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손수호] 폰트 분쟁이 상징하는 저작권 환경의 변화

2019. 7. 23.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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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던 글자가 칼날로 변신, 만인의 것과 개인의 몫은 달라.. 전환기에 걸맞은 균형추 필요

학생들이 리포트를 이메일로 제출할 때마다 아찔한 경험을 한다. 사고는 학생들이 시각적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특별한 글꼴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혹시 교수님 컴터로 읽지 못할 수 있으니 별도의 글꼴 파일을 첨부합니다.” 이때 파일을 내려받아 리포트를 읽거나, 나중에 그 글꼴이 예쁘다 싶어 다른 문서작업을 하는 순간 저작권 위반의 함정에 빠진다. 침묵의 글자가 칼날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여러 곳에서 글꼴을 둘러싼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권리자와 이용자의 틈새가 가장 벌어진 현장은 학교다. 지난 상반기에는 학교 컴퓨터에 깔린 글꼴을 가정통신문 등에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법무법인의 내용증명이 쇄도했다. 폰트 도안과 폰트 프로그램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모르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 방학이 되자마자 저작권 연수가 붐을 이루는데, 현장에서 만난 많은 선생님들은 권리자들의 주장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물론 권리자들의 기획소송을 통한 과잉대응은 비판의 소지가 크다. 소송을 비즈니스에 악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폰트 프로그램이 법원에서 권리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도안 형태의 글자체는 스스로 지닌 고유한 미감보다 문자의 실용성이 앞선다는 이유로 미술저작물이 되지 못했지만 글자체를 구현하기 위해 디지털화한 파일은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보호받는다. 교육 목적이라는 숭고한 가치도 ‘수업’에 국한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강의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기업들이 가장 선호하는 영문 폰트 헬베티카를 아는가. 3M, Post-it, BMW, Jeep 등에서 볼 수 있는 그 평범하면서도 유려한 글자체다. 그 서체를 개발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갔겠나. 한때 시청률 1위였던 ‘무한도전’ 로고도 국내 기업이 만든 유료 폰트를 사용했다. 그 글꼴이 예능 프로의 성격을 제대로 나타내는 데 도움을 주었으면 대가를 지불해야 마땅하다. 글자는 만인의 것이지만 글꼴은 개발자가 있다.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다. 권리관계가 애매한 글자체를 사용 범위를 따져가며 아슬아슬하게 사용하기보다 공짜 서체를 쓰면 된다. 사이트를 뒤지면 무료 글꼴이 널려 있다. 저작권위원회의 공유마당에 가면 김훈체, 박경리체 등 저명 문인의 폰트와 더불어 은영체와 같은 예쁜 손글씨도 있다. 나눔체, 청소년체, 한강남산체 등 공공기관이 배포한 것도 좋고, 포천막걸리체처럼 여러 지방자치단체의 정서를 담은 서체도 많다. 디자인을 전문하는 기업이 아니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서체뿐 아니라 이미지나 음악, 영상도 마찬가지다.

폰트 분쟁에서 보듯 오늘날 저작권은 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꿈틀대고 있다. 가수 조영남의 대작 사건에서는 창작자를 보는 법원의 입장이 판이해 같은 사법권의 영역에 있나 의심스러울 정도다. 1심은 “다른 화가가 그렸다는 사실을 고지하지 않고 판매해 피해자들을 속였다”며 유죄를 선고한 반면, 2심은 “대작화가는 조영남의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술보조일 뿐”이라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지금까지 해석론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겨온 ‘아이디어-표현 2분법’이 무너졌다. 그 빈자리에 ‘기획과 책임’ 혹은 ‘창의적 기획’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성돼야 현대미술이 포섭된다.

규범에 대한 과도한 의지는 남소(濫訴)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야구장 응원가를 둘러싼 논란이다. 자신들의 노래를 임의로 바꿔 불렀다며 프로야구 구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은 “음악이 응원가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생긴 통상적이고 필수적인 변경에 불과하다”며 침해를 부인했다. 이 소송으로 인해 그 뜨겁던 야구장 문화를 위축하게 만든 동시에 기존의 저작재산권 행사마저 봉쇄된 형국이라 민망하기 그지없다.

최근에 핫이슈로 대두되고 있는 공공대출권도 우려스럽다. 도서관 대출로 인해 줄어든 저작자의 판매분을 보상금으로 메워주자는 취지인데, 이는 책을 나눠 읽는 도서관의 존재이유를 뿌리부터 되묻게 한다. 이 제도가 도입된다면 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놓고 첨예한 공방이 벌어질 것이다. 저작권은 이렇듯 규범과 시장, 기술의 영역을 통틀어 문명사적 전환기의 통찰과 혜안을 요구하고 있다. 새로운 추(錐)가 마련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손수호(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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