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미술 거리를 걷다] 6. 궁궐도 속 행렬이 소실점을 향해..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2019. 7. 1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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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찾은 서양화가 휴버트 보스, 고종 초상화를 그리다

개항이 가져온 큰 변화는 교류다. 조선의 빗장을 걸어 잠궜던 쇄국의 시기에 서양화는 유일하게 외부 문화가 유입되는 루트였던 중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1882년부터 서양과 차례로 수교조약을 맺음에 따라 서양화는 조선을 직접 방문하고, 체류하던 서양인 화가들에 의해 직접 수용되는 이국의 미술의 됐다. 서양인 화가가 그린 왕과 고관대작의 초상화는 그 자체로 신선한 충격이며 놀라운 볼거리였다. 다만 이를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은 왕실과 극소수 특권층에 한정됐다.

휴버트 보스 , <고종황제 초상>, 1898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898년경 영국 왕립예술가협회 회원이던 초상화가 휴버트 보스가 내한해 고종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 유명하다. 이때 그린 초상화는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 전시되기도 했다. 보스는 광화문의 풍경을 그린 유화도 남겼다. 물론 민간에서도 법어학교(프랑스학교)에서 도예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서양화를 그려보였고, 이때의 놀라움이 고희동을 최초의 서양화 화가로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양화를 구경하는 것은 극소수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휴버트 보스, < 서울 풍경>, 31x68cm, 1899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그러므로 서양화의 영향이 서구의 문화를 접하는 첨병인 궁중 회화에서 먼저 표출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개항과 더불어 접한 서구 미술의 문법, 즉 투시도법과 원근법은 궁중 기록화에 바로 적용이 되어 나타난다.

<왕세자두후평복진하계병>, 1879년, 비단에 채색, 10폭 병풍, 170x383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기 전인 1879년(고종 16), 왕세자 순종이 천연두를 앓던 중 극적으로 회복하자 이를 기념하여 오위도총부의 관리들이 제작한 병풍인 〈왕세자두후평복진하계병王世子痘候平復陳賀契屛〉을 보자. 천연두의 완쾌와 관련한 장면을 그리기가 애매한 탓인지, 왕세자와 관련된 그림이니 책봉례(세자로 책봉한다는 임명서를 수여하는 의식)와 진하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신하들이 임금에게 나아가 축하하는 일)장면을 선정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투시도법과는 전혀 무관한 전통적인 의궤그림과 같은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왕세자두후평복진하계병> 부분.

궁궐도에 반영된 서양화의 투시원근법

그런데 1901년(광무 5) 고종의 5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황태자가 올린 진연(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베풀된 잔치) 장면을 그린 병풍 그림인 〈고종신축진연도병高宗辛丑進宴圖屛〉에서는 명확히 투시도법이 반영이 되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진연 장면, 정면에서 본 궁전 등 다시점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도열한 신하들과 악공들의 줄이 뒤쪽으로 갈수록 소실점을 향해 폭이 좁아진다. 이는 전형적인 투시도법으로 이전의 궁중 기록화에서는 보이지 않던 방식이다. 궁중 기록화를 제작한 화원들이 서양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보여준다. 고종이 서양인 화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허용할 정도로 서양식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이런 기록화 제작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했음에 틀림이 없다. 이 그림에서는 또 고종의 어좌와 휘장 등의 의물은 모두 황색으로 채색해 황제국으로서의 위상을 표시하였다. 태극기의 등장과 함께 군졸들도 신식 군복 차림으로 바뀌어 있는 게 눈에 띈다.

<고종신축진연도병>, 1901년, 비단에 채색, 8폭병풍, 172x388cm, 연세대학교박물관 소장

한 해 뒤인, 1902년에 제작된 〈고종임인진연도병高宗壬寅進宴圖屛〉에는 투시도법이 더 뚜렷하다. 이 병풍은 황태자가 고종을 위해 올렸다. 고종이 국가 원로기구인 기로소에 가입한 의식 장면과 등극 40년을 경축하는 잔치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인물들의 크기는 가까이에 있거나 멀리 있거나 여전히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기에 투시도법이 어색하게 적용되어 있긴 하다. 그럼에도 인물들이 도열한 세로줄이 급격하게 소실점을 향해 좁아지는 등 1년 전에 그려진 그림보다 투시도법이 과감하게 적용되어 있다. 고종의 어진도 유화가 아닌 전통 안료로 그려진 것인데도 얼굴과 의복은 명암법이 뚜렷해진다.

<고종임인진연도병>, 1902년, 비단에 채색, 10폭병풍, 화면 각폭 167x55cm, 병풍 각폭 199x62cm, 국립국악원 소장

명암법은 궁중 장식 그림에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한궁도漢宮圖〉가 그런 예이다. 한궁도는 중국 궁궐을 상상하여 그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태평성대에 대한 염원을 담은 궁궐 누각 그림은 19세기 초부터 반복적으로 그려진 주제이다. 총 6폭의 이 그림은 다채로운 채색의 전통 화원화의 기법을 쓰면서도 입체감 있는 표현, 한곳으로 시선을 모으는 일점투시도법 등 서양화법과 절충된 그림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 궁중 회화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다.

