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벼랑끝 외교' 주역, 사명대사가 일본에 남겼던 것은..

강혜란 2019. 10. 1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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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직후 강화협상 위해 일본 향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포로 송환' 담판
교토 머물며 '고쇼지'에 유묵 5점 남겨
국립중앙박물관서 11월17일까지 전시

"곧바로 길을 가고 가다보면 비로소 그칠 곳에 이르리라(直道行行到始休)" (사명대사가 승려 엔니에게 준 편지 중에서)
누런 종이에 힘차게 흘려쓴 서체. 비단을 덧댄 400여년 전 유묵(遺墨·글씨나 그림)이 고고한 자태를 드러냈다. 임진왜란 강화 협상을 위해 일본으로 향했던 사명대사(1544~1610)가 교토의 고찰 고쇼지(興聖寺)에 남긴 것들이다.

사명대사 진영(왼쪽)과 그가 일본 교토 고쇼지에 남긴 유묵 '최치원의 시구'.
400여년 만에 본국에 나들이 한 '사명대사 유묵'이 15일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 중근세관 조선1실에서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과 BTN불교TV가 공동 기획하고 고쇼지 측의 양해를 구해 이뤄진 전시다. 배기동 관장은 “일본(와세다대)에서 수학한 구본일 BTN불교TV 사장의 집요한 노력 끝에 어렵사리 한국에 나들이하게 된 귀한 유묵들"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개막식엔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도 참석했다.

사명은 1592년(선조 25) 발발한 임진왜란 때 승려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운 승병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7년을 끌었던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8년 일본에서 사망하면서 사실상 마무리됐다. 그런 상황에서 사명이 1604년 일본으로 향한 까닭은 무엇일까. 학계에선 그의 행적비 및 실록 등을 토대로 사명이 비공식 외교사절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강화 담판을 하고 조선 피로인(被擄人, 민간인 포로) 송환 협상을 했던 것으로 본다.


조선 8도 분할 밀약 저지한 '서생포 회담'
전장에서 무공을 세워 당상관에 오르긴 했지만 사명은 전문 관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 같은 중책을 맡게 된 것은 전란 중의 ‘서생포 회담’ 활약 때문이다. 명나라 원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린 일본군은 강화를 꾀하다가 돌변해 정유재란을 벌였다. 일본 측 진의를 알기 위해 1594년 도원수 권율과 명군 장수 유정이 사명을 보내 울산 서생포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의 제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만나게 했다.

가토를 만난 사명은 명‧일 사이에 추진돼 온 강화조건 속에 ‘조선 8도를 분할해서 남쪽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등이 포함된 걸 알게 됐다. 사명은 이를 조정에 보고하고 명·일 강화를 저지시켜야 함을 설파했다. 이를 포함한 네 차례 서생포 회담은 “명·일 비밀회담으로 분할될 위기에 있던 조선을 구한 최고의 외교전”(장철균 전 스위스주재대사)으로 평가된다.

사명의 외교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 화친 여부를 놓고 조정 중신들 입장이 분열돼 있을 때 1604년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사신을 보내왔다. 일본의 새 통치자가 된 막부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이라면서 강화에 응하지 않으면 다시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전언이었다. 이에 사명에게 대마도를 방문해 도쿠가와의 재침 위협에 대한 진위 여하를 탐문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에 함께 소개된 '사명대사 진영(초상화)'(동국대박물관 소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명은 대마도에서 3개월 머무른 뒤 그해 11월 예정에 없던 일본 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도쿠가와와 1605년 2월과 3월 두 차례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만난 것으로 알려진다. 이 ‘후시미 회담’을 통해 ‘1.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하지 않는다. 2. 상호 화평의 상징으로 통신사를 교환한다. 3. 일본에 끌려간 피로인을 송환한다. 4. 전란 중 선릉과 정릉을 도굴한 범인을 조선에 인도한다’ 등의 협의 사항이 도출됐다.


