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서울 한복판 물들인 30자, 봄날의 희망을 쓰다
외국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문화
한글의 아름다움 새롭게 일깨워
"랩·힙합 등 젊은 언어도 수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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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맞은 교보생명 광화문글판

“엄마, 저기에 세종대왕이 계세요.”
지난 8일 일요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 봄빛이 일렁였다. 부모 손을 잡고 나온 꼬마 아이가 세종대왕 동상을 가리켰다. 동상 앞에는 지난해 3·1운동 100년을 기념해 만든 기념탑이 서 있다. 영상 16도 따듯한 날씨에도 광장은 매우 한적했다.
반면 광화문광장은 어수선하기만 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집회·시위를 금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렸다. 서울시에선 집회 예방을 위해 이순신 장군 동상 주변에 대형 화분을 촘촘하게 들여놓았다. 해당 사실을 알리는 트럭 스피커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이날 덕수궁 대한문에서 경복궁 광화문까지 한 바퀴를 쭉 돌아봤다. 도로 양쪽이 요란했다. 눈을 편히 쉴 곳이 적다. 대형 전광판에선 코로나19 속보가 쏟아졌고,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플래카드도 나부꼈다. 각종 시국 사건 때마다 광장을 메웠던 이들은 자취를 감췄지만 대신 각종 구호와 주장이 거리를 채웠다. 코로나19에도 둘로 갈라진 우리 사회의 축소판 같았다.

광화문광장 교보 사옥에 걸린 글귀가 눈에 띄었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천양희 시인의 ‘너에게 쓴다’ 일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해마다 계절별로 네 차례 옷을 갈아입는 ‘광화문글판’의 2020년 봄 노래다. 건물 앞 대로의 가로수는 아직 앙상해 보였지만 글판 속에 활짝 돋은 나뭇잎에선 작은 새들이 새봄을 지저귀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유난히도 잔인한 올봄, 광화문글판은 외롭게 또 힘겹게 ‘봄의 찬가’를 토해내는 듯했다.
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호응 커져
광화문글판이 올해로 꼭 30년을 맞았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한복판을 무지개로 물들인 시구, 24시간 뛰는 현대인이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문구, 어쩌면 시를 잃어버린 세상에 억지춘향처럼 시를 떠먹이는 것 같은 전복적 발상이 30년을 버텨온 게 일단 놀랍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도심 큰 건물에 구호나 속담이 아닌 문학성 풍부한 구절을 지속해서 노출한 경우는 외국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며 “대중들에게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동시에 글판 서체 또한 다양하게 시도하며 한글 폰트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했다.
실제로 광화문글판 문구는 한국 서정시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 시인·소설가·문학평론가 등으로 구성된 선정위원회가 구성돼 있다. 30자 안팎의 짧은 시구를 선정·변주하고, 이를 가로 20m 세로 8m 크기의 글판에 옮겨 적는다. 계절 감각에 맞게 봄철에는 주로 생명과 희망의 메시지로 전해왔다.
예컨대 지난해 봄에는 정현종 시인의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이 선정됐다. ‘그래 살아봐야지/너도 나도 공이 되어/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이다. 2018년 봄에는 김광규 시인의 ‘오래된 물음’이 뽑혔다.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튀어오는 몸/그 샘솟는 힘은/어디서 오는 것이냐.’

2013년 봄 김승희 시인의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는 2020년 현재 시점에서도 큰 용기를 준다. ‘가장 낮은 곳에/그래도라는 섬이 있다/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재난 앞에서도 사랑과 희생을 실천하는 우리네 이웃이 떠오른다.

