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에 등장하는 대통령 되려면 '재벌을 때려라'
[오마이뉴스 글:김종성, 편집:박정훈]
뉴스에 나오는 사회문제의 상당수는 재벌 지배체제 때문에 생긴다. 높은 자살률만 봐도 그렇다. 자살의 상당 부분은 정신력 부족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경제력 빈곤에서 생기는 것이다. 서민들의 삶의 질이 저하된 것은 1997년 IMF 위기 이후로 재벌들의 독점과 횡포가 한층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재벌 지배체제는 자살률 1위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사교육비 문제도 그렇다. 사교육 경쟁은 유명 대학에 가기 위해 벌어진다. 유명 대학에 가기 위한 경쟁이 한국에서 유별나게 치열한 것은, 그런 대학을 졸업해야 재벌 기업에 취직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재벌 기업 입사에 목숨을 거는 것은 돈과 권력이 그쪽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나 소상인도 정당한 소득을 벌 수 있는 나라라면, 재벌 기업에 들어가려고 그렇게까지 애를 쓰지는 않을 것이다. 금권을 차지한 재벌들이 명문대 출신 사원을 선호하다 보니, 수많은 부모들이 자녀 학원비를 벌기 위해 밤중에 대리운전도 하는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 외에 출산율 저하, 부동산 투기, 자영업자 문제 등을 포함한 수많은 사회문제의 기저에는 재벌 독점체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항상 재벌 편이다. 나라 곳간에 돈이 부족해서 복지 재원을 마련할 수 없으므로 세금을 적정 수준으로 더 거둬야 하는데도, 정부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것은 서민한테서 세금 거두기가 미안해서가 아니다. 재벌들의 세금 부담이 커질까 봐 그러는 것이다. 재벌들에게서 세금을 뭉칫돈으로 거둘 수 있는 합법적 통로인 법인세가 이명박 정부 이후로 크게 인하된 것도, 재벌의 눈치를 살피는 대한민국 정부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이전의 역대 정부들도 기본적으로 재벌 편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 없었다. 김대중 정부의 경우에는,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음으로써 부의 편중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출자총액 제한제도(출총제)를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IMF 사태를 초래한 주범으로 규정되면서 한때 코너에 몰렸던 재벌들은 김대중 정부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데 이어, 그 후로는 IMF 위기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IMF 위기 당시 해체됐어야 할 재벌들이 지금은 골목 상권까지 장악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고려 광종의 '재벌개혁'
"김대중·노무현도 못한 재벌 개혁을 누가 하겠는가? 공연히 분란 일으킬 것 없다!" 그런 주장을 들으면 특히 비웃을 사람들이 있다. 수능 한국사 시험에 곧잘 나오는 사람들이다. 김대중·노무현보다 훨씬 불리한 조건에서도 재벌 개혁을 추진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 '용감한 왕'들이다.
그중 두 사람은 2009학년도 수능 국사(2014학년도부터 한국사로 개칭) 9번 문제에 등장했다. 9번 문제는 지문에 표시된 세 임금이 각각의 정책을 실시한 공통적인 동기를 묻는 문제다.
▲ 2009학년도 수능시험 국사문제. |
ⓒ 한국교육과정평가원 |
호족들의 농토에 근무하는 노비들을 해방시킨 이 조치는 고려판 재벌들의 자산 규모를 감소시킴으로써 이들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노비에서 양인으로 바뀐 사람들한테서 세금을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치의 궁극적 목적은 그렇게 해서 국가 재정을 튼실히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9번 문제의 정답은 '3번: 국가의 수입 기반 확대'다. 성급한 수험생들은 지문 속의 '노비안검법'만 보고 '1번: 신분 제도의 개혁'을 찍을 수도 있다. 그런 수험생들을 노리고 1번 문항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노비안검법은 궁극적으로는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한 것이었지만, 호족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조치였다는 점에서 옛날판 경제민주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 드라마 <달의 연인: 보보경심-려>의 광종(이준기 분). |
ⓒ SBS |
광종은 돈과 토지와 노비를 장악한 호족들의 기운을 뺄 목적으로, 집권 12년 차 이후로 툭하면 공안 사건을 만들어 호족들을 숙청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안정국은 정치적 약자들을 상대로 곧잘 전개되지만, 광종은 정치적 강자들을 상대로 그런 칼날을 뽑아 들었다. 그래서 광종의 광포한 공안정국은 일반 백성으로서는 그렇게 싫지 않은 공안정국이었다.
그래서 광종은 호족들에게 원성을 많이 샀다.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절요>에 실린 상소문에서, 친(親)호족 유학자인 최승로가 광종 집권 12년차 이후의 16년간을 아주 몹쓸 시기로 혹평한 것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공민왕(재위 1351~1374년)의 전민변정사업도 노비안검법과 취지를 같이했다. 고려 후기의 재벌인 권문세족들이 불법적으로 소유한 전(田)과 민(民), 즉 토지와 노비를 원래 자리로 되돌림으로써 노비안검법과 동일한 효과를 얻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역시 재벌 때리기를 통한 경제민주화라 할 수 있었다.
고려 마지막 군주인 공양왕(재위 1389~1392년)의 전제 개혁이란 것은 이성계·정도전이 권문세족의 땅을 빼앗고 자영농을 육성할 목적으로 추진한 과전법 개혁을 말한다. 당시 공양왕은 허수아비였으므로, 위에서 말한 '용감한 왕'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광종·공민왕에 이어 세 번째로 소개할 '용감한 왕'은 2010학년도 수능시험 국사 16번 문제에 등장했다. 지문에 제시된 개혁정책을 실시한 배경으로 옳지 않은 것을 찾으라는 문제다.
영조의 균역법, 지금으로 보면 '경제민주화'
▲ 2010학년도 수능시험 국사문제. |
ⓒ 한국교육과정평가원 |
균역법 제정 이전에, 관료나 생원·진사 등의 양반 사대부는 병역의무가 없었으므로 군포를 납부할 필요가 없었다. 법적인 사대부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평민들만 의무를 부담했던 것이다. 그래서 군포 납부를 기피할 목적으로 양반 사대부로 신분세탁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2번 문항).
또 지방 관청에서 군포를 독자적으로 징수하여 서민 부담을 가중시키는 예도 많았다(3번 문항). 이런 부담을 견디다 못해 도망가는 백성이 있으면(5번 문항), 이웃이나 친족에게 납부의무를 전가하는 일도 많았다(4번 문항). 따라서 균역법과 관계없는 문항은 1번이다. 결작은 균역법 실시 이후에 지주들에게 부과한 부가세다.
▲ 영화 <사도> 속의 영조(사진 위쪽, 송강호 분). |
ⓒ 타이거픽처스 |
이렇게 우리 역사에서는 재벌 때리기를 통해 경제민주화를 실천한 군주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군주들이 서민 대중과 역사가들한테 두고두고 감동을 주기 때문에 수능시험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도 못한 재벌개혁이니 앞으로는 포기하자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재벌개혁의 총대를 높이 쳐들 군주들은 앞으로도 얼마든 출현할 수 있다. 그래서 먼 훗날의 대입시험에서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용감한 대통령이 광종·공민왕·영조와 더불어 한국사 문제에 등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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