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복비 99만원의 유혹.. 복덕방 변호사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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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변호사가 부동산 등기 업무를 시작합니다. 차츰 인기를 얻고, 떼돈을 법니다. 당시 등기를 도맡던 사법서사(법무사)들이 그의 사무실 앞으로 몰려와 돌을 던지고 항의를 합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며 그를 무시하던 다른 변호사들도 시간이 흐르자 등기 업무에 뛰어듭니다. 2013년 개봉한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입니다. 영화 속 변호사와 법무사의 ‘밥그릇싸움’은 현실에서 변호사와 공인중개사 간 다툼으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올해 초 정식 영업을 시작한 ‘트러스트 부동산’ 덕분입니다. 공인중개사 자격증 없이 변호사가 부동산 매물 등록과 알선, 거래 과정에서 법률 자문을 시작한 첫 사례입니다.
공인중개사들은 발끈했고, 고발 끝에 부동산 중개를 시작했던 변호사는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단순한 생계다툼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넘쳐나는 변호사와 부동산 중개에 대한 신뢰 하락 등 사회 현상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복덕방 변호사는 왜 생겼고, 부동산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복덕방 변호사의 탄생
변호사가 부동산 영역에 진출하려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00년대 초반에도 비슷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긴 법정다툼 끝에 대법원은 2006년 변호사에 의한 중개사무소 개설 등록은 안 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변호사라도 부동산 중개업을 하려면 공인중개사법 2조에 따라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추가로 취득해야 한다는 겁니다.
중견 로펌 ‘현’의 대표변호사로 기업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이름을 날린 공승배 변호사가 지난 1월 ‘트러스트 부동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동산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논란은 10년 만에 재개됐습니다. 변호사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매물을 무료로 소개하고, 부동산 매매·임대 거래에 필요한 법률자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취지입니다. 매매나 임대를 알선한 것에 따른 대가가 아니고, 자문에 대한 비용을 받기 때문에 공인중개사법 위반이 아니라는 게 트러스트 측의 입장입니다.
놀라운 건 가격입니다. 트러스트는 매매 거래금액이 2억5000만원(전·월세는 3억원) 미만이면 45만원, 이상이면 99만원을 받습니다. 주택 가격이 3억원이든 10억원이든 건당 보수는 99만원으로 똑같습니다. 2억∼6억원 미만 0.4%, 6억∼9억원 0.5%, 9억원 이상 0.9%의 상한 요율을 적용하는 일반 공인중개료보다 훨씬 저렴합니다.
예를 들어 10억원짜리 집을 매매했을 때 일반 중개수수료는 최대 900만원인데 트러스트에 맡기면 99만원만 내면 됩니다. 저렴한 수수료를 강점으로 트러스트는 서서히 입소문을 탔습니다. 지난 3월 서울 강남 소재 빌라의 임대차 계약을 시작으로 5월에는 종로구의 11억7000만원짜리 주상복합 아파트 매매 거래도 성사시켰습니다. 트러스트 관계자는 “하루 평균 40∼50통의 문의 전화가 온다”고 말했습니다.
인기와 함께 논란도 커졌습니다. 공인중개사협회가 지난 3월 공인중개사법 위반으로 경찰에 공 변호사를 고발했고, 5월에는 검찰에 추가 고발도 이어졌습니다. 법률 자문이라는 이름으로 매물을 확보해 다른 계약자와 연결하는 행위 자체가 중개라는 주장입니다. 공인중개사협회는 강남구청과 국토교통부 등에도 법 위반 여부 확인을 요청했고 두 기관 모두 ‘위반이 맞다’는 취지의 유권해석을 내렸습니다. 검찰의 판단도 비슷했습니다. 지난 7월 기소된 공 변호사는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재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6개월간 이어진 트러스트 사태의 전말입니다.
복덕방 변호사가 남긴 것들
등록 변호사 2만명 시대.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골목상권을 침범하는 변호사의 횡포로 한정짓기엔 트러스트 논란이 부동산 시장에 남기는 울림이 적지 않습니다. 법원 판결과 별개로 부동산 중개 업계가 현재 소비자의 신뢰를 얻고 있는지, 과연 전문성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44만명이 넘는 공인중개업 종사자 대부분은 먹고살기 힘들다고 입을 모읍니다. 한국의 중개 보수는 1% 미만으로 미국(4∼6%) 일본(3∼5%) 중국(2.5∼2.8%) 영국(2∼5%) 등에 비해 낮은 편에 속합니다. 주택시장 활성화로 중개업자가 폭증하면서 ‘한 집 걸러 부동산’이라는 말처럼 경쟁도 치열해졌습니다. 서울 마포구의 한 부동산중개소 관계자는 “법의 틈새를 파고들어 남의 밥그릇을 빼앗는 이들이 생기면 생계 유지가 더 힘들어질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사법시험을 통과하거나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 시험을 거쳤지만 절반이 넘는 인원의 월 소득이 대기업 평균 수준에 못 미치는 변호사의 현실만큼이나 공인중개 업계도 암울하다는 겁니다.
다만 서비스의 질을 생각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다국적 부동산 투자회사 ‘존스랑라살’에 따르면 2014년 기준 한국의 부동산 거래 투명성지수는 60위에 그쳤습니다. 가나(52위)와 우간다(58위)보다 낮은 결과입니다. 공인중개사가 계약 체결에 불리한 사항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한국소비자원이 2013년 조사한 소비자 시장 성과지수를 보면 부동산 중개 서비스에 대한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51.7점, 신뢰도는 53.5점에 불과했습니다. 지역별로 영업 구역을 나누고 매물을 공유하는 공인중개업의 오래된 카르텔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컸던 게 사실입니다.
결국 트러스트 사태를 계기로 중개업자들 스스로 전문성을 키우는 등 변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선진국은 물건을 맡기면 2주 안에 최근 부동산 동향과 물건의 상세한 분석을 담은 30쪽짜리 보고서를 만들어오고 2주 안에 계약을 체결해줄 것을 명시하고 있다”며 “국내 중개업이 전문성을 좀더 갖췄다면 변호사들의 진입 자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법원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복덕방 변호사 출현을 바탕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좀 더 헤아리는 공인중개 업계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글=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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