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래의 만년필 이야기] 서랍 속 방치된 펜, 그냥 버렸다간
[오마이뉴스 김덕래 기자]
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말>
▲ 그라폰 은 볼펜&샤프 의뢰인이 파우치에 담아 보내온 그라폰 은 볼펜&샤프 |
ⓒ 김덕래 |
▲ 은 볼펜 손때가 묻어 변색된 은 볼펜 표면. |
ⓒ 김덕래 |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1883년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에 의해 근대 만년필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888년 존 로우드에 의해 볼펜이 개발되었으나, 잉크 흐름이 불규칙해 상업화되지 못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지요. 세상에 없던 걸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그렇지만, 제품화해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일은 고단한 여정입니다. 하지만 결핍은 필요를 낳고, 필요가 극대화되면 결과물로 구현됩니다.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까지 이어졌고, 전시에 만년필로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잘 마르고, 수시로 잉크를 보충해줘야 하는 만년필은 당시엔 불편함이 크게 느껴지는 필기구였지요. 1929~1933년까지 대공황 시기를 거쳐 1938년에 이르러서야 볼펜의 완성도가 무르익게 됩니다.
▲ 볼펜 볼 볼펜 촉 끝 원형 구(球) 근접 사진 |
ⓒ 김덕래 |
우리나라에 볼펜이 처음 들어온 시기는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군에 의해서였습니다. 1963년 국내 최초 볼펜 개발에 성공한 광신화학이, 60년대 말 '모나미 153'이란 대중 필기구의 상징물을 만들어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서랍이나 필기구통을 열면 한 자루 있기 마련이었던 '모나미 153'이란 이름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모나미(MONAMI)'는 프랑스어로 '나의 친구 Mon Ami'로 풀이되고, '153'은 당시 15원의 펜 가격과 모나미의 3번째 제품이란 뜻이 녹아 있습니다.
샤프는 1913년 미국에서 '에버샤프'라는 이름의 자동연필로 시작, 1915년 일본 하야카와 도쿠지에 의해 대중화에 성공합니다. 이후 회사명을 우리가 알고 있는 샤프(Sharp) 社로 바꾸게 되지요. 국내 볼펜시장의 개척자인 광신화학이 '모나미'로 회사명을 바꾼 것처럼 말입니다.
샤프는 작동방식에 따라 크게 회전식과 노크식으로 구분합니다. 회전식은 샤프의 일부를 회전시켜 발생되는 힘으로 심을 밀어내는 방식이고, 노크식은 펜의 일부분을 눌러 스프링을 작동시켜 심이 나오게끔 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은(銀, Silver)으로 된 이 샤프는, 펜 상단 노브(Knob)를 돌려 심을 작동시키는 회전식입니다.
파버카스텔은 1761년 독일 스테인에서 시작한 258년 전통의, 현존 대형 필기구 생산업체 중 가장 유서 깊은 회사입니다. 하지만 그저 오래된 것만으로 주목받는 건 아닙니다. 파버카스텔은 연간 15만톤의 목재로 20억자루의 연필을 만들어냅니다.
8500억 이상의 연매출도 유의미합니다만, 스마트폰과 노트북으로 대변되는 디지털세상에서 아직도 아날로그 아이콘인 연필을 이렇게나 많이 만들고, 또 지속적으로 소비한다는 건 놀랄 만한 이야기가 분명합니다.
▲ 그라폰 로고 그라폰 파버카스텔 문장 |
ⓒ 김덕래 |
사람도 나이가 들수록 서서히 피부에 탄력이 떨어지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지요. 은세정용 융과 전용약품으로 펜을 닦아내는 일은, 피부에 충분히 보습크림을 바르고 영양을 공급해 조금이라도 피부에 흡착된 세월을 걷어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은이 여러 장신구로 만들어져 우리에게 친숙하게 된 건, 어쩌면 어떤 소재보다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 아닐까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것엔 가치를 부여하고, 천천히 사람의 발걸음과 비슷한 속도로 변해가는 것엔 익숙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만약, 한번 변색된 상태에서 회복시킬 수 없었다면, 이 같은 사랑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은이 매력적인 이유는, 더디게 변해가는 - 마치 살아 있는 듯한 - 자연스러움과 어느 정도 복원 가능한 회복성을 같이 갖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오래된 펜을 손질하는 일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의 일처럼, 공(功)을 들이면 빛이 납니다.
보통 볼펜이 고장나는 경우는, 내부에서 볼펜심이 터지며 흘러나온 잉크로 인해서입니다. 여름철 자동차 안에 보관한 일회용 가스라이터가 폭발해 화재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볼펜심 형상은 여러가지 입니다. 그저 플라스틱 원형 틀 안에 잉크가 채워진 구조도 있지만, 잉크가 채워지는 공간은 금속이고 뒷부분은 플라스틱 마개로 닫힌 형태도 있습니다.
이 펜의 경우 후자입니다. 외부온도가 급격히 상승하면, 밀폐된 내부공기가 팽창해 그 힘이 마개를 밖으로 밀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내장된 잉크가 흘러나오게 되고, 끈적끈적한 그것이 매커니즘 틈새 사이사이 박혀 원활한 작동을 방해해 훼손되는 거지요.
▲ 볼펜 세척 전 그라폰 볼펜 세척 전 |
ⓒ 김덕래 |
▲ 그라폰 볼펜 세척 후 |
ⓒ 김덕래 |
하지만 없던 문제가 발생되지요. 샤프심이 나오긴 나오지만 일정간격을 두고 뚝뚝 부러지게 됩니다. 내 샤프가 언제부터 이런 증상을 보인다면, 촉이 약간 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한눈에 알아챌 정도로 촉이 심하게 휘면 샤프심은 아예 나오질 못합니다.
또 심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책상을 긁는 등의 충격을 주게 되면, 촉 끝부분 심이 나오는 원형부가 찌그러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심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뚜껑을 닫은 물통에서 물이 나올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 그라폰 샤프촉 수리 전 |
ⓒ 김덕래 |
물자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필기할 도구가 없어 쓰지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떤 생명이든 끝이 있는 것처럼, 모든 펜에도 정해진 수명이 있는 건 참입니다. 하지만, 일찍 꺼지는 생명이 서글프듯, 경미한 고장으로 버려지는 펜을 보는 일은 애처롭습니다.
이 샤프는 촉도 휘고 사출부도 찌그러진 상태입니다. 심이 나오지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기침감기에 목감기도 함께 왔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감기입니다. 위태로울 정도의 중한 병이 아닙니다. 며칠 약 먹고 쉬면 낫는 것처럼, 시간이란 약물에 정성이란 알약을 개어 쓰면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이 볼펜과 샤프는 다시 사람 손으로 돌아가 '쓸 것'으로서의 제 기능을 다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버려지기엔 아직 너무 많은 수명이 남아 있으니까요. 단순히 값나가는 펜이라 가치 있는 게 아니라, 쓰는 이의 온기가 담겨 있기에 귀한 펜입니다.
▲ 그라폰 샤프촉 수리 후 |
ⓒ 김덕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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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광주여대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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