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한승주] 봉준호와 밥

한승주 편집국 부국장 2019. 12. 24. 04: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국 영화 시상식 아카데미 수상은 한국영화의 오랜 꿈이었다. 대작 할리우드 영화들이 한국에서 최초로 개봉될 정도로 우리나라는 세계 영화계의 중요한 마켓이지만, 한국영화는 유독 오스카 트로피와는 인연이 없었다. 본상 수상은커녕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러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내년 2월 개최되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유력한 수상후보라는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봉 감독은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은 2019년, 한국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칸영화제에서 ‘기생충’으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당시 나에게 영광스러운 수상만큼이나 의미 있게 다가온 건 ‘밥때를 지킨 감독’이라는 수식어였다. 알려졌듯 한국 영화업계는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악명이 높다. 봉 감독은 우리 영화계에서 처음으로 배우 스태프와 주52시간 표준 근로계약을 맺었다. 주연배우 송강호씨는 “봉준호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계산돼 있고 정교하게 구축돼 있다”며 “무엇보다 밥때를 정교하게 잘 지켜줘 좋다. 그래서 우리는 굉장히 행복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현장 총책임자로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밥때를 지켜준다는 것은 노동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이고 인간에 대한 중시이자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이는 그의 영화관으로도 이어진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기생충’의 키워드가 ‘냄새’라면 차기작의 키워드는 ‘생명’이라 말한 바 있다.

감독은 얼마 전에도 밥에 관한 얘기를 했다. 미국 유명 토크쇼에 나와 칸영화제 상영회 일화를 소개할 때였다. 상영회 후 기립 박수가 8분 동안 지속됐는데 정작 그때 배우들과 감독은 저녁을 제대로 못 먹어 매우 배가 고픈 상태였다. 박수가 계속 이어지자 감독은 “배고프다”라고 여러 번 중얼거렸는데 당시 중계화면에 자막으로 번역되는 바람에 큰 웃음을 주기도 했다. 칸에서 기립 박수를 받는 와중에 밥 얘기를 한 감독은 아마도 처음이었으리라. 아무튼 칸에서도 배우들의 밥때를 챙긴 셈인데 알고 보면 봉준호는 꾸준히 밥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유전자 변형 슈퍼돼지 ‘옥자’를 내세운 영화에서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먹을거리에 대한 탐욕과 대량생산이 불러온 동물학대와 생명경시에 경종을 울렸다. ‘기생충’도 마찬가지다. 부자들의 가든파티는 반지하 방의 빈곤한 식사와 극한 대비를 이룬다. ‘설국열차’는 또 어떤가. 꼬리 칸에서는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바를 서로 먹으려 다투는데 앞칸으로 갈수록 싱싱한 음식이 나온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살인의 추억’의 가장 유명한 대사는 송강호의 “밥은 먹고 다니냐?”다.

돌이켜보면 모든 문제가 밥에서 비롯된다. 국회의원들은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 몰두해 쌓여 있는 민생법안 처리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유치원 3법, 아직 처리되지 않은 어린이 교통안전법 등 서민들의 삶과 직결된 법안을 볼모로 잡고 선거법 개정이라는 밥그릇 싸움만 하고 있다. 부동산값을 잡으려는 정부의 초강도 대책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수직적 구조는 더 공고해지는 느낌이다. ‘기생충’ 속 폭우가 쏟아지면 변기가 역류하는 열악한 반지하 방과 푸른 잔디 위에 세워진 단독 주택의 대비처럼 말이다.

올 한 해도 우리는 밥벌이를 하느라 고단했고, 정작 밥때를 제대로 못 지키기도 했다. 때론 내 코가 석 자라 주변을 잘 돌보지 못했고,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우리의 죄를 사하려 세상에 온 아기 예수의 탄생일을 맞아 우리 이웃을 돌아본다. 주변 사람들, 특히 자기 몫의 밥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사람들, 일한 만큼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 구성원이 좀 더 밥때를 지키고 밥값을 인정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더불어 할리우드로부터 봉 감독의 기분 좋은 수상 소식이 들려오길 기대한다.

한승주 편집국 부국장 sjha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