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 논설위원이 간다] 아듀, 시련의 2018..그런데 아무도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이상언 2018. 12. 3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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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 점포 주방기구 사서 되파는
황학동 가게에도 손님 발길 끊겨
"현실을 모르는 정책이 불경기 불러,
대통령이 북한만큼 경제도 챙겨야"
내년 걱정에 시름 더 깊어진 상인들
자영업자 악몽의 해 이렇게 저문다


폐업 가게 물건 쌓인 황학동 중고 주방기구 거리

서울 중구 황학동 중고 주방기구 거리의 28일 오후. 물건이 쌓여 있지만 손님 발길은 끊겨 썰렁한 분위기다.
울분과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룬 이가 많았다.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이 그랬다. 폐업 신고 100만 건. 생업 포기가 이처럼 속출한 적이 없었다. 아르바이트생 줄이고, 직원 자르고, 가족 손을 빌렸다. 그래도 버틸 수 없어 끝내 가게 문을 닫았다. 월급 주는 걱정 없이 살아온, 몸으로 돈 버는 게 뭔지 모르는 위정자들을 원망했지만 돌려받은 것은 ‘그림의 떡’ 아니면 ‘언 발에 뿌린 오줌’ 같은 것이었다. 2018년, 자영업자들에겐 악몽의 해였다. 정말 꿈이라면 심호흡 한 번 하고 정신 차리면 될 일, 하지만 끔찍하게도 현실이었다. 게다가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더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해 희망을 말하고 덕담을 주고받는 것이 사치로 느껴지는, 망한 가게들의 잔해가 널려 있는 시장을 둘러봤다.

서울 중구 황학동의 중고 주방기구 거리. 식당과 커피숍에서 쓰인 물건 중 아직 제 수명을 다하지 않은 것들이 쌓여 있는 곳이다. 냉장고, 조리대, 반죽기, 고기 자르는 기구, 에스프레소 기계, 오븐 등 ‘먹는 장사’에 필요한 도구들은 다 있다. 중앙시장 후문 쪽 이면도로와 그 옆의 작은 골목에 줄지어 선 중고 주방기구 가게는 약 180개. 점포에 진열된 중고품과 그 가게 주인들이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물건으로 단박에 식당 1000개는 차릴 수 있다는 전설이 흐른다.

지난여름 신문과 방송은 이곳으로 문 닫은 가게 물건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망한 식당에서 나온, 멀쩡해 보이는 주방기구들이 트럭에 실려 헐값에 중고상에게 넘어가는 현장을 전했다. 중고품 거래업이 ‘미안한 호황’을 맞고 있다고 했다.

장화 속의 언 발을 따듯한 물로 녹이고 있는 주방기구 거리 상인의 모습이다. [김상선 기자]
정말 그럴까. 28일 오후 그곳에서 만난 상인들은 “뭘 모르고 하는 헛소리” “우리도 망하게 생겼다” 등으로 반응했다. “물건 매입 안 한 지 좀 됐어요. 아주 새것이 싸게 나오면 몰라도 3, 4년 쓴 물건은 우리도 이제 안 삽니다.” 대형 점포를 가진 T상점 주인 이모씨가 말했다. 그 옆 가게 S사의 변모 사장은 “지난달에 하나, 이번 달에 하나, 창고 두 개 다 정리했다. 창고 임대료 감당이 안 돼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상인들의 설명은 이렇다. 지난봄과 여름에 부쩍 중고 주방기구 매물이 늘었다. 문 닫은 가게가 많았다는 얘기다. 중간 수집상들이 상인들의 눈물 어린 물건들을 실어 날랐다. 새것과 다름없는 물건도 싸게 거래됐다. 좋은 물건 놓치기 싫은 게 상인 마음이다. ‘좀 지나면 경기가 풀리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높은 분들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물건은 점점 쌓여갔다. 창고가 가득 찼다. 그런데 사는 사람이 확 줄었다. 식당·커피숍 개업이 감소했고, 그 여파는 중고시장에까지 미쳤다. 형편이 어려워진 식당 주인들이 낡은 주방기구를 바꾸지 않고 고쳐 쓰니 새것 같은 헌것도 갈 곳을 잃었다. 더는 쌓아 둘 데도 없고, 중고 값도 계속 내려가 한숨만 나온다는 게 이곳 상인 공통의 하소연이다.

그 거리에서 4년째 장사해 온 오모씨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눴다. 약 70㎡(20평) 규모의 그의 가게 안에는 에스프레소 기계, 제빵기가 가득했다.

