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랭루주 성공 주역, 무희들의 최후

강재인 2018. 5. 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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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쓰는 파리여행기 ⑤] 몽마르트르와 물랭루주

[오마이뉴스 강재인 기자]

[나의 이야기] 인생의 4계절이 끝나면 새로운 세대가 시작된다

밤에 보아야 더 아름답게 보인다는 끌리쉬대로(Boulevard de Clichy) 변의 물랭루주는 낮에 보아도 상호의 뜻처럼 '붉은 풍찻간'의 풍차와 탑이 꽤 선정적으로 보이는 극장식 카바레였다. 붉은 풍차가 돌아가는 모습이 밤에도 보이도록 풍차 날개엔 네온사인이 덧붙여져 있었다.

연 60만 명의 관객이 들어온다는 파리의 극장식 카바레. ⓒ강재인
연 60만 명의 관객이 들어온다는 물랭루주의 공연시간은 밤 9시부터였는데 입장료가 174유로로 만만치 않은 편이었다.

"보시겠어요?"

내가 묻자 아빠는 고개를 저으셨다.

"아니다. 지금은 낮이고 비도 오는 모양이니 어디 가서 커피나 한잔 하자."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몽마르트르를 찾는 관광객 대부분이 외국인이니까 상호를 아예 영어식의 '퀵(Quick)'으로 붙인 식당도 있었다. 불어만 고집한다는 주장도 옛말이 되었나보다. 다리도 아프고 해서 우선 물랭루주 맞은편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를 시켰다.

"몽마르트르의 1세대 터줏대감이 르누아르였다면 2세대 터줏대감은 앙리 드 뚤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였는데 누군지 기억나니?"

커피를 마시며 아빠가 물으셨다.

"들어본 것도 같아요."

키가 작았던 화가 로트레크 ⓒwiki commons
그러자 내가 잘 모른다는 걸 눈치 채셨는지 아빠는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프랑스 남부 지방의 귀족 아들로 태어난 로트레크는 10대 때 사고로 뼈가 바스러지는 바람에 하반신 성장이 멈춰 키가 152㎝밖에 자라지 않는 몸이 되고 말았다. 승마를 좋아했지만 몸이 그렇게 된 뒤로는 집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존재를 세상에 숨기고 싶어 했다.

이에 가출을 결심한 로트레크는 파리로 올라온 뒤 가난한 예술가와 소외 계층의 터전이었던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게 언제쯤이었어요?"
"1880년대 초."

물랭루주 포스터를 그린 로트레크

신체적 결함이 있거나 인생 낙오자 부류가 모여 사는 가난한 동네에서 로트레크는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반 고흐와 만나 친해졌고, 고흐의 절친인 화가 에밀 베르나르와도 가까이 지냈다. 그와 동시에 이곳 술집을 중심으로 매춘부나 무희, 술집 웨이터 등 하층민들과 사귀면서 그들을 찾는 손님들까지 세심한 눈으로 관찰한 내용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뒤로는 어머니의 경제적 후원이 있어 주변 사람들에게 술도 자주 사고 씀씀이도 컸던 이 키 작은 화가 지망생은 마을 인심을 얻으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몽마르트르의 명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1899년 물랭루주가 개점할 때 가게 주인으로부터 광고용 포스터를 의뢰받게 된다.

이에 로트레크는 고흐 때문에 알게 된 일본의 풍속화 우키요에(浮世?)의 생략적인 특성이나 드가로부터 배운 감각적 기법을 이용해 무도회의 손님들은 모두 실루엣으로 처리하고 중앙에 한쪽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는, 그래서 속치마가 들여다보이는 무희의 모습만 부각시키는 간략하면서도 인상적인 장면을 한 장의 그림에 담았다. 핸드폰의 갤러리에서 끄집어낸 로트레크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춤추는 물랭루주의 라굴뤼를 그린 로트레크의 광고용 포스터 ⓒwiki commons
당시로선 혁신적인 이 포스터가 거리에 나붙자 파리 시민들은 열광했고 물랭루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수집가들은 벽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가려고 혈안이 되었다. 이렇듯 단 한 장의 그림으로 자신의 성가를 올린 로트레크는 서둘러 고향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낸다.

"어머니, 오늘 제 그림이 파리의 거리에 나붙었습니다. 곧 새로운 작품도 그리게 될 거예요."

모자의 사랑은 동서고금이 같은가보다. 어머니는 신체적 결함이 있던 아들을 사랑했고, 아들은 자신의 성공을 누구보다 먼저 어머니에게 알려드리고 싶었던 거다. 상업용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은 그 사진을 확대해보며 내가 물었다.

