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주의 물건] #02. 이 버버리가 니 버버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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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이 버버리가 니 버버리냐
날씨가 이상하다. 심상치 않다. 입추와 백로, 한로, 그리고 처서와 추분까지 지났으니 절기로는 이번 여름이 끝난 게 확실한데, 가을은 아직 올 듯 안 올 듯 미적거린다. 여름은 떠나려다 말고 뭉그적뭉그적. 애꿎은 태풍이 릴레이 주자처럼 줄지어 온다. 지구가 왜 이러나, 이러다 가을은 건너뛰고 겨울이 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도 옷장 속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트렌치 코트를 의식하는 것일 테지. 지금의 나처럼.
트렌치 코트는 태생적으로 날씨와 나란히 놓이는 물건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야전에서 몸을 숨기면서 적과 싸우기 위해 방어선을 따라 판 구덩이. trench는 참호를 뜻한다) 속에서 영국군 장교가 입던 우비에서 유래한 이 옷은 혹독한 날씨를 견디기 위해 탄생했다. 요즘 우리가 입는 트렌치 코트의 형태는 토머스 버버리가 개버딘 소재를 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무겁고 관리하기 힘들었던 기존의 울 방수 원단이나 고무 소재의 레인코트를 보완하기 위해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 스목프록(18세기~19세기에 영국의 농부나 마부, 양치기들이 궂은 날에 입던 코트)을 발견하게 되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방수 처리한 면사를 직조한 후 다시 한 번 방수 처리한 소재인 개버딘을 완성한다.



처음에는 단추가 없이 벨트로 여미는 단순한 우비 형태였던 트렌치코트는 전쟁이 진행되면서 점차 진화했다. 수류탄이나 칼, 탄약통 등을 부착할 수 있는 알파벳 D 모양의 고리, 장총의 개머리판에 옷이 마모되는 것을 막기 위한 오른쪽 가슴의 건 패치, 활동하기 편한 래글런 소매, 그리고 바람을 막기 위한 손목 벨트까지. 전쟁에서 필요해 만들어진 디테일들은 사라지지 않고 요즘의 트렌치코트에서도 발견된다.
군인들의 옷이었던 트렌치코트를 민간인들이 입게 된 건 2차 세계대전 이 후의 일이다. 전쟁이 모두 끝난 뒤 기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던 군인들의 머릿속에는 작은 바람 하나가 불쑥 솟아 맴돌았다. ‘이 옷을 계속 입고 싶다!’ 그것은 다시 찾아온 평화를 기뻐하는 물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의 페로몬을 풍기기에 마침맞은 물건, 게다가 실용적이기까지 한 물건이었다. 장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트렌치코트를 벗지 않았고, 그들의 옷은 곧 대중의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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