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 만난 인연, 이정도면 기적
[오마이뉴스 최늘샘 기자]
지중해를 건너서
아라비아, 아프리카, 유럽, 세 대륙 사이에 놓인 4000킬로미터 길이의 지중해는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를 흐르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대서양과 만난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헤라의 미움을 받은 헤라클레스가 모험을 떠날 때 맨손으로 바위를 부수고 대서양으로 나아간 길이라고 한다. 스페인 알헤시라스 항구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반이면 모로코 탕헤르에 닿는다. 아프리카와 유럽을 오가는 대부분의 여행자는 이 항로를 이용한다.
그라나다에서 알헤시라스로 가는 차비를 아끼기 위해서 나는 그라나다 근처 모트릴 항구에서 모로코 나도르로 가는 페리를 탔다. 밤에 출발해 이른 아침 도착하는 뱃길이라 하루 숙박비도 아낄 수 있었다. 뱃삯은 36유로(한화 47000원), 거리가 훨씬 짧은 알헤시라스 항로와 같은 가격이었다.
밤 열한 시 출발 예정이던 배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출항했다. 터미널 직원들은 흔한 일이라는듯 별다른 사과도 설명도 하지 않았다. 거대한 페리에 일반 승객은 나를 포함해 다섯 명밖에 없고, 대부분은 화물차를 배에 싣고 이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좌석에서 자는 불편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인터넷의 정보와 달리 아늑한 침대방이 제공되었다.
지중해에서 바다와 별을 보며 하룻밤을 보내겠다는 낭만을 상상했으나, 갑판 위는 칠흑의 어둠이고 추워서 오래 서 있을 수도 없었다. 푹 자고 일어나니 곧 모로코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바다 건너로 펼쳐진 육지는, 내 생에 처음 보는 아프리카였다.
감개가 무량했다. 모로코 나도르 옆에는 멜리야라는 도시가 있는데, 뜬금없게도 그 땅은 1497년부터 지금까지 스페인의 소유다. 스페인은 모로코 지역에 멜리야 뿐 아니라 세우타와 카나리아 제도를 영토로 가지고 있다. 식민지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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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모트릴에서 밤 늦게 출발한 배는 다음날 이른 아침 모로코 나도르에 닿았다. 바다 건너 보이는 육지가 모로코이다. |
ⓒ 최늘샘 |
나도르 항구에 도착했다. 화물차들부터 속속 빠져나가고 내가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렸다. 동양인 여행자가 드문 항구라 승객들 중 나 혼자만 출입국 관리소까지 가야 했다. 네 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의견을 나누며 남한 사람의 비자 필요 여부를 확인한 후에야 겨우 모로코 입국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아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크고 인구가 많은 대륙 아프리카. 남북 8000킬로미터, 동서 7360킬로미터, 세계 육지의 20퍼센트에 달하는 거대한 땅이다. 인구의 15퍼센트인 11억 명이 살고 있다. 현생 인류의 발상지로 추정되며 공인된 언어만 1000가지로, 엄청나게 다양한 종족과 상황이 존재하는 지역이다. 크게 사하라 사막 이남과 이북으로 구분하는데, 인종, 종교, 경제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등 이슬람교 국가들을 '마그레브 Maghreb'라고 통칭하는데, 아랍어로 '동방'을 뜻하는 '마시리크 Mashrig'에 대한 '서방'을 의미한다. 마시리크는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이 살아온 곳인 반면, 마그레브 지역은 아랍 왕국들의 오랜 침략과 지배에 의해 원주민 베르베르족이 아랍화한 지역이다.
여행 전에는 들어 본 적도 없은 지명들이다. 어렵고 헷갈리기도 하지만 흥미롭다. 내가 처음 만난 아프리카는, 흔히 미디어에서 보던 '아프리카'와는 차이가 있었다. 아프리카에는 대부분 까만 피부의 사람들이 사는 줄 알았는데, 모로코 북부 나도르 항구에서 기차역까지 걷는 동안 흑인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 수많은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 오롯이 아프리카의 다양한 현실을 만나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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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사블랑카 숙소에 붙어 있던 마그레브 연합 국가들의 국기들 |
ⓒ 최늘샘 |
올리브나무 사이의 아이들
아메리카 여행에서는 한 번도 기차를 타보지 못했다. 모로코 기차의 이등석 객실은 저렴하고 깔끔하고 옛스러워서, 놀이기구를 탈 때처럼 설?다. 기차에서 마주한 모로코 북부의 풍경은 황량하지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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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코의 시골 전경. 아무리 작은 동네라도 이슬람 사원은 꼭 있었다. |
ⓒ 최늘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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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코 시골의 양, 염소떼와 목동 |
ⓒ 최늘샘 |
책가방을 멘 초등학생들이 황량한 벌판과 논길을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저 조그맣고 야윈 다리로 족히 한 시간, 두 시간은 걸어야 학교까지, 다시 집까지 오갈 수 있으리라. 친구의 숙제 공책을 가져다 주려고 낯선 마을을 찾아헤매는 아이의 하루를 담은 이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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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코 농촌의 초등학생들 |
ⓒ 최늘샘 |
중부에 자리한 도시 페스는 모로코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곳이다. 서기 789년 건설을 시작해 810년 이드리스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859년 세워진 알카위라인 대학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대학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한다.
