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은희의 1994년, 무너진 건 성수대교만이 아니었다

나원정 2019. 8. 2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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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로 주목받는 김보라 감독
유년 경험 녹인 신인감독 데뷔작
해외서도 공감 .. 영화제 25관왕
제인 캠피온 "놀라울 정도로 섬세"
‘벌새’에서 은희(가운데)는 소중했던 사람을 추모하며 성수대교를 바라본다. 이런 내밀한 순간이 모여 굵직한 시대상을 그려낸다. [사진 엣나인필름]
1994년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신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 세계 영화계에서 25개의 상을 휩쓸고 국내 관객과 만날 채비를 마쳤다. 29일 개봉하는 김보라(38) 감독의 ‘벌새’ 얘기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의 호평과 함께 넷팩상을 받은 이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에서도 수상한 데 이어 올해 뉴욕 트라이베카영화제에선 3관왕(국제경쟁대상·여우주연상·촬영상)을 기록했다. 영화 ‘피아노’의 제인 캠피온 감독이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며 매우 성숙하다”고 한 평가도 화제다. 강남 대치동 떡집 막내딸이었던 감독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중학생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먼저 큰 찬사를 받은 것이다. 1994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엔 성수대교 붕괴사건도 등장한다.

최근 중앙일보와 만난 감독은 이 영화를 가리켜 “1994년이란 시대의 공기 안에서 펼쳐진 중학교 1학년생 은희(박지후)의 감정적 지형도”라 소개했다. “제 삶에서 영화적으로 할 얘기가 많은 시기가 1994년 중학생 시절이었다”는 그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성수대교 붕괴가 떠올랐다. 충격적이고 가슴 아팠던 이 사건의 이미지가 열네 살 제 마음속 관계의 붕괴, 학교 시스템의 붕괴와도 연결됐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서울 대치동 떡집 막내딸인 은희는 집에서는 가부장적 분위기에, 학교에선 ‘날라리’란 꼬리표에 숨 막힌다. 첫사랑을 하고, 눈만 마주쳐도 깔깔대던 단짝과 절교할 듯 싸우기도 하는 소소한 일상사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 크게 흔들린다. 1초에 90번 날갯짓을 하는 작은 새 벌새처럼 작은 순간들이 촘촘히 쌓여 시대의 큰 풍경을 이룬다.

김보라 감독

Q : 해외에서도 “내 이야기 같다”는 호평이 많았다고.
A : “유년시절의 감정에 공감하고 시적인 분위기를 좋아해 주셨다. 성수대교 붕괴는 관객들이 각국 재난으로 치환해서 해석했다. 이탈리아는 지난해 제노바 다리가 무너졌고, 쓰나미·지진이 많은 일본의 어떤 관객은 울면서 자기 나라 재난을 떠올렸다. 단순히 여중생의 귀여운 성장담이 아니라 자유롭고 싶은 한 인간의 의지, 살아가며 ‘관계’를 통해 자신의 우주를 확장해 가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주제로 봐주어서 반가웠다.”

Q : 8년 전 단편 ‘리코더 시험’에서도 ‘은희’라는 방앗간 집 아홉 살 막내딸이 리코더 시험을 잘 봐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A : “연결된 이야기 맞다. 엄마가 ‘떡집 좀 그만 우려먹으라’ 하시더라. (웃음) 중학생 시기는 ‘다 컸다’ ‘서울대 가라’는 등 사회적 압박이 시작되는 때다. 내가 살았던 대치동에선 끊임없이 잘 사는 아이, 못사는 아이를 나누고 서로의 제품 브랜드로 비교해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렸다. 그런 내 유년기가 녹아있지만, 보편적인 지점을 건드리기 위해 ‘나를 빼는’ 과정을 거듭했다.”
김 감독은 “구체적인 은희의 이야기가 나만이 아니라 모두의 기억과 현재를 관통하길 바랐다”며 “이를 위해 시나리오를 영문 번역까지 해 철저한 모니터링을 거쳤다”고 말했다. 아시아·유럽·미국 친구들, 연령대도 중학생부터 60대 후반 교수까지 다양한 지인들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의견을 들으며 수정해나갔다. 편집 과정에서도 영화 속 160여개 장면을 그림카드로 만들어 전후 순서를 바꾸며 새롭게 파생되는 의미와 리듬을 세밀하게 고민했다. 이렇게 편집에만 열 달을 매달렸다.

Q : 2시간 넘는 상영시간 내내 마음을 졸이며 봤다.
A : “반가운 반응이다. 일상을 그리는데 재난이 떠오르길 의도했다. 가족의 식사장면조차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으로. 재난은 일상에서 일어나지 않나. 어떻게 다리가 무너질 줄 알았겠나. 서울올림픽 이후 뭐든 빨리 짓고 성장하면서 모두의 마음에 구멍이 생겼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몇 년 후엔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영화는 시나리오 초고를 2013년 완성한 뒤 개봉까지 5년이 걸렸다. 동국대 영화과를 거쳐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 대학원에서 수학한 그는 대학에서 강의하고 영화진흥위원회·선댄스영화제 등에서 제작지원을 따내며 3억이란 제작비를 모았다.

“이 영화를 너무 사랑해서 혼자 너무 치열한 것 같아 다른 제작진한테도 항상 조금 민망했다”는 그는 “예산도 적은데 왜 현대물을 하지 않고 과거 시대구현까지 하느냔 지적도 들었지만, 단편 ‘리코더 시험’ 때 직접 발품 팔아 1988년을 구현했던 경험이 큰 힘이 됐다”고 돌이켰다.

이번 개봉에 맞춰 원래 세 시간 넘는 분량이던 오리지널 시나리오집도 나온다. 이 책에 에세이를 수록한 그래픽노블 작가 엘리슨 벡델(영화 성평등 테스트 ‘벡델테스트’ 창시자)은 ‘벌새’를 “(영화에서 자주 소외돼온) 소녀의 삶이자, 온전한 한 인간에 대한 대서사시”라고 격찬했다.

차기작에 대해 김 감독은 “‘벌새’가 은희의 눈으로 본 서사시였듯, 여성의 눈으로 개인의 역사와 사회 맥락을 다룬 전쟁영화·SF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여성은 할 수 없다고 박아둔 남성 중심적이고 큰 자본이 드는 장르들이죠. 하지만 전쟁은 스펙터클만이 아니거든요. 전쟁으로 인한 마음의 폐허를 그려보고 싶습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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