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전 '벼랑끝 외교' 주역, 사명대사가 일본에 남겼던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포로 송환' 담판
교토 머물며 '고쇼지'에 유묵 5점 남겨
국립중앙박물관서 11월17일까지 전시
"곧바로 길을 가고 가다보면 비로소 그칠 곳에 이르리라(直道行行到始休)" (사명대사가 승려 엔니에게 준 편지 중에서)
누런 종이에 힘차게 흘려쓴 서체. 비단을 덧댄 400여년 전 유묵(遺墨·글씨나 그림)이 고고한 자태를 드러냈다. 임진왜란 강화 협상을 위해 일본으로 향했던 사명대사(1544~1610)가 교토의 고찰 고쇼지(興聖寺)에 남긴 것들이다.
사명은 1592년(선조 25) 발발한 임진왜란 때 승려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운 승병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7년을 끌었던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8년 일본에서 사망하면서 사실상 마무리됐다. 그런 상황에서 사명이 1604년 일본으로 향한 까닭은 무엇일까. 학계에선 그의 행적비 및 실록 등을 토대로 사명이 비공식 외교사절로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강화 담판을 하고 조선 피로인(被擄人, 민간인 포로) 송환 협상을 했던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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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8도 분할 밀약 저지한 '서생포 회담'
전장에서 무공을 세워 당상관에 오르긴 했지만 사명은 전문 관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 같은 중책을 맡게 된 것은 전란 중의 ‘서생포 회담’ 활약 때문이다. 명나라 원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린 일본군은 강화를 꾀하다가 돌변해 정유재란을 벌였다. 일본 측 진의를 알기 위해 1594년 도원수 권율과 명군 장수 유정이 사명을 보내 울산 서생포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의 제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만나게 했다.
가토를 만난 사명은 명‧일 사이에 추진돼 온 강화조건 속에 ‘조선 8도를 분할해서 남쪽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등이 포함된 걸 알게 됐다. 사명은 이를 조정에 보고하고 명·일 강화를 저지시켜야 함을 설파했다. 이를 포함한 네 차례 서생포 회담은 “명·일 비밀회담으로 분할될 위기에 있던 조선을 구한 최고의 외교전”(장철균 전 스위스주재대사)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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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담판, 포로 3000명 송환 이끌어
일부 기록엔 ‘사명이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내용도 있다. 학계에선 사명의 노력 이후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수년간 송환된 조선인 숫자를 아우른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과의 화친과 국교 정상화는 또 다른 우여곡절을 거쳐 1607년 조선이 첫 통신사를 파견함으로써 성사됐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는 유묵들은 당시 사명이 회담을 기다리는 동안 고쇼지 승려들에게 남긴 것들이다. 한시 2점(‘최치원의 시구’, ‘벽란도의 시운(詩韻)을 빌려 지은 시’)과 ‘대혜선사의 글씨를 보고 쓴 글’, ‘승려 엔니에게 지어 준 도호’, ‘승려 엔니에게 준 편지’ 등 5점이다. 이 가운데 ‘벽란도의 시운을 빌려 지은 시’는 고려 말 문신 유숙(柳淑, 1324-1368)의 시 ‘벽란도’를 차운(次韻)해 지은 것으로 임진왜란부터 10여 년 간 감회를 담았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有約江湖晩 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한지 오래되지만
紅塵已十年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낸 것이 벌써 10년이네.
白鷗如有意 갈매기는 그 뜻을 잊지 않은 듯
故故近樓前 기웃기웃 누각 앞으로 다가오는구나.
일본에서 임무를 잘 마무리한 뒤 속세를 정리하고 선승의 본분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명의 의지가 드러난다. 또 고쇼지를 창건한 승려 엔니 료젠(円耳了然, 1559~1619)에게 준 도호(법호)나 편지는 그가 교토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이들로부터 높이 평가받았음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엔 이밖에 동국대박물관 소장품인 사명대사 진영(초상화) 등 총 7점이 선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유새롬 연구사는 “시문과 서체에 모두 능했던 사명대사를 기릴 수 있는 기회이자 한·일 교류의 오랜 역사를 상징하는 증거물들”이라고 소개했다.
■ 당대의 문장가, 난세의 승병장…사명대사는 누구
「 1544년(중종 39) 현재 경상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일본에서는 송운대사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당대의 문장가로부터 사서경전을 수학하는 등 문재를 떨치다가 1558년에 어머니가, 이듬해 아버지가 별세하자 김천 직지사로 출가했다. 18세 되던 1561년(명종 16)에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당대의 쟁쟁한 문사들과 교유했다. 1575년(선조 8) 묘향산으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제자가 됐고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자 스승 휴정을 도와 승병을 일으켰다. 전란 중에 막후 외교사절로 활약한 뒤 64세에 세속의 일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내려갔다가 1610년(광해군 2) 67세로 법문했다.
」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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