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 '여행자의 천국' 멕시코 치아파스, 그리고 거리의 아이들
[오마이뉴스 유최늘샘 기자]
|
▲ 산크리스토발 거리 기념품 파는 아이. |
ⓒ 유최늘샘 |
아바나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이십 분을 날아 바다 건너 멕시코 칸쿤에 닿았다. 공항에는 번듯한 유니폼을 입고 버스 요금을 두 배로 뻥튀기해서 파는 호객꾼들로 붐볐다. 국경을 건너 낯선 나라에 처음 도착할 때는 언제나 조금 긴장하게 되는데, 멕시코도 입구부터 만만치가 않았다. 발품을 팔아 공항을 헤맨 끝에 정상 가격에 표를 파는 매표소를 찾았다.
멕시코 유명 휴양지 칸쿤을 피해 플라야 델 카르멘, 카르멘의 해변으로 이동했다. 한적한 바다를 찾아오긴 했지만, 마야 후손들의 땅 유카탄 반도의 7월은 쿠바보다 열기가 더 강했다. 체감온도가 40도가 넘는 것 같았다. 저렴한 도미토리 숙소에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가는 날이 장날, 숙소는 때마침 하수도 청소 중이라 냄새도 진동했다.
옆방에는 65세의 중국인 여행자 청마오 동 Chengmao Dong 아저씨가 장기 투숙 중이었다. 중남미를 1년 10개월째 여행하고 있는 동씨는 몇 주 동안 이 무덥고 저렴한 숙소에 머물며 그동안의 여행 사진과 글을 정리하고 인터넷 블로그 연재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
▲ 숙소의 유일한 동양인 동 씨와 서양인 친구들. |
ⓒ 유최늘샘 |
중국에 있는 나의 부인은 다리가 불편해서 잘 걸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중국 국내에서는 항상 함께 승용차를 타고 여행했는데, 이곳 아메리카까지는 같이 오지 못했죠. 다음 번에는 꼭 부인과 같이 여행할 수 있능 방법을 찾고 싶어요. 그게 남은 꿈이에요.
Don't rush! 저는 서두르지 않아요. 늘 천천히 여행해요. 중남미는 물가가 싼 곳도 많고, 친절한 사람들이 많아서 이렇게 오래 여행하게 됐어요."
|
▲ 청마오 동 씨와 함께. |
ⓒ 유최늘샘 |
쿠바에서 신나게 수영을 하다가 몇 시간 만에 살이 빨갛게 타서 크게 고생을 한지 몇 주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쉽지만 멕시코 바다 수영을 포기했다.
더위와 습도를 피해 산악지대로 이동하자고 친구와 생각을 모았으나 그곳까지의 거리는 1천 킬로미터,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이동해야 하는 거리였다. 멕시코에는 산적과 강도가 많아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많이 들었는데, 우리가 여행한 멕시코는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쿠바와는 달리 골목마다 다국적 기업의 프랜차이즈, 편의점과 현금인출기, 식당과 상점이 많았고, 광고와 간판들이 번쩍번쩍 손님을 끄는 익숙한 자본주의 사회의 거리였다.
버스 회사에서 관리하는 터미널들은 깨끗하고, 버스는 깨끗할수록 더 비싸졌다. 13세기 마야 문명의 중심지였던 치첸이트사 유적지 옆 마을 피스테 Piste로 가는 2등 버스를 탔다. 1등 버스가 아니어서일까, 아니 아마도 뜨거운 태양 때문이었으리라.
버스는 툴룸을 지나 바야돌리드로 향하던 중 밀림 한가운데 뚫린 고속도로 위에 조용히 멈춰서더니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 기사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태연했으나 휴대폰의 전파도 터지지 않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승객의 절반 이상이 택시와 콜렉티보를 잡아 타고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
▲ 땡볕 고속도로에 멈춰선 버스. 전화기의 전파가 터지지 않자 버스기사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
ⓒ 유최늘샘 |
|
▲ 다른 투숙객이 아무도 없고 비가 오면 물이 차는 밀림 호텔의 복도. |
ⓒ 유최늘샘 |
"덥지만 않으면 이런 시설도 견딜만할 텐데 여름 우기의 쿠바와 유카탄 반도는 진짜 힘드네요. 여기 주민들은 이 날씨가 익숙하잖아요. 사계절이 없고 일 년 내내 더운 건 어떤 느낌일까요."
