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조선땅 제물포에 이르러 말씀 증거하다

인천=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2017. 3. 2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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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선교사 '로버트 그리어슨' 조선 복음화 위한 머나먼 여정
19세기 말 이후 한국에 들어온 외국 선교사들이 묵었던 인천(제물포)의 옛 대불호텔(붉은 색 건물) 복원공사가 3월 중순 현재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복원되면 개항기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된다.
굴뚝이 솟아있는 건물(흰색 점선 안)이 당시의 대불호텔. 한 노인이 신식거리와 제물포항을 바라보고 있다.
대불호텔 옥상 굴뚝을 배경으로 관동교회(왼쪽)와 인천제일교회(오른쪽) 십자가가 보인다. 인천제일교회에서 동쪽으로 600m 떨어진 곳에 인천 지역 첫 교회 내리교회가 있다.
로버트 그리어슨

세상은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으로 시끄러웠다. 날씨는 미세먼지로 혼탁했다. 공장이 많은 인천의 하늘은 더욱 탁했다.

지난 16일 인천 중구 자유공원 자락 개항장문화지구. 평일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공원 정상에 올라 맥아더 장군 동상 근처에서 서해바다로 눈을 돌렸다. 인천 내항과 외항, 월미도와 연안부두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인천대교와 연결된 인천국제공항도 펼쳐졌다.

발아래는 옛 청·일 조계지를 가르는 계단을 중심으로 오른쪽엔 차이나타운, 왼쪽은 개항장문화지구다. 19세기 말 제물포(옛 인천) 포구를 입구 삼아 조선을 집어삼키려 했던 외세가 자기들 마음대로 선을 그어 조계지로 삼았던 강제 개항 도시가 인천이다.

옛 청나라의 조계지는 현재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며 화교 상권이 형성됐다. 반면 관공서 등이 있던 일본 조계지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옛 일본영사관, 일본58은행, 일본제1은행, 일본우선주식회사, 제물포구락부 등 근대 벽돌 건물이 시간여행을 하게 만든다.

조계지 계단 근처엔 적조 건축물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제대로 된 표식이 없어 관광객들에겐 그저 근대문화거리 조성 사업으로 인식될 뿐이다.

이 건물은 개화기 역사를 다룰 때 자주 등장하는 대불호텔이다. 서울 정동의 손탁호텔과 더불어 첫 서구식 근대 호텔로 불린다.

1898년 9월 7일 수요일 이 호텔에 캐나다인 선교사 부부 로버트 그리어슨(1868∼1965)과 레나 그리어슨(?∼1920)이 발길을 옮겼다. 두 달 전(7월 16일) 고향인 캐나다 노바코스시아주 핼리팩스에서 결혼한 두 사람은 이튿날 조선 선교를 향한 머나먼 여정을 시작했다.

대불호텔에 도착한 날을 그리어슨은 선교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제물포항에 내려) 다이부츠(大佛의 일본식 표기)호텔로 이동했다. 스튜어츠호텔에는 빈방이 없었다. 다이부츠호텔의 문단속이 잘되는 방을 잡았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선교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서울에서 선교회의를 끝낸 많은 선교사들이 제물포에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콜리어(황해도 개성구역회 구역장), 제중원 황립 조선병원의 에비슨 원장 등을 만났다. ‘그분(에비슨) 눈빛은 따뜻했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셨다. 그분의 아들 로렌스도 만났는데 11살이었고 우리가 타고 온 히고마루호로 학교가 있는 중국으로 간다고 했다.’

그리어슨 부부는 이 호텔에서 1박을 하며 평양에서 상하이로 가는 리 목사 부부, 미국 남감리회 레이드 박사 등과도 교제했다. 또 그들과 항구 건너편 월미도에 가서 수영을 즐기기도 했다. 월미도와 항구 사이는 현재 매립돼 제7부두가 됐다.

두 달간 긴 항해 끝에 제물포 도착

부부는 이날 아침 배가 제물포에 다다르자 도착 감사예배를 드렸다. ‘우리가 읽은 성경 첫 구절이 우리 상황과 딱 맞아떨어져 큰 감명을 받았다. 창세기 29장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움직일 때 길을 인도하셨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제공해 주셨다.’ 부부가 읽은 29장 1절은 이러하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그리어슨은 스코틀랜드 출신 아버지 존 그리어슨과 프랑스 위그노 신교도 후손으로 핼리팩스 출신인 어머니 메리 파레트 사이에 태어났다.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 살던 부부였다. 특히 아버지는 핼리팩스 빈민을 위해 톱과 망치를 들고 목수 일을 하며 전도했다. 이방 선교에도 관심이 많았으나 여건이 되지 않아 선교사로 나가지 못했다.

아들 그리어슨은 노바코스시아의 달하우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됐다. 그리고 파인힐 신학교도 졸업했다. 그가 조선 선교사가 되겠다고 아버지에게 고백하자 “엄마와 나는 어느 날 너의 요람 곁에 꿇어앉아 네 작은 머리에 손을 얹고 우리가 허락받지 못한 선교의 사명을 네가 맡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단다”라며 기뻐했다.