모로코 주요 도시에 남아있는, 중세에 형성된 도심을 '메디나'라고 부른다. 높은 성벽 안에 수많은 골목과 사원, 상점과 집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페스의 메디나는 중세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고, 8천 개가 넘는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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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천 개가 넘는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페스의 메디나 전경. 사원과 수많은 위성 안테나들이 보인다 |
ⓒ 최늘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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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스 골목의 모습 |
ⓒ 최늘샘 |
"늘샘. 모로코 도착해서 바로 페스로 가나? 2010년에 예슬이랑 엄마도 페스에 갔는데, 거기 성문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저렴한 호스텔 있다. 거기 일하는 청년이 참 친절했는데. 엄마 데리고 거리 구경도 시켜 주고, 자기 엄마 집에도 데려가서 밥도 먹고 그랬다. 거기 찾아가 봐라."
"아이고, 페스가 무슨 한국 소도시도 아니고... 백만 명이나 사는 외국 대도시에 처음 가는 건데, 이름도 위치도 모르는 '성문 왼쪽 숙소'를 어떻게 찾아요, 참나... 9년이나 지났는데 다른 가게로 변했겠지요."
엄마 유귀자씨의 말을 웃어넘기며, 인터넷으로 최저가 숙소를 찾아서 스마트폰에 저장된 지도에 표시해 두었다. 페스 기차역에서 메디나까지는 시내버스가 없었다. 택시기사들의 호객을 뚫고 4킬로미터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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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스 광장의 사람들. 매일 해질녘이면 많은 모로코 사람들은 길가에 나와 이야기를 나눈다. |
ⓒ 최늘샘 |
"너 어디서 왔니? 호스텔 찾아? 여기로 와. 나는 호객꾼이 아니야. 우리 가족이 하는 호스텔이야."
보통은 '미안해요, 저는 예약한 곳이 있어요' 하고 가볍게 지나갈텐데, '성문 왼쪽 숙소'가 혹시나, 설마 이곳은 아닐까 하는 쏴한 느낌이 들었다.
"메이비, 비포, 마이 마더 앤 시스터 스테이 히어, 두 유 리멤버? 디스 포토. 아마 전에 내 엄마와 동생이 여기 머물렀던 것 같아. 너 혹시 기억나? 이 사진 좀 봐봐. 기억나?"
"아, 맞아, 맞아! 기억나. 어서 들어와!"
맞다고 맞장구를 쳤지만, 그는 숙소 주인이 아닌 호객하는 사람이었고, 페스는 수없이 많은 아시아 관광객이 오는 곳이므로 정말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반신반의 하며 휩쓸려 들어간 어두침침한 리셉션 한쪽 벽에는, 숙소에 묵어 간 여행자들의 사진이 한가득 붙어 있었다.
수십 장의 사진 중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동생과 어머니의 색바랜 사진 두 장. 무려 9년 전의 사진이다. 한양 바닥에서 김서방을 찾은 듯, 운동장에서 바늘을 찾은 듯, 기적을 만난 기분이었다. 백만 대도시에서 기어이 '성문 왼쪽 숙소'를 찾았다. 아니, 나는 전혀 찾을 생각도 없었는데, 하필 그때 성문을 지나던 숙소의 직원이 하필 그 순간 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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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스텔 리셉션에 전시된 여행자들의 사진을 보여주는 호스텔 관리인 무스타파 씨. 이 머나먼 타지의 숙소에 기적처럼, 9년 전 이곳에 머물렀던 어머니와 동생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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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메디나 골목길에서 마주친 꼬깔모자 할아버지가 마법을 부린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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