광화문글판이 처음부터 문학성을 앞세운 건 아니다. 1991년 1월에 걸린 첫 문구는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활력 다시 찾자’였다. 이후 ‘개미처럼 모아라, 여름은 길지 않다’ ‘훌륭한 결과는 훌륭한 시작에서 생긴다’ 등 계몽적 표어 일색이었다. 분위기는 98년 초에 180도 달라졌다. 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판으로 거듭났다. 고은 시인의 ‘떠나라 낯선 곳으로/그대 하루하루의 반복으로부터’(낯선 곳)이 분기점이 됐고, 2003년부터 계절별 문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글판에 감성적 손글씨를 접목한 건 2005년부터다.
광화문글판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를 낳았다. 서울시청 서울도서관, 남산 우리은행 본점, 대구은행 본점, 전북 남원시청 등 지자체·기업 등에서 비슷한 모양의 글판을 내걸었다. 딱딱하고 강압적인 현수막에 사람의 숨결이 깃든 공감의 문화를 닦은 셈이다. 지금은 흔해져 때론 진부한 느낌마저 주지만 도입 초·중반에는 일반 시민들의 호응이 컸다. 국제구호전문가 한비야씨는 “도심에서 길을 걷거나, 귀갓길 차 안에서 스치듯 읽은 이 짧은 시들이 수많은 이들을 촉촉하게 해줬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우울한 마음 달랬으면
91년 정월부터 올봄까지 선보인 글귀는 총 100편에 이른다. 초창기에는 이솝우화·불경 등에서도 문구를 따왔다.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사랑이여 건배하자/추락하는 모든 것들과 꽃 피는 모든 것들을 위해 건배!’(2008년 봄), 독일 소설가 헤르만 헤세의 ‘봄이 속삭인다/꽃 피라 희망하라 사랑하라/삶을 두려워하지 말라’(2007년 봄) 등 외국 작가도 종종 소개됐다.
광화문글판의 변화, 혹은 일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삶의 기반을 다진 이립(而立), 즉 30년 세월을 맞은 만큼 보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젠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다른 글판과의 차별화도 숙제다. 이를테면 문학 글판 원조(元朝)의 업보다.
이어령 전 장관은 “좋은 노래도 많이 들으면 식상해진다. 매너리즘에 빠지면 곤란하다. 광화문글판이 도심에 아날로그 향기를 불어넣었지만 앞으론 보다 젊어졌으면 한다. 랩·힙합 등도 끌어들이며 싱싱한 도시 언어를 창출했으면 한다. 문학적 수사를 넘어 촌철살인의 풍자나 패러디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출판 디자이너 정병규씨는 “광화문글판은 교보문고라는 문화상징과 함께 서울 복판의 오아시스 역할을 했다. 반면 글판 전체 구성이나 배열에서 광화문만의 개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브랜드 정체성을 쌓아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여느 해보다 우울한 봄을 맞은 2020년이다. 강화도 시인 함민복의 ‘마흔 번째 봄’(2015년 봄)을 들춰본다. ‘꽃피기 전 봄산처럼/꽃핀 봄산처럼/누구가의 가슴 울렁여 보았으면.’ 아무리 속상해도 사랑과 연대는 잃지 않을 일이다. 윤동주의 ‘새로운 길’도 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건너서 마을로/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2017년 봄)
■ 손글씨 작가 박병철 "한글의 조형미 전파할 것"
「

“광화문글판은 공익성이 큽니다. 멋과 재주를 부리기보다 길 건너편에서도 또렷이 읽을 수 있도록 했어요. 무엇보다 가독성이 중요합니다.”
‘글씨 예술가’ 박병철(55·사진)씨의 말이다. 그는 광화문글판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2009년 겨울 문정희 시인의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부터 올 겨울 윤동주 시인의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까지 총 15편의 글판을 디자인했다. 2012년 봄 그가 쓴 나태주 시인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2016년 교보생명 조사에서 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글귀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박씨는 국내 1세대 캘리그래피(손글씨) 작가로 꼽힌다. 동글동글, 정겹고도 친근한 서체로 행인들의 스산한 마음을 채워왔다. 광고 디자이너 출신인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손편지로 달래면서 캘리그래프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글판의 생명은 서체보다 시 자체입니다. 저는 주연이 아닌 조연인 셈이죠. 주변에서 ‘감동했다’고 할 때 감사할 뿐입니다.”
박씨는 “한글의 미학적 특성에 눈을 뜬 게 가장 큰 보람”이라고 했다. 초성·중성·종성으로 이뤄진 한글의 입체성을 외국에도 널리 알리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 한글을 활용한 문화활동에 주력할 계획이다. “미국·멕시코 등을 다녀왔어요. 올 상반기 베트남도 방문할 계획이었는데 코노라19 때문에 조금 늦춰야 할 것 같습니다.”
」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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