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이와이 ?지 감독을 아시나요?

김선호 2017. 9. 3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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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에 담긴 새 천년 감성

[오마이뉴스 김선호 기자]

어렸을 적에,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사춘기를 겪고 있을 때의 일이다. 신체적 변화와 함께, 이제 막 나의 세상이 꿈틀거리며 빅뱅을 일으켰다. 그땐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로만 알았다. 천동설처럼 말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학우들 간의 관계도 조율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공부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성적이 잘 나올 줄 알았다. 분명 이 정도면 괜찮겠다 믿었던 것들이 있었고, 성공은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세상의 벽이란 건 너무 높았다. 벽 속에 갇혀 있던 난,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했다.

유년기의 상처가 유달리 깊고 넓게 남는 건 그만큼 세계가 좁기 때문이다. 힘들고 지쳐 도움을 청할까 생각해 보지만 눈에 보이는 건 주변에 있는 정직한 개수의 행성들뿐,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내가 무너진다면 세상이 무너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유년기는 친구들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시기이자,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고독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와이 ?지 감독이 다루었던 여러 영화에서 유년기의 기억이 중요하게 나온다. 1993년의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에서도 그랬으며, 1995년의 <러브 레터>에서도 그랬다. 2001년에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만들고 나서도 2004년에 <하나와 앨리스>라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평소 그의 작품에 팬들이 붙인 '화이트 이와이 ?지', '블랙 이와이 ?지'라는 별명답게 그가 그리는 아이들의 세계는 극도로 밝거나, 극도로 어두웠다.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한 장면.
ⓒ 이와이 ?지
20세기 감성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블랙 이와이 ?지 감독'이 만들었다. 그는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따돌림 문제를 '새천년의 변화'와 결부 지어 보여준다. 마냥 순수하게 느껴지는 아이들의 모습조차 때가 묻어있다는 걸 안다.

아마도 이와이 ?지 감독은 새천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마음으로 생각한듯하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지금의 현실이 더 나아질 것으로 생각하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래를 좇아간다. 어른이 되기 싫어도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시간의 불가역성. 본작은 Y2K로 대변되는 21세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많은 예술인이 곧 사라질 20세기 감성을 작품으로 남기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다.

본작은 보통의 시나리오와 달리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쓰였다. 서로 간에 쉽게 메시지를 주고받지만 그만큼 말 한마디의 의미가 가벼워진, 눈을 감고 서로 그리워하지 않아도 한 번의 촬영으로 저장되는, 정보가 넘쳐나지만 그만큼 가뭄에 시달리는 불확실성의 시대. 이런 느낌들을 모아 하나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시나리오의 발단은 이렇다. 감독은 인터넷 공간에 블로그 형식의 사이트를 만들고 그곳에 자신이 만든 가상의 시나리오를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올렸다. 가상의 뮤지션 릴리 슈슈, 그리고 콘서트장에서 일어난 살해 사건에 대한 정보를 올리고, 인터넷의 대중들에게 널리 퍼뜨렸다. 사이트에 올라온 게시물들을 보며 대중들이 댓글을 작성했고, 감독은 이것들을 모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라는 소설을 출간했다.

영화는 소설의 후반부를 다루고 있다. 그나마 다루는 것도 띄엄띄엄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을 보지 않으면 이야기의 전개와 결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영화는 무성 영화처럼 필름 중간마다 알 수 없는 문장을 보여준다. 그걸 보면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곧 알게 된다. 아이디가 나오고 이어서 댓글이 출력된다. 영화 속에 인터넷 사이트의 댓글을 삽입한 것이다.

영화에 삽입된 댓글 중에는 유독 '에테르'라는 단어가 많은데, 이건 가상의 뮤지션 릴리 슈슈를 통해 느끼는 하나의 감정이자 현실을 지칭하는 말이다. 릴리의 팬 사이트에서 모인 아이들은 끊임없이 에테르의 존재를 확인하려 들며, 공유하고자한다. 자신이 왕따를 당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왕따를 당할 때, 에테르의 결핍을 말한다.

에테르는 불에 잘 타는 화학물질 중 하나다. 그러나 작품에서 말하는 에테르는 그 이전부터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제 5원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구성하는 흙과 물, 불과 공기를 규합하는 5번째 원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에서 에테르는 신들의 세계를 가득 채운 물질이었고, 이후에도 아인슈타인 이전까지 빛을 매개하는 물질이라 여겨졌다. 세계에 빛을 전달하기 위해 에테르는 세상에 가득 차 있어야만 했다. 아이들에게 에테르는 하늘에서 내려온 한 줄기의 빛과도 같은 존재, 릴리 슈슈를 자신과 잇고 세상을 밝게 만들어주는 물질이었다.