Q : 이 동네 사장님들 장사 안된다고 다들 아우성이네요. 진짜 그런가요.

A : “이미 문 닫은 곳 꽤 있어요. 매물로 내놓은 곳도 많고요. 이 업의 특성상 조용히 매수자를 찾기 때문에 겉으로 표가 안 나서 그렇지 지금 가게 정리하려는 데 많아요. 저도 누가 권리금 보장해 준다고 하면 넘길 겁니다.”

Q : 어느 정도로 어려운 건가요.

A : “한 달에 300만원쯤 적자가 납니다. 매출이 1년 새 반 토막 났고요. 요즘 물건 한 개도 못 파는 ‘공치는 날’이 많아요. 자영업자들이 가게를 새로 내야 여기가 장사가 되는데, 요즘 누가 식당 차리려 하나요. 여기 직원이 원래 둘이었는데, 지난달에 한 사람 나갔어요. 장사 안되는 것 뻔히 아니까 미안해서 그만둔 거죠. 저도 잡지 못했고요.”

Q : 그렇게 적자가 나는데 어떻게 버팁니까.

A : “근처에서 테이블 4개짜리 작은 고깃집 장사를 해요. 그 가게가 원래는 커피숍이었어요. 오전·오후 교대로 바리스타 두 명 두고 장사했죠. 지난해 인건비, 재룟값이 많이 올라 거기서도 적자가 났어요. 하는 수 없이 저녁에 제가 가서 일할 수 있는 고깃집으로 업태를 바꿨습니다. 직원 하나 두고 장사하고 있어요. 일자리가 하나 줄어든 거죠. 거기서 버는 제 인건비로 여기 적자를 메우고 있습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Q : 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십니까.

A :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건비 크게 오르고, ‘52시간’ 때문에 저녁 장사가 안되니 영업용 주방기구 수요가 없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요.”

Q : 정부가 잘못한 건가요.

A :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책상에서 정책을 만들어서 그렇죠. 전 문재인 대통령 찍은 사람이에요. 아직도 지지하고요. 그런데 북한에 쏟는 정성을 경제에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우선 우리가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이 거리의 상인들도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하나의 요인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한 상인은 이렇게 말했다. “IMF 사태(1990년대 후반의 경제난) 때 회사에서 잘린 사람들이 식당, 치킨집 엄청 열었잖아요. 그때가 이 동네 최고 호황기였어요.” 새 경제구조는 고용 문제를 낳았다. 먹고살기 위해 너도나도 장사를 시작했다. 포화 상태, 아니 이미 그 수위를 넘은 자영업은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로 휘청였다. 2016년 말 시행된 ‘김영란법’은 손님을 줄였다. 그리고 올해 최저임금이 16.4% 오르고, 그 영향으로 재료비가 덩달아 뛰었다. ‘미투’ 열풍에 회식이 줄었고,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으로 저녁 장사가 더 썰렁해졌다. 상인들은 최저임금 인상과 52시간제를 ‘엎친 데 덮친 것’ ‘우는 아이 뺨 때린 것’ ‘불난 데 기름 부은 것’ 등으로 표현했다.

사회 한편에는 망하는 사람 때문에 바빠진 이도 있다. 폐업 컨설팅 업체 ‘폐업119’의 고경수 대표가 그중 하나다. 자영업자·소상공인이 폐업 때 손해를 덜 보도록 돕는 그의 일이 올해 지난해에 비해 30% 늘었다. 지난해 컨설팅 건수가 713개였는데 올해는 지난달 말까지 914건이다. 그는 컨설팅 비용을 받지 않는다. 다른 사업에서 버는 돈으로 업체를 운영한다. “5년 전 이 일을 시작했는데, 죽어가는 사자의 고기를 노리는 ‘하이에나 비즈니스’처럼 느껴져 수익을 포기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고 대표는 “올해 서울 강남역 주변 등 유동인구 많은 주요 역세권에서도 식당들이 문을 닫았다. 정책 결정권자가 자영업자를 자본가로 봐서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장에서 느끼는 감으로는 내년에는 더 나빠질 것 같다. 한 달에 200만원만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있으면 권리금 포기하고 장사 접겠다는 사람이 줄 서 있다”고 했다.

황학동 상인들도 그랬다. 누구도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장사 대란(大亂)의 먹구름이 드리워진 2018년의 끝자락. 그들의 암울한 예상이 빗나가기를 기원하지만, 반전의 싹은 보이지 않는다.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 간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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