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미국 팝아티스트 에드 루샤-미국인 삶 투영..단어로 구현한 팝아트

2020. 3. 2.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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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계 미술시장에서 핫하게 떠오르는 지역이 하나 있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과 온화한 날씨에 자유로움과 활기가 넘쳐나는 도시, 로스앤젤레스(LA)다. 비록 그동안은 뉴욕에 눌려 크게 성장하지 못했었지만, 이곳 미술시장이 요즘 눈에 띄게 도약하고 있다.

그 배후에는 최근 큰손 컬렉터로 부상한 이 지역의 부유한 연예인들이 있다. 하지만 그 토대를 닦은 진정한 주역은 1950년대부터 줄곧 이 도시의 미술과 문화를 키워온 사람들이리라. LA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앤과 잭 퀸(Joan and Jack Quinn) 부부 같은 컬렉터와 이들이 사랑한 화가, 에드 루샤(Ed Ruscha, 1937년~)처럼.

‘라디오라는 단어를 망가뜨리면서2(Hurting the Word Radio #2, 1964년)’. 2019년 11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약 5200만달러(약 618억원)에 낙찰되면서 루샤의 작품 가운데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운 작품이다.
이 부부는 50여년에 가까운 결혼생활 동안 LA를 중심으로 미국 서부 출신 예술가 작품을 수집하면서 후원가로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1978년 조앤은 앤디 워홀이 창간한 ‘인터뷰’라는 미술잡지의 서부 지역 편집자로 참여하기 시작,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가를 적극 홍보했다. 1993년부터는 예술가들을 인터뷰하는 TV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편, 미술잡지에 글과 사진을 기고했다. 2017년 남편 잭이 사망한 후에도 지역 예술가를 위한 그녀의 후원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이 미술 애호가 부부가 사랑한 많은 예술가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루샤다.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난 그는 미대 진학을 위해 1956년 LA로 이주한 이래 줄곧 이곳에서 독창적인 회화 작업을 해온 대표적인 서부 지역 예술가다. 조앤 부부가 소장했던 루샤의 걸작 중 한 점 ‘라디오라는 단어를 망가뜨리면서2(Hurting the Word Radio #2, 1964년)’라는 특이한 제목의 회화가 2019년 11월 크리스티 뉴욕 이브닝 세일에서 높은 추정가를 훌쩍 뛰어넘는 금액(약 5200만달러, 약 618억원)에 낙찰돼 그의 작품 가운데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우면서 다시 한 번 이들 부부의 컬렉션이 화제가 됐다.

밝은 하늘색 바탕에 ‘라디오(RADIO)’라는 굵은 대문자가 빛나는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는 작품이다.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단순한 바탕과는 대조적으로 죔쇠가 글자 ‘R’과 ‘O’를 물어 뒤틀린 형상에다 비닐처럼 얇은 재질과 그림자까지 극사실적으로 묘사돼 오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작품은 루샤를 1960년대 가장 혁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구축해준, 그의 발명품인 ‘문자 회화’의 중요한 초기작 중 하나다. 문자와 단어를 회화에 활용한 이 독특한 스타일로 그는 캘리포니아를 위시한 서부 지역 팝아트 전개를 이끄는 선봉대에 서게 된다.

워홀이 뉴욕의 팝아트를 대변한다면, 루샤는 LA의 팝아트를 대표한다. 작품 스타일에 있어서는 유사한 점이 전혀 없지만 둘 사이에는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루샤는 미국인의 삶에 밀착된 일상적인 단어를, 워홀은 코카콜라나 캠벨 수프 같은 일상 오브제를 작품 주제로 삼았다. 이를 통해 둘은 가장 미국적인 도상을 만들어냈다. 광고나 잡지, 영화 같은 대중매체에서 영감을 얻은 점도 흡사하다. 둘 모두 초기에 상업예술을 추구하다 순수예술로 전향한 것도 꼭 닮았다. 두 예술가가 공통적으로 ‘고급’과 ‘저급’ 사이 경계를 깨기 위해서 그래픽이나 일러스트레이션 같은 상업예술 테크닉을 회화에 도입한 것은 이런 배경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확연하게 다른 점이 있다.

‘불타는 주유소(Burning Gas Station, 1965~1966년)’. 주유소 연작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이미지로 구상과 추상, 전통 회화 기법과 주유소라는 일상적인 소재 등 여러 가지 대조적인 요소들로 1960년대 LA의 모습을 담아낸 걸작으로 평가된다.
'많은 사람의 친애하는 친구(A DEAR FRIEND OF MANY PEOPLE, 1989년)’. 광고에 등장할 법한 이미지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텍스트를 결합한 1980년대 회화의 예. 2019년 5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약 500만달러에 낙찰됐다.
광고나 제품 이미지를 그대로 작품에 반영한 워홀과 달리 루샤는 기존 이미지를 차용한 적이 없다. ‘라디오라는 단어를 망가뜨리면서2’를 보라. 이미지라고는 없는, 일견 무미건조한 이 그림에서 미국인들이 1960년대 LA를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전역에 TV 보급이 일반화된 이후에도 라디오는 미국인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특히 LA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광활한 이 도시에서 자동차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운전하면서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는 자유분방한 문화, 젊음과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LA의 삶 그 자체를 상징했다. 한 번이라도 66번 고속도로를 달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보면서 캘리포니아의 빛나는 햇살 아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로큰롤 음악을 들으면서 대형 광고판이 줄지어 늘어선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장면을 바로 떠올리리라. 이처럼 루샤의 작품은 간결하지만 상당히 함축적이고, 그렇기에 시적이다.

그는 66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LA 일대 주유소를 찍은 흑백 사진들을 모아 ‘26개의 가솔린 주유소(Twenty-six Gasoline Stations)’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책 역시 1960년대 미국 서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햇빛이 내리쬐는 광활한 도로와 황량한 풍경, 그리고 각양각색의 주유소와 로고들. 이때 찍은 사진을 회화로 옮긴 ‘주유소’ 연작도 루샤를 LA 문화의 충실한 기록자이자 대변자로 만들어줬다. 이 연작 가운데 한 점인 ‘불타는 주유소(Burning Gas Station, 1965~1966년)’를 보라. 이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는 첫 번째 이유는 화염에 휩싸인 주유소라는 충격적인 소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이 그림에도 많은 상징과 함축이 담겨 있다. 딱딱한 직선으로 그려진 주유소와 대조를 이루며 치솟는 불꽃을 보며 관객은 왠지 모르게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떠올린다. 화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사선 구성은 고속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의 속도감을 그대로 전달한다. 과장될 정도로 날카로운 모서리는 주유소의 견고함을 한껏 강조한다. 그러나 그런 견고함은 허상이라는 듯 치솟는 불길. 검게 그을린 하늘은 로스코의 색면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추상적으로 표현돼 있다.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화같이 간결하게 표현된 주유소 건물과는 대조적으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화염에 휩싸인 주유대와 ‘스탠더드’라는 주유소 간판. 이 그림에서도 글자는 미국 서부의 문화를 담아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진짜 풍경은 기호와 상징”이라고 했던 그의 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미국의 전 대통령 오바마는 루샤의 ‘망설임(Indecision, 1982년)’이라는 작품을 집무실에 걸 작품으로 선택했다. 매 순간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분신 같은 그림이 아니었을까. 절제와 간결함 속에 미국인의 삶 전체를 투영시킨 루샤를 팝아트를 넘어 개념미술가이자 화가 시인으로 존경하는 데에는 이처럼 수많은 이유가 있다.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 2047호 (2020.02.26~2020.03.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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