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아이 엠 쏘리(I am sorry).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냐"

김기정 2019. 3. 3. 14:0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홍콩 중심부에 설치된 '한국-홍콩(중국)-필리핀'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2017년 7월 홍콩의 한 시민단체가 설치했다. 인근엔 주홍콩 일본총영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김기정 기자
3‧1운동 100주년을 꼭 하루 앞둔 지난달 28일 홍콩에서 소녀상과 마주했다. 고백건대 작정하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닷새간의 휴가를 보내고 귀국 비행기를 타러 공항행 철도로 가는 길이었다. 그 길목에 한 낯익은 소녀가 앉아있었다.

소녀상은 2017년 7월 홍콩의 한 시민단체가 설치한 것이다. 한복 차림의 소녀 곁엔 옷차림이 조금 다른 두 소녀가 함께 앉아있다. 한국과 홍콩(중국), 필리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한 세 소녀는 홍콩 최고 번화가인 센트럴에서 국제금융센터로 이어지는 육교 위에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서울 명동쯤 되는 곳이다. 인근엔 주홍콩 일본총영사관이 있다.

구릿빛의 소녀들은 한결같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보는 이에겐 슬픔만 묻어났다. 이들 곁엔 메모판이 설치돼 있다. 세계 각국 언어로 적힌 메시지가 한가득하다.

홍콩 중심부에 설치된 '한국-홍콩(중국)-필리핀' 소녀상. 소녀상 옆 메모판엔 세계 각국 언어로 적힌 메시지가 가득하다. 김기정 기자
“일본 정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진심으로 사과해주세요. 평생 미안함을 가져주세요” “사과는 받는 사람이 그만이라고 할 때까지” “더 이상의 침묵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메시지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와 일본 정부의 사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자가 떠난 다음 날인 3‧1절 당일엔 홍콩과 선전, 광저우 교민들이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 앞에서 일본 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며 1시간 동안 침묵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이날 일본의 응답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사과 요구에 침묵하는 일본의 모습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는 게 일반적인 행동이었다.

최근엔 문희상 국회의장의 발언이 논란이 됐다. 문 의장은 지난달 8일 공개된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해 “한 마디면 된다. 일본을 대표하는 총리 혹은 나로서는 곧 퇴위하는 일왕이 (사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의장의 발언에 일본 정부는 벌떼처럼 일어나 반발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심각하게 부적절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상당히 유감”이란 입장을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한국 정부에 사죄와 발언 철회를 요구했다”고 말했고 고노 외무상은 “발언을 조심해야 한다” “무례하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되레 사과를 요구하는 비극이 또다시 이어진 것이다.

3일 전북 전주시 전주병원 장례식장 별관 특실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곽예남 할머니(94)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 [뉴스1]
이런 와중에 정작 사과를 받아야 할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2일엔 곽예남 할머니가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곽 할머니의 별세로 이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40명 중 생존자는 22명에 불과하다.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만든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주인공 나옥분(나문희 분) 할머니는 조롱을 일삼는 일본인들에게 “아이 엠 쏘리(I am sorry).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냐”고 일갈한다. 일본 정부의 사과가 늦어질수록 평생 상처로 얼룩진 할머니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길은 요원해질 뿐이다.

홍콩의 소녀들은 모두 노란 국화를 들고 있었다. 노란 국화의 꽃말은 ‘실망’이라고 한다.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에 소녀들이 실망을 거둬들일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소녀들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김기정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