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동물의 숲과 애국심

2020. 4. 25.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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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환 온라인뉴스부 기자


2008년 2월 미국 대선 때다. 버락 오바마 후보의 부인 미셸 여사의 유세 발언이 논란이 됐다. 그는 “어른이 된 후 처음으로 진정으로 이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됐다”고 했다. 공화당 측은 발끈했다. 경쟁자였던 존 매케인 후보의 부인 신디 여사는 “나는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내 조국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며 맹공했다.

미셸 여사에게 더 공감이 간다. 한국과 한국인이 항상 자랑스럽진 않았다. ‘국정농단’ 박근혜 정권은 부끄러웠다. 정치가 곧 국가인 한국이라서 더 그랬다. 촛불로 무도한 정권을 뒤엎은 국민의 모습은 뿌듯했다. 김연아, 방탄소년단(BTS), 봉준호, 손흥민 보유국이라 어깨가 으쓱하다. 동시에 텔레그램 ‘n번방’ 가해자도 한국인이다. 한국인의 흥과 열정이 좋다. 남을 챙기는 인심이 따뜻하다. 그런데 뭐 하나 터지면 몰려가서 죽일 듯이 공격하는 모습은 무섭다.

애국심은 개별적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라를 사랑하라’는 맹목적인 애국심 강요는 독재 정권이 흔히 쓰던 수법이다. 나라가 나라다워야지, 나라 같지 않은 나라까지 자랑스러울 순 없다. 마찬가지로 애국의 방법도 하나가 아니다. 국위선양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BTS처럼 노래와 춤에 능하거나 외모가 특출하진 않지만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소비해서 내수를 진작하는 것도 애국이다. 그러니 애국의 분야·방향을 정해놓고 강요하는 세태는 경계해야 한다. 자칫하면 홍위병이나 십자군처럼 전체주의화될 수 있다.

닌텐도 스위치 ‘모여봐요 동물의 숲 에디션’을 두고 찬반이 팽팽하다. 동물의 숲엔 자극적 요소가 없다. 동물 친구들과 낚시하고 생일파티하는 일상 게임에 수많은 이가 빠져들었다. 학교를 못 가는 아이들이 열광한다. 별거 아닌 일상조차 그리운 코로나19 국면에서 동물의 숲은 별거 아닌 일상을 그리는 방식으로 킬링 콘텐츠가 됐다.

최근 독도지킴이로 유명한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최소한의 자존심만은 지키자”며 한국 내 유저들을 비판하자 동물의 숲은 순식간에 일제가 만든 혐오스러운 매국 게임으로 전락해버렸다. 동물의 숲 사진을 올린 한 연예인은 매국노 소리를 듣고 SNS를 비공개로 돌렸다. 일본의 만행은 잊지 말아야 한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반발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 행위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양국 국민이 불매운동을 전개하며 치킨게임을 벌이는 상황에서 질 수는 없겠다. 이기는 게 애국처럼 보인다. 한·일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를 몇 가지 짚어보자. 어떤 제품을 사면 안 되나. 유니클로의 경우 국산 대체 브랜드가 있기 때문에 불매해도 된다는 논리가 많았는데 카메라는 어떤가. 사진작가들이 쓰는 니콘, 소니 카메라는 대체용품이 없어서 사도 되나. 그러면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삼성 스마트폰에 일본 부품이 들어가는데 그렇다면 삼성 휴대전화는 쓰면 안 되나. 애국의 관점에서 일본의 어떤 제품을 사고 안 사고의 기준은 과연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우리나라 게임계 혹은 콘텐츠 업계는 왜 동물의 숲 같은 콘텐츠를 지금껏 만들지 못했나. 코로나19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결과를 왜 못 내놨나. 양산형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으로 일관하며 미진한 게임성을 바꿀 생각은 않고 자극적인 광고와 과금으로 일관하는 국내 대형 게임회사들이 반성해야 하지 않나. 일본 제품을 쓰는 사람들을 힐난하는 게 이런 국내 사정을 덮는 기제로 작용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대학에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지인이 있다. 언어뿐 아니라 문화까지 전파한다. 외국인 유학생과 국내 유적지도 가고 비빔밥도 먹고, 한국의 매력을 한껏 알린다. 애국자다. 다만 그는 동물의 숲에 열광하고, 일본 맥주를 즐겨 마신다. 그는 매국노일까. 쉽게 답하기 어렵다. 나라 사랑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숲 논란은 복잡한 애국의 단면을 보여준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지만 행동 하나로 애국자와 매국노를 걸러내는 건 폭력이다. 서경덕 교수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불매를 강요하자는 뜻이 아니었다. 개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며 국산품 애용을 생활화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코로나19로 지친 아이들과 그 부모를 탓하는 소모적 논쟁은 이만 끝내자. 정부의 협상력을 믿고, 과거를 잊지 않도록 노력하면 된다.


박세환 온라인뉴스부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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