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켜진 TV 같은 대학생활, 여길 알고 달라졌다

박승규 2019. 8. 5.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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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서부 종단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에세이⑥-1] 4300km 트레킹 도전기

[오마이뉴스 글:박승규, 편집:최은경]

미국 3대 트레일 중 가장 길고 험하다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하 피시티) 4300km. 미국 LA 문화단체 '컬쳐앤소사이티(대표 줄리엔 정)' 기획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 한국 하이커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 기자말

6월 어느날 후덥지근한 강의실이다. 솔솔 부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교수의 강의를 듣는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무엇인가, 하얀 펜으로 칠판이 도배된다. 나는 기계처럼 그 말들을 노트에 옮긴다. 강단은 혼자 켜져 있는 텔레비전 같다. 뻔한 스토리의 TV 프로그램 보듯 무료하다.
 
처음 공대에 입학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군대를 전역한 뒤 관광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여행을 통해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달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강의실 속 여행은 지루했다. 시간 낭비 같았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할까?'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까?'

해답 없는 질문에도 지쳐 있었다. 다만, 평범하게 살고 싶지는 않을 뿐이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세상 틀에 갇혀,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 출발 3일차,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웠다. 발바닥 전체에 물집이 나기 시작한 시점, 적응하기 전이라 그런지 뭔가 깔끔(?) 해보인다.
ⓒ 박승규
  
듣도 보도 못한 숫자, '4300'
 
그때쯤이다. 도보여행가 손성일 대장이 내가 살고 있는 충남 공주에 왔다고 연락이 왔다. 손 대장은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 이사장으로 국내 도보 여행길을 만들고 부산에서 유럽으로 이어지는 월드 트레일을 개척중이었다. 4년 전 공주에서 서울까지 210km 도보여행을 함께 한 인연이 있었다.
 
작은 맥줏집에서 손 대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는 남자 두 명이 더 있었다. 손 대장은 자신이 개척 중인 트레일 충남 구간을 보수하러 온 하이커라고 그들을 소개했다. 미국 서부 '4300km'를 종단한 하이커라고 말했다.
 
'4300km?'
 
순간 숫자를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서울과 부산 왕복 5번 거리를 사람이 맨발로 걸었다고? 엄청난 거리에 망치로 머리를 맞는 느낌이었다. 멕시코 국경지대인 캠포에서 캐나다 국경지대인 매닝파크까지 4300km를 완주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아래 피시티) 하이커 김광수, 김희남씨였다.
 
그들은 새벽 산에서 일어나 남미식 전병인 토르티야를 먹으며 하루에 30~40km를 걸었다고 했다. 설산은 고통스럽도록 추웠지만 아름다웠다며 에피소드를 풀어놓았다. 사실 어느 정도 강도인지 상상조차 안 갔다. 하지만 파노라마처럼 뭔가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몸을 의자 뒤로 젖혀 수줍게 미소지으며 말하는 하이커들의 모습까지 슬로비디오처럼 보였다.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걸어 돌아가는 길 10분. 세상이 달라 보였다. 매일 같이 지나던 길이었지만 공기 냄새와 하늘 색깔이 달라 보였다. 심장이 뛰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빨리 집에 돌아가 피시티가 뭔지 검색해야지. 모든 것이 가슴 벅찼다.
 
▲ 출발 전날 장비 점검 바닥에 비닐을 깔고 그 위로 장비들이 하나 하나씩 모이기 까지 두달이 걸렸다. 백패킹 경험이 없기에 나름 꼼꼼하게 준비했지만 잡다한 것이 많다.
ⓒ 박승규
  
'쿨' 하던 엄마, 문 앞에서 펑펑 울다
 
난 배낭에 모든 짐을 메고 산행을 하는 백패킹을 해본 적이 없다. 산악용 스틱을 잡는 방법도 몰랐다. 먼저 한 일은 부모님 허락이었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시던 부모님 앞에 앉았다.
 
"어머니, 아버지, 저 4300km 미 서부 종주길 피시티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경험 한 번 제대로 해보고 싶습니다."
"4000, 300? 음… 그래, 하고 싶으면 뭐든 해봐."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아버지는 산을 좋아했고 아들이 뭔가 해보겠다고 말하는 것도 처음 들으셨다. 경비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아둔 돈 300만 원에다 부모님에게 400만 원을 지원받았다. 대학교 2학년까지 다니고 휴학을 했다.
 
피시티 완주자의 블로그를 보며 정보를 모았다. 실제로 걷는다는 상상을 하며 시뮬레이션했다. 어느새 집 거실에는 텐트와 침낭, 등산화, 휴대용 정수기, 삽 등 장비들이 쌓여갔다. 하루 마무리는 피시티 열풍을 일으킨 영화 <와일드>(Wild)를 보며 맥주를 마시는 것으로 끝났다.
 