<고종임인진연도> 부분.

여염집에 불어온 청나라 해상화파 그림 유행

왕실이 아닌 여염집에서 체감할 수 있는 보다 광범위한 외풍은 청나라에서 불어왔다. 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개항한 상하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 상하이는 동양 최대의 근대적 상공업 도시로 성장하며 동시에 중국 제일의 서화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한궁도漢宮圖>, 19세기-20세기 초, 비단에 채색, 6폭병풍, 78x267.6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조선에서도 1876년 마침내 외부에 문호를 연 뒤 고종과 주변 관료들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해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조정의 이런 입장은 청과 서구의 다양한 물품이 확대 수입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왕실이 나서서 화려한 사치품은 물론이려니와 상하이에서 발간된 각종 서적과 화보, 시전지 등 문방구를 구입하였다. 상하이에서 발간된 화보와 그림이 그려진 편지지인 시전지 그림은 근대 한국 화단에 중국 ‘해상화파海上畵派’의 감각적인 화풍을 전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상업 자본의 움직임을 따라 1820년경부터 상하이로 물려들기 시작한 화가들은 1840년대 본격적인 유파를 형성했는데, 700명에 달하는 이들 화가들을 상하이화파, 해상화파, 혹은 해파라고 부른다. ‘해상화파’의 흥성을 주도했던 인물로는 허곡虛谷(1824~1896)·조지겸趙之謙(1829~1884)·임이任頤(1840~1896)·오창석吳昌碩(1844~1927) 등이 있다.

해상화파가 즐겨 그린 그림은 산수화 인물화도 있지만 동양식 정물화인 기명절지화, 꽃과 새를 그린 화조화, 동물을 그린 영모화도 있다. 채색으로 아주 감각적이고 장식성이 있게 그려서 한마디로 대중이 좋아하는 세속화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그림 스타일은 서해를 건너 한국에도 건너와 당시 미술 시장의 주요 소비층으로 부상한 부유층의 감각과 맞아떨어지며 유행하게 된다.

그런데 개항기에는 서화시장에서 청나라의 영향이 클 수밖에 없었던 정치사회적인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사실,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수호조약 이후 ‘조공’을 매개로 한 조선과 청의 교역은 축소됐다. 반면, 일본은 조선의 경제적 이권을 찬탈하며 빠르게 교역을 확대해 갔다. 가만히 있을 청나라가 아니었다. 기회를 노리던 청은 1882년 6월 일어난 임오군란을 빌미 삼아 한양에 자국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같은 해 8월 조선은 청나라와 맺은 최초의 통상 규정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했다.

1883년 3월 리훙장李鴻章의 추천으로 파견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면서 청나라는 조선과의 교역에서 일본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청의 상인들은 이때를 기화로 서울의 광통교에 거주하며 본격적인 상업 활동을 벌였고, 그 결과 광화문과 남대문 일대의 청나라 상권이 확대되었다. 광통교는 청계천의 다리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시대에는 의관 역관 화원 등 중인층이 대대로 살던 곳이 청계천 일대다. 이곳에 청나라 상인이 대규모 상권을 형성하면서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청나라 해상화파 화풍이 유입되고, 조선인의 청나라 그림 수요가 촉발되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개화기에 화명을 떨친 장승업이 그림을 제작하던 화실인 ‘육교화방六橋畫房’이 광통교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그런 면에서 흥미롭다.

특히 1883년 11월 인천과 상하이를 직항으로 연결하는 정기노선이 설치되면서 양국 교역은 증대되었고 특히 상하이는 양국 교류의 핵심지로 부각되었다. 길이 뚫리듯 뱃길이 뚫리면 사람이 오가고 물자가 오가고 문화가 오가게 된다.
그렇게 해서 당시 동북아의 국제적인 화풍이라 할 수 있는 청나라의 새로운 화풍, 즉 신흥 도시 상하이를 중심으로 발달한 감각적이면서 현실적인 해상화파 화풍은 자연스럽게 유입이 되었다.

더욱이 청의 영향력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판세가 바뀔 때까지는 지속이 되었다. 미술시장도 청의 영향이 지속될 수 있는 구조 아래 있었다.

상하이와 마찬가지로 서울은 대외 개방과 함께 더욱 상업도시화 되었다. 고관대작은 물론, 부호와 대지주,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한 중인층이 주요 미술 소비계층으로 대두되고, 직업 화가들은 이들 수요층의 미감을 고려한 화풍 제작에 나선 것이다.

그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 회를 기대하시라.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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