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위기는 기본으로 돌아가게 한다 : 준비성(preparation)

2020. 5. 7.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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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문 목사
전 이랜드 사목
캐나다 트리니티 웨스턴대학교(Trinity Western Univerty) 박사(D.min.) 과정

마음의 성전을 다시 정비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 하나님의 끝장난 시간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앙적인 깨달음,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2절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신 일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일까지 일을 기록하였노라.”

며칠 전 넥플릭스(Netflix)에서 폭스 사가 제작한 코로나바이러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두 가지가 특별히 기억이 납니다.

첫번째는 빌 게이츠의 인터뷰입니다. 그는 반문하길, ‘왜 세계는 군사 무기를 만들고 제작 하는 데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면서 인간에게 전쟁만큼 치명적인 작은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준비하지 못했는가?’입니다.

두번째는, 그러면서 아쉬움을 주는 것은 만약에 이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최초로 고백한 중국의 의사 이월량이 자신의 SNS 커뮤니티에 올린 글을 보고 그를 체포하지 않고, 중국 정부가 심각하게 받아드려 1주일 내 봉쇄 조치했어도 이 팬데믹을 95%는 막을 수 있었고, 지역 감염으로 머물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논문을 인용하면서, “세계는 준비돼 있지 않았다” 짤막한 인용으로 결과를 맺고 있습니다.

서서히 한국사회는 정상화 궤도에 가는 듯합니다. 예전처럼 사회의 분위기는 자유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웃지 못할 마스크 배급을 통해서 위기 상황에서 질서와 줄서기 실험도 했습니다. 국민들의 협조와 인내의 성공이라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성은 자유롭고 평화로울 때는 무질서 한 것처럼 보이지만, 위기에 처 해 있을 때엔 뼈 속 깊이 박혀 있는 생존을 위한 정서와 의식의 잠재돼 있습니다.

그 유연한 사고는 정보기술(IT) 강국다운 기질이 타고난 듯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가 마스크 타기 위해서 줄을 섰다고 합니까? 비아냥거려야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삽화=국민일보 그림창고


반면에 일상에서의 한국 사회에 결정적인 어두운 단면도 있습니다.

최근에 방영된 한국에서 방영된 스카이 캐슬은 특정 계층만이 있는 범접할 수 없는 이야기인가? 아닙니다. 경쟁이라는 미명 하에, 작게든 크게든 그렇게 해야 생존과 주류 사회에 합류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변별력도 가난한 자들과 부모의 인맥으로 가능하게 끔 만들어 놓은 대학입시 시스템입니다. 너무 복잡해 대학입시 학원의 컨설팅만 수천만원 든다고 합니다. 정보의 값입니다. 대리 인맥 값일 수도 있겠죠.

이렇게 길러낸 교육의 결과물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진실을 찾는 사고의 혈맥이 다 막혀 있는 상태입니다.

그 결과로 인한 한국 사회에 아노미(혼돈)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회를 인식하고 볼 수 있는 안목과 통찰력이 사라졌습니다. 경쟁에 희생되는 젊은이들의 미래는 어떨까?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젊은이들이 자기 주관이 또렷하다고 합니다.

물론 요즘 젊은이들은 기세에 눌리지 않는 자신감이 넘치는 것은 좋지만, 주관성보다 중요한 것은 우선 객관성을 기르는 힘입니다.

개성이라는 미명하에 개그가 판을 치거나, 사리를 구분 못하는 막무가내가 판을 치면 안됩니다. 이웃을 생각하고, 사회와 국가를 생각 할 수 있는 의식 수준을 만드는 것입니다.

논어에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치에 어둡고, 생각(사-思)만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위태할 태-殆)하다”고 했습니다. (자왈학이불사 즉망하고 사이불학즉태니라-子曰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읽고, 배우고, 생각하는 것을 동시에 훈련해야 합니다.

일반 시민들은 미디어와 언론의 다양한 소리에 거짓과 진실을 타진하는 것 조차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 걸려 있습니다.

그 심리적인 결과물은 혐오, 그리고 쾌와 불쾌의 개념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시편 1편 4절에 “오직 악인은…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근본이 없고,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동물은 먹이 감만 찾아 다닙니다. 인간은 사고하기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사고의 틀이 왜곡돼 비교(comparison)라는 악성으로 판단력 마비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점점 심해져 비교 의식이 되고, 그 다음은 박탈감과 시기심이 발동합니다. 탈취하고자 하는 악의적인 경쟁이 발동합니다.