그래서 에테르는 아이들의 현실이자 감각이 된다. 자신을 제외하고 세상에 가득 차있는 것,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이어주는 물질이 에테르다. 아무리 대화를 해보아도 이어지지 않는 아이들의 세계는 인터넷 공간에서 릴리 슈슈로 이어지는 동시에 릴리 슈슈라는 뮤지션의 에테르로 하나가 된다. 끝없는 괴로움 속에서도 릴리 슈슈라는 뮤지션의 노래를 들으며 버텨내는 유이치(이치하라 하야토)의 에테르는 점점 사라져가지만, 릴리 슈슈의 음악이 새로운 에테르가 되어 삶을 공급해준다.

영화는 아이들이 느끼는 세상을 릴리 슈슈라는 뮤지션을 통해 말한다. 릴리 슈슈는 영화 속에서도 자주 나오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의 아내 이름 릴리와 그가 바람을 핀 상대와 낳은 딸 슈슈의 이름을 합친 것이다. 그래서 릴리 슈슈는 에테르와 더불어 주연들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동시에 인터넷 공간과 현실을 잇는 매개체가 된다.

영화 속에 나오는 주연 4인방은 릴리 슈슈를 중심으로 얽혀 있는데, 에테르는 이들 사이에서 릴리 슈슈의 음악을 통해 전파된다. 초등학교 때부터 릴리 슈슈의 팬이었던 여학생 요쿄(이토 아유미)를 보며 슈스케(오시나리 슈고)는 사랑에 빠지고, 슈스케와 릴리 슈슈의 음반을 훔치던 유이치도 팬이 된다. 이후, 왕따를 당하게 된 유이치는 같은 처지의 여학생인 시오리(아오이 유우)에게 음반을 빌려준다. 유이치와 슈스케는 친구였지만, 유이치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 짝사랑 상대였던 요코를 짝사랑하는 걸 알게 된 슈스케는 돌변하여 유이치를 따돌린다. 슈스케는 시오리를 강간하고 촬영한 영상으로 시오리를 협박해 원조교제를 시킨다. 유이치에게는 시오리를 감시하는 역할을 강요한다. 그런 상황에서 시오리는 유이치를 사랑하게 된다. 결국 시오리는 자살한다.

작품에서 인물 간의 관계는 인터넷과 현실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익명성은 현실 세계에서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후반부에 살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왕따 관계는 작은 세계를 가득 채운 에테르를 짙게 만드는 요소이며, 그것은 인터넷이라는 방대한 네트워크를 통해 이리저리 흩어지고 공유된다.

현실에서의 릴리 슈슈가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준다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선 그 무엇도 아닌 신기루처럼 묘사된다. 나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에게 인터넷은 개인의 정체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공간이기도 한 동시에, 관계에서 소외되고 현기증을 느끼는 아이에겐 일종의 도피처이다.

그래서 에테르는 인물이 느끼는 소외감이자 소속감, 동시에 정체성의 일부다. 서로 같은 노래를 좋아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한 이들, 사랑하는 여학생을 지켜주지 못하고 강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밀어 넣는 슈스케, 여학생들에게 왕따를 당하며 <드뷔시>를 통해 나를 살아있게 하려는 요코, 이 중 절망감에 빠져 자살하는 것은 가장 희망차 보였던 시오리다. 유이치에게 릴리 슈슈를 전달받고 유이치를 사랑하게 되어 정체성에 혼란을 겪은 소녀뿐이다. 그녀는 두 가지 에테르 사이에서 고민했다. 타인에 의해 주입되고 상처 입은 개인의 모습과, 그것에서 비롯된 사랑의 감정에서 고민했다.

영화는 아이들의 소외감과 현기증을 빛과 카메라를 통해 보여준다. <러브 레터>(1995)나 <4월 이야기>(1998)에서 이와이 ?지 감독이 보여준 것처럼, 이번 영화에서도 조명을 배제하고 자연광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이전까지와는 달리 에테르를 강조하기 위한 듯한 촬영 방법을 사용했다. 건물 내부에서 고개를 숙인 채로 타인의 생각을 엿볼 때에는, 자신만의 에테르를 강조하는 듯한 태양 빛을 역광으로 촬영해 얼굴을 살짝 가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더 밝아야 할 건물 외부의 경관을 촬영할 때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임에도 우중충한 느낌의 필터를 사용한다. 동시에 태양 빛은 우중충한 느낌으로 밝게 빛나며, 안에서 느껴졌던 흐릿하고 뿌연 느낌의 초점이 밖에서도 이어진다.

이 영화의 '밝은 우중충함'이 마치 과거를 추억하는 이미지처럼 보인다. 옛 기억을 떠올릴 때 잔잔한 생각에 잠겨 안개 속을 헤매곤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와중에서도 상처만큼은 선명히 기억난다. 안개에 비치는 건 릴리 슈슈라는 이름의 태양 빛이다. 그것이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는 상처를 이겨내는 힘, 소통의 불화합성, 불안과 희망의 공존이지만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어린 시절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동시에 그 영화가 개봉했던 새 천년 초반은 내겐 일종의 회한처럼 남아 있다.

