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게 죽은 단종 끝까지 따른 선비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 덕산서원 강당 |
ⓒ 정만진 |
하지만 지금의 황금동 신천지아파트 입구는 예전처럼 산 좋고 물 좋은 청정 지역은 못 된다. 오늘날의 덕천서원 자리는 산 속이 아니라 신흥 개발지 한복판이 되고 말았다. 물론 덕산서원이 처음부터 지금처럼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회 지역에 세워진 것은 아니다.
이는 황금동의 본래 이름이 증언해준다. 황금동의 본명은 황청동(黃靑洞)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구 부민들 일부는 이곳 산골로 피란했는데, 두 달 가량 뒤 의병을 일으키는 손처눌 선생이 '푸른 산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어 들녘의 곡식이 황금물결을 이룬다'는 뜻에서 이 일대에 "황청(黃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1977년, 저승의 다른 말인 황천(黃泉)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동명을 황금동으로 바꾸어버렸다.
어쨌든 전쟁이 났을 때 사람들이 피란을 와서 숨고, 푸른 산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덕산서원의 애초 터는 지금과 달리 한적한 자연 속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저 세월이 흐르고 개발과 도시화의 바람에 못 이겨 덕산서원도 결국은 주택가 안에 자리잡은 평범한 기와집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 덕산서원의 현판과 강당 마루가 보이는 풍경 |
ⓒ 정만진 |
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작은 안내판을 읽으면서 본문에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은 사실에 대해 추정을 해본다. 서섭의 호에 은(隱)이 들어 있는 까닭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숨을 은'은 본래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등 이성계 정권에 협력하지 않은 고려 충신들의 호에 즐겨 사용된 글자이다. 그렇다면 서섭은 누구에게 협조를 하지 않다가 피해를 입었을까?
▲ 덕산서원 경내에 세워져 있는 서섭 선생 신도비 |
ⓒ 정만진 |
어린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 무리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서섭은 '간신들을 물리치소서'라는 취지의 '척간소(斥姦疏)'를 단종에게 올린다. 그는 '척간소'에서 '선왕(세종)께서 원손(단종)을 안으시고 집현전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과인이 죽고 난 뒤 경등을 모름지기 이 아이를 잘 보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비록 불초하오나 곁에서 들은 기억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나이다.' 하고 말한다. 서섭은 이 일로 귀양을 가고, 1453년(단종 2)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잡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聞昔長沙有此人 듣자하니 옛날 장사에 귀양 간 사람이 있다던데
今人我亦被誣人 오늘날 나 또한 남의 모함을 당했네
天必降人同賦性 하늘이 사람에게 같은 성품을 내렸으니
惡何人也善何人 악한 사람 누구이며 선한 사람은 누구인가
귀양을 간 서섭은 위의 시 '재적소시(在謫所時)'를 남겼다. '재적소시'는 '유배지에 머물면서' 정도의 뜻이다. 시의 내용은 대략 하늘은 이 땅에 같은 사람을 태어나게 하였는데 어째서 누군가는 악인이 되고 누군가는 선인이 되는지 알 수 없다는 탄식으로 헤아려진다. 과연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남을 죽이고 내치고 구석진 곳에 가두는 것일까? 서섭은 권력을 향한 수양 무리의 잔인함을 개탄했다.
▲ 덕산서원으로 들어가는 문. 사진의 왼쪽에 보이는 문이 서원의 본래 출입문인 내삼문이고 오른쪽의 작은 문은 쪽문(협문)인 전향문이다. |
ⓒ 정만진 |
擧天奉日死於忠 하늘을 떠받치고 해를 받들어 충의로 죽으니
萬古吾東第一忠 만고의 우리나라 제일 가는 충신일세
男兒此世生無面 남아로서 이 세상에 살 면목이 없으니
誰識中心有血忠 누가 마음에 피 맺힌 충성 있음을 알리
1457년(세조 3) 10월 결국 단종은 세조의 핍박에 못 이겨 목숨을 끊는다. 세조가 보낸 사약(賜藥)을 든 사신이 유배지 영월을 향해 다가오고 있던 그 순간, 단종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민간에는 단종의 주검이 청령포(淸?浦)에 떠있는 것을 엄흥도(嚴興道)가 남몰래 수습하여 지금의 장릉(莊陵) 자리에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서섭은 단종의 원통한 마지막 순간을 듣고 통곡했다. 어린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산은 문득 텅 빈 듯했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하늘의 해도 빛을 잃었다. 모든 백성들이 목을 놓아 울부짖으니 집집마다 부모가 별세한 듯 온 세상이 슬픔에 잠겼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살아남아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으니, 장차 죽어 저승에서 어린 임금을 어찌 뵐 수 있을까! 서섭은 '문영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을 써서 소년 임금의 애통한 원혼을 위로하고, 또 자신의 참담한 심사를 애써 달래었다.
山空木落日無光 산은 비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해도 빛을 잃었는데
痛哭家家考?喪 통곡소리 집집마다 요란하니 부모를 잃은 듯
堪愧微臣生在世 부끄럽구나 못난 신하 살아 이 세상에 있으니
他時地下面何相 뒷날 지하에서 무슨 낯으로 뵈올 것인가
▲ 덕산서원의 사당 |
ⓒ 정만진 |
그 후 1920년, 후손 서의곤이 집을 수리하던 중 서섭이 남긴 문장들이 상자에 담긴 채 발견되었다. 무려 400년만에 서섭의 행적이 세상에 확연하게 드러난 찰나였다. 후손들은 자랑스러운 선조 서섭을 기리기 위해 1926년 재실 첨모당을 건축했고, 첨모당은 1994년에 이르러 덕산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덕산서원 강학 공간에는 4칸 강당인 충정당, 각각 3칸 건물인 동재 구인재와 서재 존성재가 있다. 강당 뜰 남쪽에 서원 사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강당과 구인제 사이 삼각지에는 서섭 선생 신도비가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 덕산서원 외삼문 |
ⓒ 정만진 |
사당에는 서섭의 아들인 서감원(徐坎元)도 배향되어 있다. 서감원은 1464년(성종 15) 임금의 잘못을 질타하는 상소를 궁궐에 제출했다가 끌려가 고문을 당한 바 있는 지조 곧은 선비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셈이다.
뿐만 아니다. 서섭의 형인 서제(徐濟) 또한 수양의 왕위 찬탈이 낳은 충신이었다. 서제는 계유정난 당시 하양현감이었는데, 단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섭은 뒷날 형의 제문에 "하양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푸시니 백성들은 마치 복숭아꽃이 봄바람을 만난 듯하였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어렵고 위태로워 벼슬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몇 년 동안 벼슬자리에 계신 것은 상왕(단종)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상왕께서 승하하시는 변란이 있자 사직하시고 집으로 돌아와 이름과 자취를 감추시고 이 세상과 뜻을 끊으셨습니다." 하고 썼다.
▲ 덕산서원 앞 안내판 |
ⓒ 정만진 |
사당으로 들어서는 문이 특이하다. 내삼문인 유현문이 있는데도 신도비 뒤쪽에 다시 전향문(傳香門)이라는 작은 문이 다시 나 있다. 전향문, 향기가 전해지는 문이라는 이름이다. 단종에 대한 서섭과 서제의 충절이 서려 있고, 임금의 선정을 독려하다 화를 당한 서감원의 선비다운 삶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덕산서원, 이곳은 아직도 조선 시대 선비들의 향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선비들의 덕이 산을 이루고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덕산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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