출국날인 2년 전 4월 5일 새벽 5시. 주변은 어둡고 조용했다. 배낭에 장비를 구겨 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났다. 어머니도 일찍 일어나 내 옆에서 장비를 무심히 만지셨다. 난 20kg에 육박하는 배낭을 어깨에 들쳐 메고 현관문에 섰다. 그제야 어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지시더니 눈물을 흘리셨다.
 
"아들아, 이거 꼭 가야 하니?"
"금방 하고 돌아올게요, 전화만 받으세요!" 
 
가는 날이 장날, 첫날에 응급실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샌디에이고는 낮 기온이 20도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떨림과 설렘이 교차했다. 피시티 하이커를 돕고 있는 트레일 엔젤, 프로도와 스캇의 집에 갔다. 그들은 샌디에이고 공항에서 나를 마중나와 있었다. 미리 이메일로 연락을 해 둔 덕택이었다.
 
집 안은 장관이었다. 하이커들이 풀어 놓은 배낭과 장비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다들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들이 피시티 하이커구나. 왠지 모를 동료애가 생겼다. 인터넷 번역기를 이용해 말도 붙이고 바디랭귀지를 써가며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해가 지자 스캇과 프로도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옆에서 칼을 들고 아스파라거스를 다듬었다. 그런데 그때, 칼이 왼쪽 네 번째 손가락 끝을 스쳤다. 섬뜩한 느낌. 피가 주르르 부엌 바닥에 흘러내렸다. 당황했다. 분위기를 망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에 혼자 화장실에 빨리 들어갔다.

피가 멈추지 않았다. 말도 안 통하고 당황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프로도가 바닥에 떨어진 피를 발견하고 따라와 상태를 물었다. 결국 응급 치료 시설에 가서 120달러 정도를 내고 상처를 봉합했다.
 
▲ 케네디 메도우즈 입성!  이 곳에 도착했다는 것은 나름 적응을 마쳤다는 의미를 가진다. 900km 이상 하이킹을 하여 도착했기 때문에 다들 자연인(?)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균고도 3000m 이상 되는 시에라 산맥을 앞둔 시점이기도 하다.
ⓒ 박승규
  
언어장벽으로 인한  외로움
 
그때부터 자신감이 확 떨어졌다. 숙소에 돌아오니 하이커들은 서로 웃고 놀고 있었는데 왠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내가 낙오자 같았다. 혼자 방구석에 가서 한국 친구들에게 연락하며 마음을 달랬다. 밤이 되자 베인 상처의 통증은 더 심했다. 부모님께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4월 7일 오전 6시, 피시티 시작점 캠포로 향했다. 주변은 콘크리트 건물이 즐비한 도시에서 황색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해가 떠올랐다. 출발점인 캠포 모뉴먼트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세계 각지에서 온 하이커들은 각자 인증샷을 찍고 걷기 시작했다. 다 같이 모여 파이팅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함께 걸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동양인은 혼자. 말없이 걸어야 했다.
 
출발 후 사흘이 지나자 발바닥 전체에 물집이 잡혔다. 양 손에 잡은 스틱을 목발처럼 짚으며 한 발 한 발 신음하며 걸었다. 하루 30km 걷기는 포기하고 20km를 겨우 걸었다.
 
▲ 세상에 혼자 있는 기분. 출발 후 2주까지 물집이 나기 시작하면서 운행거리가 25km 정도로 줄어들어 남들보다 일찍 텐트를 치고 마무리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매 저녁 항상 혼자서 밤을 맞이했다. 혹독하게 적응을 했다.
ⓒ 박승규
 
하루 종일 절룩거리며 걸었다. 하지만 대화하며 밥 먹을 친구 한 명 없었다. 찢어질 듯 아픈 발바닥과 먼지투성이 새카만 발만 보였다. 순간 눈물이 홍수가 난 듯 발등에 떨어졌다. 여긴 어딘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답답함에 화가 치밀었다. 온갖 욕을 하늘에 해댔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외로움이 더 힘들었다. 휴대전화에 남아있는 10장 남짓한 고향 사진을 보며 외로움을 달랬다. 혼잣말을 했다. 할 수 있다. 이겨낼 수 있다. 오로지 가야할 곳만 바라봤다.
 
하이캉 한 달쯤 지나자 발바닥 전체에 잡힌 물집이 갈아엎고 새살이 났다. 한 달 동안 홀로 900km를 걸었다. 몸이 적응하니 마음도 편해졌다. 외로움도 적응됐다.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사색을 하며 일기를 썼다. 나무와 대화하고 도마뱀과 인사를 했다. 푸념이 사라졌다. 혼자 있기 달인이 돼 갔다. 어지간한 사건에 감정이 동요하지 않았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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