영화는 에테르를 부정하고 천동설을 부정하며 그것에서 비롯되는 관계의 불합치성을 보여주지만, 사실은 릴리 슈슈라는 하나의 태양 빛을 받으며 CD의 표면처럼 프리즘에 반사된 오색찬란한 개인의 빛을 말하고자 한다. 아이들은 인터넷과 현실의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빛을 발하지만, 그것이하나의 에테르였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에게는 단지 개개인에게 쏟아져 내리는 태양 빛만이 있는 것이다.

결국영화가 끝나고 남는 것은 단 하나의 이미지뿐이다. 우중충하지 않고 밝은 색감의 필터로 전체를 비추는 태양 빛 아래 서 있는 유이치의 모습이다. 넓은 들판에는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고, 릴리 슈슈의 음악이 유이치의 귀와 우리의 귀에 선명하게 들린다. 릴리 슈슈의 노래는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어 바람만이 외롭게 불어오는 들판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에테르를 확인받는 유이치를 보여준다. 태양 빛처럼 눈으로 보이는 가시의 영역을 넘어선 '에테르'의 존재가 담긴 바람을 몸으로 맞으며 개인과 세계에 확답을 받는 것이다. 눈엔 보이지는 않는 가상의 공간, 인터넷처럼 말이다.

이런 게 이와이 ?지가 표현하는 Y2K 감성이다. 새 시대에서 구시대에 고하는 안녕. 구시대에 살던 나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질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 방대한 인터넷의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잃을 것만 같은 불안감, 그리움과 회한의 감정을 이와이 ?지의 방식대로 그려냈다. Y2K라는 프로젝트가 인터넷 세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불안한 선율을 증폭하지만,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이와이 ?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감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또다른 감각들

카메라는 이와이 ?지 스스로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핸즈 헬드로 촬영된 카메라의 시점이 개인의 시야를 대변한다는 건 알지만, 본작에서의 카메라는 눈보다 우선한 감정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를 기억하는 눈이 아니라 기억 자체처럼 보인다. 이른바 오감을 넘어선 여섯 번째 감각인데, 십 대 특유의 감각이 카메라에 녹아들어 있다. 그 이유로, 일단 카메라의 시점은 놀랍도록 제멋대로다. 아주 멀리서 인물을 포착하여 확대하는 방식으로 촬영하거나, 인물의 얼굴에 근접하여 맴돌기도 한다. 쇼트의 간극은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등 맞지 않는 조각을 이어붙인 듯하다. 흔들리는 화면 외에도 카메라의 동선이 원형이나 선형이 아닌 지그재그를 그리며 불안감을 조성한다. 미친 듯이 기분이 좋기도 하고, 그만큼 쉽게 기분이 나빠지기도 하는 십 대의 섬세함을 그린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영화 <매트릭스>(1999)가 우리의 불안감을 시간의 멈춤으로 보여주었다면,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예외적이고 어긋난 듯한 시간의 조합을 우리의 눈높이에 전달한다. 매트릭스의 네오는 적을 향해 내지르는 주먹과 발차기, 총알을 피하는 모습 등으로 개인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보여준다. 릴리 슈슈의 슈스케는 기억을 조각내며 공기 중을 떠다니는 에테르가 되어 자신의 눈높이를 떠돈다. 두 작품이 시간의 감각을 표현하는 방법은 이렇게 카메라의 연출로 갈린다.

유이치는 현실 세계의 고독감만큼, 인터넷 속에서 '릴리 슈슈'의 팬 사이트 운영에 빠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에테르가 따스하게 흐르는 인터넷과, 그것이 결핍된 현실에서 두 공간을 잇는 릴리 슈슈의 음악을 통해 자신의 에테르를 되찾으려는 유이치의 모습이 쓸쓸하다. 역설적이게도, 현실에서의 관계가 찢어질수록 목소리도 몸짓도 닿지 않는 사이버 세계의 관계는 끈끈해진다. 이름을 모를 뿐, 릴리 슈슈라는 이름 아래에 그들의 에테르는 공유된다.

영화는 21세기에 의해 쓰였고, 매체를 넘어 소통한다. 인터넷 공간에서 종이 위로, 다시 스크린 위로 옮겨져 관객에게 에테르를 보인다. 매트릭스도 그러했듯, 릴리 슈슈는 나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더 나아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까지 던지게 한다. 무엇이 현실인지 내 기억조차 믿을 수 없다. 구시대와 신시대의 간극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영화가 된다. 그건 우리와 소통하는 것이자 우리의 삶이기에 영화가 곧 우리가 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릴리 슈슈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익명의 아이디로 소통하지만, 스크린 위의 현실에서는 서로 간에 불협화음만을 남긴 채 비극에 잠긴다. 20세기의 끝자락에서 청춘의 종말을 고하는 아이들, 영화는 새천년과 아이들의 세계를 그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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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브런치, 블로그 동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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