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 채홍사가 된 경호실과 중정 간부들
[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 박정희 박근혜 부녀 |
ⓒ 대한민국 정부 |
독재자의 말로는 비참하다.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독재자는 속출한다. 외줄을 타는 곡예사가 떨어져 죽거나 크게 다쳐도 계속 이어지는 것은, 자신은 괜찮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독재자의 심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길을 답습했다. 불과 10년도 안 돼 3선개헌을 강행하고 1인독재의 길을 따라 하였다. 4ㆍ19혁명으로 쫓겨난 것을 톡톡히 보았고 비참한 권력의 말로도 알고 있었다.
그는 어느 측면 이승만보다 더욱 포악했다. 그리고 사생활이 문란하고 일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차마 하기 어려운, 딸과 같은 젊은 여성들을 불러 한 달에 열 번씩이나 섹스파티를 열었다. 도덕 감정 따위는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 박정희(중앙)와 김재규(오른쪽), 그리고 차지철(왼족) |
ⓒ 박도 |
대통령 비서실에 근무했던 P씨의 증언.
사실 그런 점이 있지요. 근엄한 인품으로 정평이 나 있던 중앙정보부장 A씨의 경우 채홍(採紅) 같은 걸 무척 꺼렸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외로운 각하를 위해 적당한 술집이라도 하나 개발해두는게 괜찮다"고 자꾸 권유했어요. 그래서 정보부 주선으로 쓸만한 마담 한 명을 교섭해 당시만 해도 한갓지던 강남 지역에 요정을 차리게 했지요. 호스티스들도 물색해 놓고요. 적당한 기회를 보아 A씨가 대통령을 그곳으로 모셨지요.
그런데 일이 꼬이느라 그랬는지 하필 고르고 골라 각하 옆 자리에 앉힌 아가씨가 그날따라 아양이 지나쳐서 오두방정을 떨고 말았어요. 각하는 예의에 어긋나는 그런 타입의 여자를 싫어하셨거든요. 술좌석이 무르익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셨습니다. 대통령각하가 다시 그 술집을 찾지 않은 건 물론이고, 마담은 울상을 짓고… 그래서 정보부 국장급들이 그 술집을 단골로 삼았지요. 하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당시 정보부의 간부들이 술값을 제대로 주었겠습니까. 결국 1년도 안 돼 요정은 문을 닫았어요. (주석 1)
박정희의 엽색행각은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에 사는 한 여인을 가끔 찾는 데서부터 본격화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의 서울 압구정동 H아파트 출입 염문이 귀에서 귀로 번진 것은 70년대 후반이었다.
"H아파트에 사는 배우 J양을 만나기 위해 깊은 밤 대통령이 나타난다", "그분의 여염집 나들이 때는 잠시 X동의 전깃불이 나간다", "K여고를 나온 재벌집 며느리가 목격담을 퍼뜨리다 혼쭐이 났다" 는 소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이 귀를 의심할 만한 소문들이 대체로 사실로 확인된 것은 1981년께 서울민사지법에서였다.
현직 법관 H씨의 얘기.
81년경 기이한 민사소송이 들어왔다. 그 아파트 6동엔가 사는 한 주부가 경찰관을 상대로 갈취당한 돈에 대한 반환청구소송을 낸 것이었다. 그 주부는 승강기에서 대통령을 목격했고 즉각 경호원들로부터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런데 참지 못하고 동네 주부들에게 귀엣말을 해 이 사실이 한 경찰관 귀에 들어갔다.
문제의 경관은 발설한 아주머니를 유언비어사범으로 입건하지 않고 눈감아준다는 조건으로 돈을 갈취했다. 상당기간 뜯어 낸 액수가 1000만 원도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통령이 죽고 세상이 바뀌자 주부는 분한 생각에…. (주석 2)
박정희의 압구정동 엽색행각이 종종 주민들에게 노출되는 등 물의를 일으키자 나중에는 청와대 인근의 궁정동 안가에 판을 벌였다. 최후를 맞은 곳도 궁정동 안가였다.
궁정동 세검정의 안가에 박 대통령을 '모셔' 초저녁엔 말동무를 하다가 밤 9시께 슬그머니 대통령과 미녀만 남겨두고 밀실을 빠져나오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배우, 탤런트가 대부분이어서 박(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은 79년 겨울 "저기 걸린 달력에 나온 미녀 모두가 안가를 다녀갔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70년대 말 그 숨막히는 유신 공포 분위기 속에서 하마터면 밀실비사들이 터질 뻔한 적도 있었던 모양이다. 박은 "A양의 경우 부모들이 안가 출입을 알고 들고 일어나서 부장이 몇백만원 주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 김재규 전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암살 현장검증 장면 |
ⓒ 나무위키 |
박정희 정권 말기 청와대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에는 박정희의 '밤일'을 맡은 채홍사(採紅使)가 있었다. 조선조 연산군 즉위 후 그의 방탕무도한 생활을 즐기기 위해 미녀를 뽑는 관리가 채홍사였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임무는 언제부터인가 대통령의 술자리 행사에 여자를 조달하고 요정을 관리하는 것으로 변질돼 있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대통령의 채홍사.
▲ 김재규와 박선호 철모를 쓴 군인 사이에 앉아 있는 사람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이고, 포승줄에 묶인 채 김재규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의전과장 박선호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주요 임무는 한 달에 10회 정도 열리는 대통령의 연회 자리에 여성을 ‘조달’하는 ‘채홍사’ 역할이었다. 김재규와 박선호는 대구 대륜중학교 사제지간이기도 하다. 대륜중고등학교는 일제강점기 도서관을 통해 국권을 되찾으려 했던 ‘우현서루’의 명맥을 이은 곳이다. 김재규와 박선호 두 사제는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
ⓒ 국가기록원 |
박정희는 일주일에 몇 차례씩 소연회나 대연회를 열었고 그때마다 선발된 여인들은 청와대 경호실장이 최종 검증을 맡았다고 한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 서약과 함께 그날의 접대법을 사전에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우선 이 자리에 왔던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 술자리에 들어가면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 인사들의 대화 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엔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김재규가 대륜중학교 교사로 잠깐 재직할 때 제자였던 예비역 해병대 대령인 박선호는 "자식 키우는 아버지로서 할 일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번이나 사표를 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는 김재규의 만류로 그 수치스럽다고 생각한 채홍사 일을 계속하다가 김재규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주석 5)
주석
1> 노재현, 『청와대 비서실(2)』, 182쪽, 중앙일보사, 1993.
2>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1)』, 231쪽, 동아일보사, 1992.
3> 앞의 책, 232~233쪽.
4> 김재홍, 『박정희의 유산』, 18쪽, 푸른 숲, 1998.
5> 앞의 책,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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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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