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 만난 의학도, 그를 귀신 아닌 환자로 대했다
[오마이뉴스 글:조민형, 편집:곽우신]
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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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 대한 질문은 개개인에 멈추지 않고 인간성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자신과 비슷한 존재들과 가상의 유대감을 형성하며 일종의 소속감을 느끼고자 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단지 21세기만의 질문은 아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인간을 정의하고자 했다. 덕분에 '호모 사피엔스'를 비롯한 호모 루덴스, 호모 엠파티쿠스, 호모 헌드레드, 그 외의 수많은 '호모 XXX'들이 존재하게 됐다. 이는 인간성의 범주를 확장했다는데 의의가 있으나, 동시에 폭력적이고 오만한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수많은 인간을 하나의 언어로 파편화하여 요약하는 셈이니 말이다.
지난 11월 4일, 서울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개막하여 오는 10일 폐막하는 뮤지컬 <배니싱>의 수많은 미덕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의사, 뱀파이어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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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shing, 형용사형으로 '사라지는', '사라지는 일', 혹은 현재 분사로 '사라지는 중'으로 대략 번역할 수 있다. 이 단어를 극의 제목으로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이야기는 세 인물 의신, 케이, 명렬을 통해 진행된다. 그 중 인간 의사가 두 명이고, 뱀파이어가 한 명이다. 연극이나 뮤지컬 서사에서 의사와 뱀파이어는 식상한 설정이다.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프랑켄슈타인>의 빅터 프랑켄슈타인 등이 너무 강렬하다. 뱀파이어는 장르를 막론하고 인기 있는 소재이다. 그러나 자칫 뻔할 수도 있는 이 설정을 <배니싱>은 새롭게 풀어냈다.
의신을 온전히 '선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종의 영웅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극에서 온전한 '선'은 없다) 의신은 인간성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고 한다. 그는 '신의 세계'라 불리는 영원한 삶,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한 삶을 추구한다. 또한 그는 '식민지 2등 시민'이라는 한계를 가지지만, 의사라는 점에서 사회의 '주체'라고 볼 수 있다. 그와 대조했을 때 케이는 중심부에 위치하지 못한, 바깥의 인물, 타자이다. 그는 소외 받고, 고독해하는 한 인간 군상이다. 그는 여느 뱀파이어처럼 인간과 지극히 닮은 외모를 지닌, 한때 인간이었으나 뱀파이어로 감염된 존재이다. 의신은 시신의 해부 연습을 하려다가 케이의 거주 공간에서 만난다. 뱀파이어로 햇빛에 타들어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케이에게 의신은 자신이 의사라며 당신을 고쳐주겠단 식으로 이야기 한다. 이는 케이에게 매력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자신의 문제가 '존재'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 즉, 고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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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의 삶을 그리워하던 외로운 존재 케이. 그는 그런 의신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한다. 사실 의신의 행동은 케이의 관점에서 '존재적' 행위였다. 김춘수의 시 '꽃'이 떠오른다. 이름을 부르자 꽃이 '되었듯', 케이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서 의신의 명명 행위를 통해 비로소 '케이'라는 존재가 된 것이다. 케이는 그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던 빛(온기)을 느낀다.
하지만 의신과 케이의 관계는 타자인 케이가 의신을 물고 자신의 동족으로 만들면서 전복된다. 문명, 과학이라는 '주체' 그 자체였던 의신은 타자가 된다. 이 과정에서 케이가 의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며 화를 내는 것은 꽤나 인상 깊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목소리, 즉 '타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이는 의신이라는 영웅의 몰락이기도 하다. 영웅의 몰락은 영웅이 가진 문학적 상징성을 통해 살펴볼 만하다. 인간들은 신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영웅은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 설정된 존재들이다. 그들은 굉장히 이상적이다. 한계 많은 인간들이 스스로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설정한 이상적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영웅적 면모를 지닌 의신이 무너지는 것, 이는 기존 인간의 몰락, 인간 개념의 해체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완벽해보이던 과학 문명의 추락이 될 수도 있다.
1912년은 신이 죽은 지 오래된 시대이다. 신의 자리를 대체한 건 과학이었다. 과학을 맹신하던 완벽한 주체이자 영웅 의신이 몰락한 순간,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 시작된다. 사실 1921년과 2017년은 다른 시대이기도 하지만, 과학 기술이 가장 우선시되고,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낙관이 지배하던 시대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일지라도, 관객 역시 '인간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 의신이 무너지는 걸 바라보는 관객들 중 몇몇의 머리에는 어떤 질문이 스칠 법도 하다. '인간은 뭐지?' '인간은 왜 존재하고 살아야 하지?' 등.
