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진해운의 위기..빌라도 신드롬

김용철 기자 2016. 9. 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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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이 한진해운에 대한 법정관리(회생절차 개시)를 결정하고 채권채무를 동결한 뒤 촉발됐던 해상 물류대란이 1주일 만에 숨통이 트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한진해운이 담보를 제공하면 1천억 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히자, 조양호 회장과 대한항공 측이 1천억 원을 내놓겠다고 밝힌 것이다. G20 회담이 열리고 있는 중국 항저우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던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대주주 책임론을 거론하고 난 후에 나온 조치다.
 
일본에 이어 미국 법원에서도 한진해운 선박에 대한 스테이오더(압류금지명령) 신청이 받아들여지면서 물류 대란이 점차 해소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일본 노선에 이어 한진해운의 주력 항로인 미주노선에서도 가압류가 풀리면서 물류대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고 밝혔다. 미국 롱비치와 시애틀 항구 등에 기항하면서 미주행 컨테이너 하역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 지급해야 하는 최소 하역비와 인건비 등 1천억 원이 한진해운에 투입되면 물류대란은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일각에서 당장 지급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6천5백억 원은 용선료와 선박금융 원리금 등으로 법원에서 회생채권으로 분류돼 점차 해소가 가능한 금액이라고 대한항공 관계자는 설명했다.
 
법정관리를 담당한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도 산업은행과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나섰다.
 

싱가포르에 가압류된 한진해운 컨테이너선 한진로마호. (마린 트래픽 캡처=연합뉴스)

 
하지만 조양호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마련하는 4백억 원과 대한항공이 대출하는 6백억 원으로는 급한 불을 끄기에도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6월 말 현재 한진해운의 전체 부채는 6조802억 원, 1년 이내에 갚아야 하는 유동부채는 4조2471억 원에 달한다. 반면 1년 이내에 현금화 할 수 있는 유동자산은 8,689억 원에 불과하다. 거래업체에게 지급을 약속한 매입채무는 1조원인데 반해, 거래업체에서 대금을 받을 매출채권은 5천억 원에 불과하다.
 
위기에 빠진 한진해운의 거래업체들은 받을 돈은 제때 받으려 하겠지만, 줘야할 돈의 지급을 미루게 되면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
 
법정관리로 회사의 영업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거래대금을 제때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선주들은 앞으로 한진해운과 운송계약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한진해운은 영업망과 거래처를 다른 업체에 빼앗길 것이다.
 

조양호 회장

 
대한항공 측도 굳이 속내를 숨기지 않는다. 법정관리는 한진그룹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결과라는 얘기다. 계열분리 된 한진해운에 대해 지난 2014년 4천억 원의 증자에 참여해 대한항공이 1대 주주가 됐고, 지난 7월까지 모두 2조2천억 원을 쏟아 부었지만 한진해운을 구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난달 31일 5천억 원을 추가 투입하겠다고 밝히고 정부와 채권단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해 어쩔 수 없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는 설명이다. 한진해운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1조원에서 1조7천억 원이 필요한 상황에서 더 이상 지원했다가는 대한항공마저 어려움에 빠질 수 있고, 경영진이 상법상 배임혐의로 처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주주들로부터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
 
대한항공 측은 “이번 한진그룹의 1천억 원 지원은 물류대란을 초래한 데 대한 사회적인 책임에서 결정한 일이다. 법적인 책임은 아니다.”라며, 이제 추가 지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컨테이너선 37척(수송능력 : 274,270 TEU)과 벌크선 22척(수송능력 : 2,146,938톤), 그리고 장기용선계약에 의한 컨테이너선 55척(수송능력 : 337,956 TEU)과 벌크선 22척(수송능력 : 2,301,069톤)을 보유하고, 북미, 유럽, 대서양 등 세계 3대 기간 항로를 포함해 116개 항로 3,600 여 곳의 목적지에 화물을 운송하고 있는 한진해운. 법원은 회생을 목적으로 법정관리를 결정했다지만, 중장기적으로 한진해운이 회생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국내 1위, 세계 7위의 국적 해운사로, 유사시 군수품 수송에 동원돼야하는 국가안보적인 가치를 지닌 한진해운이라지만, 그 중요성은 법정관리가 결정되고 사실상 사형선고가 난 뒤에야 부각되고 있다. 화주들은 물론 부산시민들까지 나서 대책을 요구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은 없다.
 

7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항공 빌딩 앞에서

 
현대상선에 이은 한진해운 위기의 진원지는 멀리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 세계의 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던 중국의 항구에서는 물품 하역을 위해 1개월 이상 대기해야하는 해운업의 최대 호황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해상운임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국내 해운업계 1, 2위 한진해운과 현대상선도 비싼 가격에 장기 운송계약을 경쟁적으로 했다. 전문가가 아니었던 오너와 경영진은 이런 호황에 숨겨진 위기를 간파하지 못했다. 베이징 올림픽의 종료와 함께 물동량이 감소하고, 세계적인 금융위기까지 겹치면서 해운업의 버블은 폭발했다.
 
해운회사에 돈을 빌려주는 금융기관,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감독해야하는 금융감독기관, 해운업을 관리 감독해야하는 해양수산부도 사전에 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버블 붕괴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타이밍을 놓치면서 결국 국내 해운업은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는 지적이다.
 
위기 상황에 빠지고 나서도 채권단과 정부는 대주주의 책임을 요구하고, 대주주는 정부와 채권단의 적기 지원이 없었음을 지적하는 상황을 놓고, 일부 경제학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빌라도 신드롬’이라고 지적했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상황이 예수의 사형을 결정하고도,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대중들의 요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발뺌하는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를 닮았다는 것이다.
 
우리 경제의 위기는 해운업과 조선업만의 일이 아니다. 장기 불황과 저성장에 따라 법정관리 신청기업이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가계부채도 연일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있다. 시장의 예상대로 미국의 금리 인상이 본격화된다면 우리경제는 또 한 번 큰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기업 활동에 대한 1차 책임은 그 기업의 대주주와 경영진에 있다지만, 기업의 위기가 국가적인 재앙으로 번지지 않도록 사전에 위기를 감지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것은 정부와 감독기관의 몫일 것이다. 대중들의 요구가 거세더라도 소신을 관철하는 빌라도,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는 빌라도의 모습이 필요한 시점이다.   

내일(8일)과 모레 열릴 국회청문회에서 정부와 감독기관, 채권단의 답변이 주목된다.   

김용철 기자yc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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