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남매 모두 전도자의 삶 사는 다둥이 가족의 신앙 이야기

윤중식 기자 2017. 4. 7.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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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선임기자

김원혜(66·여)씨 형제는 8남매(2남6녀)다. 맏딸로 의사인 김씨 아래로 둘째 딸 원숙(64)씨는 화가, 큰아들 용진(62)씨는 목사, 셋째 딸 원화(60)씨는 주부, 넷째 딸 원미(57)씨는 피아니스트, 다섯째 딸 원주(55)씨는 바이올리니스트, 여섯째 딸 원희(53)씨는 첼리스트, 막내아들 용현(50)씨는 정보통신기술(IT) 기술자다. 원화씨를 제외하면 모두 외국에 나가 선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아주 특별한 ‘현수의 나비’ 동상
지난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다니엘학교(이사장 지광준)에 아주 특별한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진달래 꽃망울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정원 한가운데 ‘현수의 나비’란 이름이 붙은 동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 1m 정도의 어린아이 형상이었다.

동상의 주인공 현수는 2010년 지적장애를 갖고 태어나 홀트아동복지회에 맡겨졌다가 4세 때 미국으로 입양됐다. 그러나 현수는 입양 4개월 만에 미국인 양아버지의 폭행으로 숨졌다.
동상의 제작자는 토머스 클레멘트씨다. 그는 6·25전쟁 중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958년 미국 가정으로 입양됐다. 현재 의료기기 사업을 하며 한국계 입양인들의 대부(代父)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미국으로 입양된 지 4개월 만에 양부의 구타로 숨진 현수군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3일 서울 서초구 다니엘학교 정원에 세워진 ‘현수의 나비’ 동상. 지광준 다니엘학교 이사장과 김경래 한국통일선교연합 상임고문, 추모동상 제작자 토머스 클레멘트씨와 부인 김원숙씨(왼쪽부터)가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윤중식 기자

애초 동상 제작은 한국계 입양인들이 클레멘트씨에게 ‘조각가이자 화가인 부인 원숙씨에게 만들어 달라’고 의뢰하며 시작됐다. 하지만 클레멘트씨는 처음엔 아내에게 말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길거리와 고아원을 전전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편이 동상 제작에 골몰하자 원숙씨가 나섰다. 미국 현지 교회에서 독실하게 믿음생활을 하던 그는 현수의 사연을 듣고 더 힘을 쏟았다. 그렇게 9개월 만에 나비를 날리는 쌍둥이 동상이 완성됐다. 하나는 한국으로, 다른 하나는 현수가 사망한 미국 메릴랜드주 장애인시설 ‘린우드학교’에 보냈다.

제막식에는 클레멘트씨의 아내 원숙씨와 그녀의 8남매 중 5명이 함께했다. 제막식 축사를 한 이는 이날 90회 생일을 맞은 클레멘트씨의 장인이자 다니엘학교 전 이사장을 지낸 김경래 ㈔한국통일선교연합 상임고문이었다. 박정희정권 시절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냈고 현재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오늘은 아주 뜻 깊은 날입니다. 현수의 나비를 계기로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 합니다.”

김 상임고문의 한마디에 행사에 참석한 예닐곱 명의 한국계 입양인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원숙씨는 “친절한 양부모를 만나도 입양아는 외모가 다른 가족과 주변 편견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다”면서 “세계적으로 가장 출산율이 낮은 한국이 아직도 해외입양 3, 4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8남매 모두 전도자의 삶
범죄학 박사로 10여년째 아프리카 말라위의 교도소 영내에 거주하며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용진씨는 가족을 소개하는 일이 자칫 자화자찬이 될까봐 염려스럽다며 말을 아꼈다.
“말라위에서 강도짓으로 물건을 빼앗고, 남의 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던 범죄자들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고도 위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에게 정열적으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도록 힘을 주신 게 헛되지 않도록 약자를 섬기는 일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다.

형제 중 유일하게 국내에 남아 있는 원화씨의 몫은 9년 전 어머니와 사별한 아버지 김 상임고문의 손발 역할을 하는 일이다. 경기도 성남 판교신도시에서 매주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역 근처 아버지 집으로 찾아와 살림을 도맡는다.

고(故) 방지일 목사의 조카며느리인 원희씨는 첼리스트로 해외활동 중임에도 행사에 참석했다.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라기보다 해외 입양아들의 아픔에 동참하겠다는 뜻이 컸다고 한다.

가족들은 제막식을 마친 후 인근 한식집에서 참석한 이들과 점심을 같이 먹고 아버지 김 상임고문의 자택에 모였다가 함께 일산 탄현 기독교상조회 묘지로 출발했다. 할머니와 외할머니, 어머니 차은희씨의 묘소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영면한 세 명은 모두 생전 교회 권사로 활동하며 복음 전도에 열성이었던 크리스천이다.

김 상임고문은 원숙씨 등 자녀들에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줄 건 아무것도 없다.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 조그만 항아리에 유골을 넣어 여기 묻고 묘비엔 ‘예수 잘 믿고 갔다’고 써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민석 선임기자

3일 뒤 형제들은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김원미 피아노 독주회’에서 다시 뭉쳤다. 4세 때 피아노를 시작해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던 원미씨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과 미국, 남미에 이르기까지 세계무대에서 선교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다.

아쉽게도 이번 서울 나들이엔 원혜씨와 볼티모어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인 바이올리니스트 원주씨,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현지 교회에서 해외선교부장을 맡고 있는 막내 용현씨는 참석하지 못했다.

모든 식구들이 크리스천인 이유는 이들 형제의 1900년대 초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알 수 있다. 아버지 김 상임고문의 외증조부 하강진 선생은 1907년 경남 통영에서 자신의 집 앞마당에 미수교회를 지어 헌납한 인물이다. 장터에서 성경을 들고 전도하던 백인에게 호통을 쳤다가 거꾸로 스스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한다.

형제들의 외조부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해 투옥됐다 광복 후 풀려났지만 수감생활 후유증으로 일찍 하늘나라로 간 차재선 전도사다.

거기다 부모인 김 상임고문과 차 권사까지 믿음이 투철했으니 8남매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복음 사역을 타고난 셈이다. 아버지로부터 늘 듣던 말이 “물려줄 유산은 딱 3가지다.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성경”이었다고 한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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