C.S 루이스는 말하길, 현대인들에게 사탄의 최대 무기는 비교 의식이라고 했습니다.

포스트 패데믹(post pandemic), 이후에 크리스천으로서 새겨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사건의 주관 자는 누구신가? 단순히 인간이 저지른 실수 라고 만 치부 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세상의 엄청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준비해야만 하는가?

크리스천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를 깨닫고 이해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섭리의 깨달음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볼 수 있는 관점(Perspective)입니다. 영적인 통찰력(insight)입니다. 지금 순간의 사건들 안에서, 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을 통해 주신 깨달음은 무엇인가?

먼저 예수님이 다시 오실 실 때가 됐다는 경고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신앙은 항상 종말론적인(eschatological) 신앙으로 재시동(Rebooting)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초대 교회부터 주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은 이 기다림은 낡은 신앙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하는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입니다.

유대 민족의 결혼 풍속을 따라서 밤에 결혼하는 풍속이 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처녀는 등과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는 등만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등도 필요하지만, 기름을 준비하기 위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영적인 인내를 요합니다.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재림(Parousia)의 예수님에 대한 언급은 요한계시록 22장 마지막 절에도,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시간인 크로노스(Kronos)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kairos)를 언급한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끝장난 시간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앙적인 깨달음 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에 있지 말고 카이로스의 시간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시간에 살지 말고 영적인 시간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에베소서 5장 15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헬라어에서 세월은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영적인 시간들입니다. 크로노스는 세속적의 시간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사탄이 지배하는 인간의 역사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다양한 변종 기술까지 익혀 교묘하게 인간의 영혼을 갉아 먹고 죽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 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특별히 사탄의 변장 술은 문화의 옷을 입고 화려하게 매혹적으로 인간을 자극합니다. 영혼을 타락하게 합니다.

주님의 재림은 단계별 발전과정이 있지 않습니다. 홀연히 갑자기 오신다는 특징입니다.

언제든 오시리라는 준비를 하는 것이 크리스천들의 일상이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복귀한 직장과 다양한 일터에서 자신의 신앙의 소신을 갖고 근신하며 생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회개가 있는 곳에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공 생애 사역의 시작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 17)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는 회개의 역사였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곳에는 성령이 요동쳤습니다. 현대 교회들은 이미 자본에 의해 성령을 잠식시킨 듯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강물같이 흐리지 않고, 더러운 악취가 각 교단의 학교와 다양한 교회 행정에서 공의를 이루지 못하고 썩어서 더 이상 처리 못할 골치 덩어리가 되어 있습니다. 사회가 먼저 압니다.

교회는 아니라고 떼를 쓰고 있습니다. 무법 천지의 행태를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지역 사회에 좀 봉사하고, 물질로 베푼다고 그 선한 영향력을 회복 할 수 있을까요?
또한 너무 보이는 교회 건물을 신성한 성전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 팬데믹 사건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성전을 다시 재 정비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미 새로운 표준(new normal)를 주셨습니다.

1907년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회개의 역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왕실의 회복할 수 없는 리더십과 국가적인 혼란의 때입니다. 국권을 상실한 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혹 어느 한국 교회 사학에 관한 언급한 책에는 그 당시의 성령의 역사는 1905년 을사 늑약과 1910년 한일 합방 사이에 주권을 잃은 백성들이 이 땅에 소망을 잃어버리고 하늘의 소망을 갖게 되는 기회였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은 운동은 바로 ‘회개운동’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는 성령의 역사(power)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사도행전 1장 1~2절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신 일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일까지 일을 기록하였노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사도행전의 전체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그 안에 담고 있는 의미 중에서 상기 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은 복음만 존재하고 역사는 없는가 입니다. 분명 두 가지 모두 간직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 신비한 체험인 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지금처럼 대유행(pandemic) 사건과 같은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 안에 성령께서 간섭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과 역사는 뗄 수 없는 과거, 현재, 미래의 하나님의 간섭하심 입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고합니다.

사도행전 1장 11~12절에, “갈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쳐다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단지 심령의 위로의 소박함에만 붙잡혀 있지 말라, 현실로 돌아 가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승천하는 신비한 상황이지만, 신비함에 취하지 말고, 현실로 돌아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곧 복음에 참여하라는 명령입니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을 타고 성령은 역사(History)를 움직일 것입니다.

그 주체는 분명 교회이지만, 교회가 타락하면 예수님의 경고처럼 파괴자를 보내 무참히 부셔 버릴 것입니다. 이 파괴의 잿더미 안에도 그분의 생명은 여전히 호흡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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