를 장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동탁은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집권한다. 당시 손견은 장사태수였다. 동탁에 항거해 여러 제후들이 봉기했을 때 손견은 연합군 선봉대로 맹활약을 한다. 동탁의 맹장인 화웅을 죽인 장수도 소설에서 알려진 것처럼 관우가 아닌 손견이었다. 낙양 근교에서 동탁과 여포를 격파하고 낙양에 진입한 장수 역시 손견이다. 이때 손견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의 후견인이자 사령관 역할을 한 사람이 남양 태수 원술이었다. 남양은 강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요지인데, 야심만 컸던 원술은 손견이 강동 지방 제패에 유용한 인재라고 생각했다.

손견은 오군의 명문가인 오씨 가문의 딸과 연애결혼을 했다. 오씨 가문 사람들은 손견이 경솔하고 교활해서 싫어했다고 한다. 과하게 단호하기는 했지만 손견에게 교활이나 경솔이란 단어는 의외다. 그러나 명문, 전통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뉴얼을 무시하고,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태도가 경솔하고 교활해 보일 수 있다.

손견은 이런 편견을 뚫고 오나라 최고의 실력자로 중앙의 권력에 도전할 역량을 갖춘 인물로 성장했다. 그러나 천하를 다투기에는 군인정신이 너무 강했던 것 같다. 늘 일선에서 싸우고 독려하던 그는 191년 형주의 유표를 포위하고 일선 진지를 시찰하던 중 저격병의 화살에 쓰러진다. 그의 나이 겨우 37세였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72호 (2020.08.19~08.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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