인간이라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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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명렬이라는 인물 덕분에 '삼인극'이라는 구조는 더욱 빛을 발한다. 의신이 뱀파이어가 됐을 때, 무대 위에는 인간과 닮은 형상으로 '인간의 피를 빨아먹을 수 있는' 비인간 뱀파이어 2명과 그냥 '평범'하고 '정상적'인 인물 1명으로 갈린다. 인간과 유사해보이지만, 인간의 공포이기도 한 '비인간'이 인간보다 무대 위에 더 많은 상황. 그러나 지극히 '인간적'이라 불리는 행위는 오히려 이 '비인간'에게서 더 많이 보인다. 의신에게 피를 제공해주고, 그를 챙기고, '온기'를 이야기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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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것의 아름다움
실험을 하다가 의신은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자신의 한계이자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이미 몰락한 그가 다시금 또 추락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명렬은 자신의 실험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의신을 몰아세우고, 그 과정에서 의신에게 물린다. 그리고 케이와 의신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곳이자, 그들이 은신했던 폐가로 향한다. 그 때 케이는 햇빛을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는다. 그는 의신의 실험이 성공하면서 뱀파이어에서 인간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칼을 맞고 죽어가는 케이에게 의신은 자신의 피를 마시라고 권한다. 다시 뱀파이어가 되면 살 수 있으니까. 그러나 케이는 거부한다. 대신 오롯이 죽어가기를 택한다. 그런 케이의 곁에서 의신 역시 빛 속으로 사라지는 길을 택한다.
이 때 극의 제목 '배니싱'의 뜻이 발휘된다. 인간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간은 여느 존재들처럼 결국 '사라지는' 그리고 지금도 '사라져가는' 존재들이다. 다소 허무주의적이고 비관적인 결말에서 오히려 비극성을 제거하는 건 그 죽음이 무대에서 묘사되는 방법이다. 인간의 한계를 수용하고 이를 향해 나아가는 의신의 모습은 숭고하다. 그는 실패했지만, 실패함으로써 영웅이 된 자다.
보통 빛은 생명을, 어둠은 죽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 그 흔한 상징은 전복된다. 그들이 죽는 순간, 무대에는 가장 따뜻하고 밝은 빛이 가득 찬다. 삶과 죽음, 유지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의 경계를 허문다. 사라져가는 순간에 오히려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휴머니즘'적이다. 인간의 필연적 한계이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빛을 맞이하고 따스함을 누린다.
극 중 자주 등장한 단어는 '인간'만이 아니다. 케이의 입에서 발화되던 '온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배니싱>은 인간이 어떤 존재라고 응답하진 않지만 조심스레 제시한다. 다른 몸을 가진 우리들은 서로 타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온기가 되어줄 수 있진 않느냐고.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필연적 한계 속에서, 서로의 곁에 있어줌으로써 그 공포의 순간을 빛나는 순간으로 전환할 수 있진 않느냐고. 공연장의 빛이 무대에만 머물지 않고 관객석까지 비춰질 때 그 의미는 더욱 커진다. 어쩌면 무대와 객석이라는, 서로 분리된 공간 속에 있던 존재들이지만 그 '빛의 순간'에 함께 있는 것, 이는 관객들이 <배니싱>을 보며 느낄 수 있는 윤리적 체험일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서로를 흡혈할 수도, 뱀파이어가 될 수도 없다. 주체가 직접 권력을 해체하고 온전한 타자가 되어보는 것 또한 어렵다. 과학과 의학, 역사 그 자체가 인간들에겐 착취의 시간이었고 지금의 삶도 그러하다. 도덕도, 과학도, 역사도 온전히 믿을 수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린 결국 죽을 존재들이고, 이 모든 시간은 사라짐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결국 사라질지라도 감히 선택하는 것, 타인의 곁에 온기로 남아주는 것, 함께 해주는 것, 이것들이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닐까. 동이 틀 때 사라지던 의신과 케이는 어쩌면 태양보다 더 강렬한 빛이 아니었을까.
공연 예술의 특성상 <배니싱>은 지금도 사라져가고 있다. 수많은 질문을 남긴 채 명확하게 답하지 않은 <배니싱>. 대신 '사라짐의 과정'을 겪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관객들에게 질문은 넘어간다. 어쩌면 그 답은 애초부터 없었을지 모른다. 그 질문은 그저 사라져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때 의신과 케이가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처럼 그 질문들 역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성에 대해 다시금 물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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