무더위를 피해 고산지대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여행자인 우리는 이곳 현지인들의 삶과 계절의 느낌을 영영 알기 어려울 것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가 새벽 녘 닭들이 우는 소리에 깨어났다. 치첸이트사 매표소가 문을 열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주인 할머니를 깨우러 가는데 지붕 위에 처음 보는 커다란 동물이 조용히 기어가고 있었다. 둥글둥글한 몸통과 긴 꼬리. 아르마딜로, 남미 천산갑이었다. 아르마딜로도 우리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하더니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지붕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새벽 안개 속의 신기루 같았던 아르마딜로는, 밀림 호텔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내고 떠나는 우리를 배웅하러 나온 건 아니었을까.
|
▲ 피스테와 치첸이트사 길가 곳곳에는 커다란 이구아나가 기어다녔다. |
ⓒ 유최늘샘 |
마야의 달력과 우주관을 형상화한 쿠쿨칸(마야의 뱀신)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신전, 천문대, 수녀원, 경기장, 기우제를 지내던 80미터 깊이의 우물 '세노테'를 둘러보았다. 또 치첸이트사는 인간의 심장을 올려놓았다는 재단 차크몰 chac mool 이 있는 곳이다. 해골 조각도 유난히 많다. 고리에 공을 넣는 경기의 승부에 따라 선수들은 산재물이 되었고 우물에는 주로 여자아이들이 던져졌다고 한다. 인신공양이 이루어지던 종교와 정치, 사회, 문화란 어떤 모습과 감정이었을지,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먼 옛날의 이야기로 느껴졌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유적지,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세계문화유산, 미디어와 책에서 추천하고 남들이 얘기하는 장소, 그런 수많은 곳들 중 하나인 치첸이트사를 '직접 보았다'라는 만족감은 있었지만 엄청나게 놀랍거나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이트사 족의 땅이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가득찬 정오 무렵 우리는 메리다로 가는 버스를 탔다.
여행자의 천국과 거리의 아이들
16세기부터 유카탄 주의 중심지였던 메리다는 활기차고 예스러웠다. 광장과 시장을 실컷 구경하며 며칠을 지내고, 야간 버스로 열두 시간을 달려 2200미터 산맥에 자리한 작은 도시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로 이동했다. 고도가 100미터씩 높아질 때마다 온도는 0.6도씩 떨어지니, 바닷가 유카탄과 이곳의 온도 차이는 약 13도. 이게 얼마만의 선선한 날씨인지,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변했다.
|
▲ 산크리스토발 골목에서 '샹송 방랑자 Chanson Vagabonde' 디 제프 D'Jef 씨와 즉석 합주를 했다. |
ⓒ 유최늘샘 |
|
▲ 거리의 상점에서 파는 사파티스타 엽서에는 정의로운 단어들이 가득했다. |
ⓒ 유최늘샘 |
하지만 여행자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수많은 원주민 아이들은 거리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오전부터 밤까지 관광객들에게 손을 내밀어 장사를 하는 예닐곱 살의 아이들. 기념품이 잔뜩 담긴 짐가방을 매고, 껌과 사탕이 진열된 좌판을 매고, 동전 몇 개를 벌어서 거리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는 아이들. 물건을 파는데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하루 종일 거리를 맴돌며 "싱코 페소, 싱코 페소(5페소)"를 되뇌는 아이들.
"저 아이들은 싱코 페소를 셈할 줄이나 알까요? 저 아이들 얼굴을, 눈을 못 쳐다보겠어요."
'식민지풍 자갈길 도로'를 걷다가 친구가 말했다.
원주민, 빈민의 권리와 평화를 추구하는 사파티스타의 가치는 아직 이 땅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 같았다. 한 가지 모습을 통해 그 사회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가난한 거리의 아이들과 원주민의 삶이, 사파티스타의 주장처럼 나아지지 않는한, '여행자의 천국'은 진정한 천국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캄보디아와 인도의 관광지에도 "1달러"를 되뇌며 작은 손을 내미는 거리의 아이들이 많았다. 지구별 어디를 가든, 가난한 땅에 있는 '여행자의 천국'이란 이런 슬픈 모습일 것이다.
|
▲ 커다란 봇짐을 매고 산크리스토발 거리를 헤매는 원주민 아이. |
ⓒ 유최늘샘 |
1492년 콜롬버스와 정복자들이 아메리카에 온 이후, 또다른 침략자들이 아프리카에 간 이후, 이 불공평한 세계의 구조는 21세기 지금까지도 큰 변화 없이 견고하다. 수십 년 동안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남한 국민인 나는, 몇 년 동안 일하며 아껴 모은 돈으로 세계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 치아파스의 가난한 아이들은 몇 년을 일해도 세계 여행을 꿈꾸기 어려울 것이다.
|
▲ 산크리스토발 광장의 원주민 시장. |
ⓒ 유최늘샘 |
▶ 모이(moi)란? 일상의 이야기를 쉽게 기사화 할 수 있는 SNS 입니다.
▶ 더 많은 모이 보러가기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모이] 동해 두타산 '무릉계', 단풍 관광객들 가을 만끽
- [모이] 낙안읍성에는 '둥기둥~' 소리가 나는 새집이 있다?
- [모이] 풍요로운 구례의 세 가지 가을색
- [모이] 지리산과 마주하는 오산을 아시나요
- [모이] 한로에 만난 민들레씨, 어느 하늘로 날아오를까?
- '세계적 불명예' 한국... 인하대 청소 노동자들을 주목한다
- 서울대 교수 "임현택 사퇴하라"... 전면 휴진날 나온 폭탄발언
- 중정의 그 남자... 어떻게 '515억 기부' 회장이 되었나
- 고장난 우산 버리는 방법 아시나요?
- '과징금 1400억' 철퇴 맞은 쿠팡, 이런데도 억울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