훗날 존 그리어슨은 아들이 사역하는 함경도 성진의 기독병원 건축을 위해 72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조선까지 직접 왔다. 목수 솜씨는 성진기독병원 건축 현장에서 발휘된다.

첫 대면한 조선인의 비참한 삶

조선을 향한 여정은 모험과 다를 바 없었다. 결혼식 다음날(7월 17일 주일) 부부는 고향과 가까운 세인트스티븐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어슨은 이날 회중에게 조선 선교 역사를 얘기했다.

부부는 기차를 이용해 몬트리올, 그리고 미국 북부를 횡단하는 열차 여행을 계속했다. 7월 31일 주일 그리어슨은 시애틀에 도착해 ‘그는 모두를 위해 죽으셨다’(고후 5:15)는 말씀을 전했다. 8월 2일 밴쿠버를 출발해 북태평양 류산 열도를 거쳐 일본으로 향했고, 8월 14일 도쿄 앞 에도만 입구에 도착했다. 21일 주일에는 요코하마 유니온교회에서 부산 선교에 힘쓰고 있는 ‘로스 양’ 등 조선과 중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과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며 고단함을 달랬다.

그는 그렇게 대장정을 통해 조선인과 첫 대면을 했다. 그가 처음 본 조선인은 부두 노동자였다. ‘그들은 철로 된 매끈한 증기선의 측면을 (짐을 먼저 내려 품삯을 받기 위해) 기어오르려고 했다. 매질과 물동이 세례,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 다소 위안이 된 끔직한 욕지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절대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만난 조선의 풍경은 ‘(비참한 삶의 환경 때문에) 정말이지 끔찍해 보였다’고 일기에 서술했다.

9월 8일 목요일 대불호텔을 나와 작은 증기선에 오른 그들은 서해와 한강 뱃길을 따라 서울로 향했다. ‘침입자를 물리친 수많은 요새와 성벽을 볼 수 있었다’며 그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에비슨 원장이 설명했다고 적었다. 그들은 항해 중 ‘강가 작은 포구’에 내려 미 장로교선교회 감독관이자 조선 선교 개척자인 언더우드 박사를 만났다. 추정컨대 김포 덕포진이거나 고양 행주나루였을 것으로 보인다. 덕포진에는 송마리교회, 행주나루에는 행주교회가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돼 있었다. 또는 김포읍교회(현 김포제일교회)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이날 밤 7시쯤 ‘한강이라는 곳의 선교사 여름 별장’에 묵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인도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며 잠자리에 들었다’고 했다. 부부가 묵은 여름 별장은 지금의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묘원 일원으로 당시 언더우드, 에비슨, 밀러 선교사 등이 여름 별장을 세워 공동으로 사용했다.

그리어슨은 이튿날 감기로 하루를 쉬고 10일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걸어서 서소문을 거쳐 드디어 서울 도성에 들어섰다. 그들은 광화문 인근 그리스도신문사와 왕립 음악원(덕수궁으로 추정)에 들렀다. 그날은 고종의 생일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위한 기도회를 열기로’ 돼 있는 날이었다. 그런데 ‘왕이 얼마 전 소동이 있어서 기도회를 허용하지 않았으나 언더우드가 나라를 사랑하는 모임을 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해 500∼600명이 모였다.’ 찬양과 기도, 말씀 선포가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 교육받고 정부에서 중요한 직위를 맡고 있는 젊은 양반 윤치호(1865∼1945·기독정치가)씨가 청중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레나는 유일한 서양 여성으로 칸막이로 나뉜 곳에 조선 여성과 함께 있었다.

9월 11일 오전 11시 주일, 서울 덕수궁 옆 정동교회. 그리어슨은 언더우드의 요청에 의해 한국 크리스천을 대상으로 설교했다. 언더우드가 직접 통역을 했다. 구원의 확신을 그들에게 심었다.

머나먼 여정의 대단원은 그렇게 주일 설교로 마무리됐다. 그리어슨은 펜을 들어 그날의 감격을 적었다.

‘조선에서 맞이하는 첫 안식일에 주님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

■ 로버트 그리어슨(1868∼1965)

캐나다 핼리팩스 출신 목사이자 의사 그리고 교육자. 미 부흥설교자 드와이트 무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98년 여름 조선에 도착한 그는 이듬해 2월 캐나다선교회 파송에 따라 조선 북동지방 사역을 위해 서울을 떠나 원산으로 향했다. 앞서 1893년 핼리팩스 베다니교회에서 매켄지 선교사의 조선 파송 송별예배를 인도한 이가 그리어슨이었다. 그리어슨은 함경도 성진 등을 전진기지 삼아 1934년까지 한국과 중국, 러시아 등에 복음을 전했다.

1950년대 말 캐나다 유학 중 그리어슨을 만난 신학자 김재준(1901∼1987) 목사의 기록. “그리어슨은 성진이 공산당 치하에 들어간 것을 못 견디게 분개했다. 이승만은 한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싸웠고 나라를 구한 인물로 한국의 모세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그리어슨이 보수적 신앙을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인천=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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