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이유 뭘까, 영어 표현 남발하는 일본 정치인들

양은심 2020. 3.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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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42)

듣는 사람에게 어떻게 내용을 전달하고 이해시킬까.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면 된다. [사진 pixabay]


‘말, 말, 말….’ 말이 난무한다. 중국 우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며 흘려보낸 코로나19가 어느새 국내 뉴스로 턱 하니 눌러앉았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유럽에 페스트가 유행한 시대와는 달라졌음에도 이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약했다. 지구가 한 동네라는 것을, 세계는 하나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나라 사이에 바다가 있고 국경이 있다고 한들 요즘 세상에 왕래 못 할 것이 무엇이 있으랴.

번역을 직업으로 삼고 있어서인지 조금은 ‘말’에 민감하다. 특히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자막의 경우 흘려 봐도 머뭇거림이 없도록 하려고 노력한다. 정치가가 영어를 쓰는 걸 보면 그 불친절함에 화가 나기도 한다. 자기가 말을 하는 대상인 국민을 이해시킬 마음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워진다. 원고까지 마련했으면서, 엄연히 딱 맞아 떨어지는 모국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쓸 때는 더더욱 신경을 건드린다. 일상적인 잡담이라면 영어권에서 오래 살았나보다 하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민 혹은 국민을 대상으로 공식 발표를 하면서 영어를 남발하는 정치가는 한심하기까지 하다. “알아들으라는 거야 뭐야!” 뉴스를 보며 한마디 하게 된다.

듣는 사람에게 어떻게 내용을 전달하고 이해시킬까.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면 된다. 일본의 자막번역을 예로 들어 보면 의무교육인 중학 과정까지 배우는 ‘상용한자’를 쓰는 게 기본 규칙이다. 어려운 한자를 쓸 때는 자막 위에 읽는 법을 붙여야 한다. NHK의 경우 시간대에 따라 뉴스 자막에 한자의 읽는 법을 붙이기도 한다. 이유는 공공방송으로서 전 국민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NHK를 볼 때 스트레스가 덜한 것은 상용한자에 준거한 언어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청료 문제로 욕도 많이 먹는 방송국이지만 나는 NHK를 즐겨본다.

코로나19에 관한 정부 발표를 할 때 아베 총리는 ‘크라스타(クラスター, cluster, 클러스터)’라는 말을 썼다. ‘크라스타가 뭐지?’ 순간적으로 자막을 보니 괄호 안에 ‘소규모 환자 집단’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나의 나쁜 버릇이 도졌다. “이 사람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중대한 발표를 하면서 꼭 ‘클러스터’라는 영어를 써야만 했을까? 전염병의 심각성에 대해 말하고 국민에게 주의를 요청하는 장이었다. 가능한 한 일본 국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써야 했다. 더군다나 국제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일본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클러스터(cluster)’의 일본어 표기는 ‘크라스타(クラスター)’다. 영어 발음이 아니어서 영어권 사람도 알아듣기 어려울 것이다. 나 또한 괄호 안의 설명이 없었으면 무슨 뜻인지 몰랐을 것이다. 수상발표 후 인터넷에는 크라스타가 무슨 뜻이냐는 검색 문구가 떴고, 주말 생방송에서는 그 의미를 묻는 시청자도 있었다. 외국인인 나뿐만 아니라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이 많았다는 것이다. 엄연히 모국어에 있는 말을 애써 영어를 가져다가 써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일본 아베 수상. 전 국민을 대상으로 중대한 발표를 하는 수상이 꼭 ‘클러스터’라는 영어를 써야만 했을까? [AP=연합뉴스]


『나이들수록 인생이 점점 재밌어지네요』의 저자 와카미야 마사코(若宮 正子) 씨에게 들은 이야기가 인상 깊게 남아있다. 와카미야 씨는 고령자야말로 IT 기기와 친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IT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자연스럽게 전자정부로 유명한 에스토니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과연 시니어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직접 방문해 강연회를 열고 정부 기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에스토니아는 전자정부에 등록하면 세계 어느 나라에 살고 있든 전자영주권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안 와카미야 씨는 심사를 거쳐 등록을 마쳤다고. 물론 최종심사는 까다로웠다고 한다.

와카미야 씨는 에스토니아 IT 정책 담당자에게 물었다. “고령자가 인터넷을 이용한 제도를 활용하려면 교육이 필요한데 어떻게 지도하고 있느냐”라고. 담당자는 “교육이 필요 없는 쉬운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대답에 정치가가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할 포인트가 들어있다. 국민이 알기 쉽게 말을 할 것.

말이라는 것은 ‘생물’이다. 새로 태어나기도 하고 있었던 말이 사라지기도 하며 그 의미가 변형되어 쓰이기도 한다. 수상이 ‘크라스타’라는 말을 쓴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일본에는 아주 강력하게 뿌리를 내렸다. 이제는 무슨 뜻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집단 감염’이라는 말이 너무 강렬해 혼란 상태를 피하고 싶은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해본다. 아직 ‘집단’이라고 하기는 멀다는 판단에서 영어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설사 그렇다 해도 정치가는 알기 쉬운 말로 국민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의무가 있다.

한일출판번역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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