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상류사회 진출한 쇼팽, 피아노 레슨 하며 돈 벌어

송동섭 2019. 3. 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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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13)
무도회에서 연주하는 쇼팽. 테오필 크비아코브스 그림, ‘쇼팽의 폴로네이드’의 일부. 포즈난 국립미술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파리에서 암울한 생활을 경험하다가 미국 행까지 결심했던 쇼팽이 폴란드 동포인 발렌틴 라지비우 공에게 이끌려 제임스 로스차일드 저택의 저녁 파티에 참석한 것은 그의 인생역전을 가져온 계기였다. (본 시리즈 10편 참조)

파리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불로뉴-비양꾸르에 자리 잡은 제임스의 저택은 넓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재력과 힘을 모두 가진 로스차일드 자작 가의 파티는 화려하기로 유명했다. 파티에는 당시 파리에서 내로라하는 귀족과 유력 정치인, 산업계· 금융계의 거물들이 참석했다.


쇼팽의 피아노 연주에 매료된 파티 참석자들
피아니스트로 소개된 쇼팽은 피아노 연주를 요청받았다. 큰 연주회장이 아니었으므로 박력의 부족은 문제 되지 않았다. 그의 우아한 연주는 저택의 거실에서 완벽하게 빛났다. 금방 파티 참석자들의 눈길은 그에게 몰렸다. 쇼팽은 자신의 무기인 깨끗한 복장과 귀족적 용모, 그리고 세련되고 정중한 태도로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특히 주인댁 베티 자작부인은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고, 많은 부인네도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남편들은 부인들이 관심을 주어도 시기하거나 우려하지 않았다. 쇼팽은 곱고 연약해 위험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티는 자신과 딸 샬롯의 피아노 레슨을 부탁했다.

쇼팽의 외모와 태도는 피아노 선생의 모범처럼 보였고, 로스차일드 가의 움직임은 다른 이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쇼팽에게 배우려는 귀족 가문의 부인과 딸들이 로스차일드 가의 뒤를 이었다. 파리의 상류사회에 알려진 쇼팽은 다른 여러 귀족의 파티와 살롱에도 초청이 이어졌다.

파리근교 불로뉴-비양꾸르의 로스차일드 저택. 제임스 로스차일드는 1817년 공원 같은 정원에 둘러싸인 이 저택을 사들여 크게 증축했다. 2차대전 중 독일군 사령부로 사용된 이 건물은 그때 입은 상흔을 가진 채 지금까지 폐허로 남아 있다. [사진 Wikimedia Commons(저자 Moonkik)]

쇼팽은 몇몇 폴란드 출신의 귀족 가정에서 레슨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 학생은 현지 귀족 집안으로 확대됐다. 최상위층 귀족 집안의 학생을 주로 상대했으므로 보수도 최고 수준이었다. 쇼팽은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파리를 이끄는 유명 인사들의 존경 받으며 설 수 있게 되었다.

폴란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 프랑스에서도 그 중심부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쇼팽의 편지는 긍지와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나는 대사들, 공작들 그리고 장관들이 있는 고위층 사이로 들어갔어.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왜냐면 난 특별히 한 게 없거든.”

쇼팽은 빈둥거리며 보낸 오전 시간을 레슨으로 채웠고 저녁 시간은 초대받은 파티와 살롱에 참석하기 바빴다. 경제적 사정이 달라지니 그의 씀씀이도 커졌다. 고급 마차를 마련했고 부유한 동네인 쇼세 당탱 거리에 아파트를 얻어 이사하였다.

음악계에서도 그의 위상은 확고해졌다. 유명 음악가 픽시스는 그에게 곡을 헌정했다. 실력 있는 파리 음악원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음악계에 이름이 높았던 칼크브레너, 모셸레스, 헤르츠의 학생까지 쇼팽에게 배우러 왔다. 쇼팽에게 레슨을 받으려는 사람은 쇼팽의 친한 친구에게 소개를 부탁해야만 했다.

경제적 안정과 함께 마음의 안정도 되찾았고 파리가 주는 많은 것 -자유로운 분위기, 음악가뿐만 아니라 문인·화가 등 유명인과의 교제, 최고의 오페라를 비롯한 훌륭한 공연 등- 을 진정 즐길 수 있게 됐다. 이제 파리는 그가 원하던 것을 주는 바로 그곳이 됐다.

파리의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인 이탈리아 극장 ‘Theatre Italien’의 1840년 내부 모습. 쇼팽은 이 극장에서 오페라를 즐겼다. 외진 라미의 그림을 모트랑이 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1833년 러시아는 폴란드인 망명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려 귀국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 쇼팽도 파리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서 새 여권을 발급받아 폴란드의 가족을 방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파리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바르샤바라는 유럽의 변두리 출신 청년의 파리 상경기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 가장 극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로스차일드와의 만남은 온 파리가 열광했던 쇼팽의 시대를 여는 문이었다.


로스차일드 가와 평생지기 된 쇼팽
로스차일드 가족과 쇼팽의 인연은 그의 평생을 두고 이어졌다. 쇼팽은 그들의 파티에 자주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연주회도 제임스의 저택에서 몇 번 열었다. 여름 휴가를 그 저택에서 보내기도 했고 말년에 런던으로 피신했을 때는 로스차일드 런던 가족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루이 필리프 왕과 제임스 로스차일드, 쇼팽. 이 세 사람의 황금기는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루이 필리프는 쇼팽이 파리에 도착하기 1년 전에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제임스와 손잡고 프랑스의 산업혁명을 가속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왕이 쫓겨났을 때 제임스 일가는 위기를 맞았다. 그때 쇼팽은 상드와 헤어지고 다 타버린 촛불처럼 희미해져 가는 삶을 애처롭게 부여잡고 있었다.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왕. 시민왕으로 불렸던 그는 1830년 7월의 시민 혁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 시절은 로스차일드 파리가족의 전성기 그리고 쇼팽의 파리시절과 거의 일치한다. Franz Xaver Winterhalter 그림. 1841. 베르사이유 궁전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쇼팽은 제자이기도 했던 제임스의 딸 샬롯에게 작품번호 64-2의 왈츠를 헌정했다. 이 곡은 밝고 가벼우면서도 우수 어린 감각적인 곡이다. 다음 편은 화려한 파리의 핑크빛 바람에 마음이 흔들렸던 쇼팽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송동섭 스톤월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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