일본과 담판, 포로 3000명 송환 이끌어
일부 기록엔 ‘사명이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내용도 있다. 학계에선 사명의 노력 이후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수년간 송환된 조선인 숫자를 아우른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과의 화친과 국교 정상화는 또 다른 우여곡절을 거쳐 1607년 조선이 첫 통신사를 파견함으로써 성사됐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는 유묵들은 당시 사명이 회담을 기다리는 동안 고쇼지 승려들에게 남긴 것들이다. 한시 2점(‘최치원의 시구’, ‘벽란도의 시운(詩韻)을 빌려 지은 시’)과 ‘대혜선사의 글씨를 보고 쓴 글’, ‘승려 엔니에게 지어 준 도호’, ‘승려 엔니에게 준 편지’ 등 5점이다. 이 가운데 ‘벽란도의 시운을 빌려 지은 시’는 고려 말 문신 유숙(柳淑, 1324-1368)의 시 ‘벽란도’를 차운(次韻)해 지은 것으로 임진왜란부터 10여 년 간 감회를 담았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有約江湖晩 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지 오래되지만
紅塵已十年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낸 것이 벌써 10년이네.
白鷗如有意 갈매기는 그 뜻을 잊지 않은 듯
故故近樓前 기웃기웃 누각 앞으로 다가오는구나.

일본에서 임무를 잘 마무리한 뒤 속세를 정리하고 선승의 본분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명의 의지가 드러난다. 또 고쇼지를 창건한 승려 엔니 료젠(円耳了然, 1559~1619)에게 준 도호(법호)나 편지는 그가 교토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이들로부터 높이 평가받았음을 보여준다.

일본 교토 고쇼지(興聖寺)가 소장하고 있는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의 유묵(遺墨)이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국내 첫 전시된다. 이들 유묵은 사명이 임진왜란 후 강화와 포로 협상을 위해 1604년부터 이듬해까지 교토에 머물 당시 남긴 것들이다. 사진은 사명대사가 승려 엔니에게 지어 준 법호.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서희외교포럼 대표이며 스위스 주재대사를 지낸 장철균 동덕여대 초빙교수는 “사명의 선문 필담은 일본인을 사로잡은 소프트파워나 다름없었다”면서 “서생포‧후시미 회담에서 보인 그의 외교력과 협상력은 오늘날 경색된 한‧일 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엔 이밖에 동국대박물관 소장품인 사명대사 진영(초상화) 등 총 7점이 선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새롬 연구사는 “시문과 서체에 모두 능했던 사명대사를 기릴 수 있는 기회이자 한·일 교류의 오랜 역사를 상징하는 증거물들”이라고 소개했다.

배기동 관장은 "한·일 관계에 대한 우려가 큰데 문화교류를 통해 이 해법을 찾고자 한다"고 말했다. 개막식 참석을 위해 내한한 고쇼지 주지 승려 모치츠키 고사이(望月宏済)는 "평화를 사랑했던 사명대사의 정신이 오늘날 양국 관계에도 큰 울림을 준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17일까지 이어진다.
국립중앙박물관이 BTN불교TV와 함께 기획한 이번 전시에선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이 임진왜란 후 강화협상을 위해 교토에 머물 당시 고쇼지에 남긴 유묵(遺墨·생전에 제작한 글씨나 그림)이 첫 선을 보인다. [연합뉴스]

■ 당대의 문장가, 난세의 승병장…사명대사는 누구

「 1544년(중종 39) 현재 경상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일본에서는 송운대사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당대의 문장가로부터 사서경전을 수학하는 등 문재를 떨치다가 1558년에 어머니가, 이듬해 아버지가 별세하자 김천 직지사로 출가했다. 18세 되던 1561년(명종 16)에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당대의 쟁쟁한 문사들과 교유했다. 1575년(선조 8) 묘향산으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제자가 됐고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자 스승 휴정을 도와 승병을 일으켰다. 전란 중에 막후 외교사절로 활약한 뒤 64세에 세속의 일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내려갔다가 1610년(광해군 2) 67세로 법문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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