"포스터에 그려진 무희가 당시 유명했다는 라굴뤼(La Goulue)죠?"
"그렇지. 그 여자 사진이 있다."

물랭루주의 인기 무희였던 라굴뤼 ⓒwiki commons
아빠는 갤러리에서 라굴뤼의 사진을 꺼내 그녀가 어떻게 생긴 여자였는지 보여주셨다. 발을 번쩍 들어 올린 라굴뤼의 얼굴은 예쁜 것 같았으나 키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캉캉춤 아녜요? 발을 번쩍 들어 올린 포즈는? 제인 아브릴(Jane Avril)도 유명했다면서요?"
"알고 있었구나. 아브릴 그림도 있다."

물랭루주의 두 히로인 중의 하나였던 제인 아브릴 ⓒwiki commons
"몸이 호리호리하네요?"
"물랭루주의 두 히로인이었지. 인기가 높으니 돈도 벌었던 모양이야. 이에 라굴뤼는 물랭루주를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지. 하지만 실패한 뒤 술에 절어 살다가 몽마르트르로 다시 돌아왔어. 그리고 인근 길가에서 담배나 땅콩 같은 걸 팔다 죽었다는데, 그녀가 왕년에 캉캉춤의 대명사였다는 걸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더라."

"제인 아브릴은요?"
"라굴뤼의 자리를 이어받아 물랭루주의 새 여왕이 된 아브릴은 결혼을 했지. 하지만 불행한 결혼생활로 나중엔 요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모양이더라."

물랭루주의 히로인이었던 캉캉춤의 대명사 제인 아브릴 ⓒwiki commons
"쉬잔 발라동(Suzanne Valadon)이란 여자도 있지 않았어요?"
"있었지, 몽마르트르의 뮤즈라고 불리던 쉬잔 발라동이 르누아르나 드가의 모델 노릇을 시작한 건 열다섯 살 때부터였다. 이것 좀 볼 테냐?"

르누아르, 로트레크, 그리고 피카소

우산. 르누아르 1883년작. 왼쪽 여자가 쉬잔 발라동 ⓒwiki commons
아빠가 핸드폰 갤러리를 클릭해 보여주신 사진은 나도 인상파 화집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그림이었다.

"이건 르누아르의 작품 아녜요?"
"그래. 르누아르의 <우산(Les Parapluies)>이란 작품인데, 맨 앞에 바구니를 든 여자가 바로 쉬잔 발라동이지. 나중엔 로트레크의 모델 노릇도 했는데, 그녀가 로트레크의 마음에 불을 질렀던 건 사실인 모양이야. 유일한 사랑이었음에도 발라동의 청혼을 거절한 것이 오히려 로트레크 쪽이었다는 점이 좀 묘한데..."

"왜 그랬을까요?"
"글쎄, 신체적 결함 때문이었을까? 험난한 운명을 헤쳐 온 발라동이나 신체적 결함을 지닌 로트레크는 소외되었다는 점에서 서로 연민의 정을 나눌만 했지. 하지만 남녀 간의 일이란 두 사람밖에 모르는 거니까. 그후 모델 노릇을 하던 쉬잔 발라동은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로 프랑스 국립예술협회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여성 화가가 되었지. 자식 또한 저명 화가가 되었는데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가 바로 그 여자 아들이야."

"아, 위트릴로가 발라동의 아들이었군요."
"미혼모로 낳은 아들이었지.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를 않았어. 어려운 환경이었겠지. 하지만 출발은 힘들었어도 발라동의 끝은 괜찮았고, 출발은 화려했는데도 라굴뤼나 아브릴의 끝은 비참했거든. 그러니 인생이란 알 수가 없는 거야."

"그런 차이는 삶에 대한 태도에서 오는 걸까요?"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누군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지 않았을까? 열매가 달랐을 뿐이지. 흠... 그런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진다. 인생의 4계절이 끝나면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니까."

"새로운 세대?"
"몽마르트르의 1세대 터줏대감은 르누아르였고, 2세대 터줏대감은 로트레크였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을 잇는 3세대 터줏대감이 나타나게 되는데 누군지 짐작하겠어?"

"...혹 피카소?"
"허허, 잘 아는구나. 그럼 이제부터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이 만났던 피카소의 아틀리에로 가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핸드백은 앞으로 메고 아빠 배낭은 등에 멘 뒤 아빠가 일어나시도록 손을 잡아드렸다. 비를 맞아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유리창 속의 내 모습은 스타일리시한 파리지엔느와 거리가 멀어졌지만, 그래도 이런 대화를 통해 우리 부녀가 서로에게 한걸음씩 다가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은 뿌듯했다. 밖으로 나오자 비는 이미 그쳐 있었고, 들어올 때 고양이가 비를 피하고 있던 밴트럭도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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