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길 낭떠러지 사이로 난 길, 심장이 '쫄깃'
[오마이뉴스 글:정만진, 편집: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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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사진) 도선굴 입구의 대혜 폭포 (가운데 사진) 절벽에 난 좁은 길로 도선굴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오른쪽 사진) 절벽 입구에는 '본 도선굴은 험준한 암벽에 위치하여 매우 미끄럽고 위험하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 정만진 |
대혜폭포보다 더 '추운' 도선굴 가는 절벽길
그런데 금오산에는 대혜폭포 말고도 사람의 마음을 오싹하게 만들어주는 명물이 하나 더 있다. 도선굴이다. 아니, 도선굴로 들어가는 절벽길이다. 천길 바위 벼랑에 실낱같이 붙어 있는 가느다란 이 길은, 쇠사슬로 된 안전망이 장치되어 있지 않다면, 아마 아무도 걸어가지 못할 것이다.
길 입구에 세워져 있는 '금오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장' 명의의 '알림- 본 도선굴은 험준한 암벽에 위치하는 까닭에 들어가는 길이 좁고 미끄러워 매우 위험하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는 경고판을 무심히 지나쳤던 사람도 막상 이 절벽길로 들어서고 나면 자신의 안전불감증을 뉘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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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선굴 가는 길 |
ⓒ 정만진 |
도선과 신라 멸망 |
경주 대릉원(황남대총, 천마총, 미추왕릉) 후문 밖에 있는 노동동 봉황대는 신라 멸망에 서린 풍수지리설의 전설을 말해주는 곳이다. 높이 22m 길이 82m의 봉황대는, 황남대총처럼 표주박 모양으로 생긴 쌍분을 제외하면, 단독 고분 중에서는 경주 최대의 무덤이다. 봉황대는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곳은 묻혀 있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봉황대'라는 무덤 이름만은 일찍부터 알려져 왔다. 이는 고려 태조 왕건 덕분이다. 자식들에게 '전라도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킬 가망이 많으니 등용하지 마라' 등의 <훈요십조>를 남긴 것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왕건은 풍수지리설 심취자였다. 왕건은 풍수지리설 창시자인 도선에게 신라가 빨리 망하도록 할 비법을 물었다. 도선을 경주 땅이 배 모양이니 그것을 이용하라고 가르쳤다. 왕건의 조종을 받은 풍수지리가들은 신라 조정에 '경주는 봉황 모양의 땅이다. 그런데 지금 봉황이 날아가려 한다. 봉황이 날아가면 신라는 망한다. 봉황의 알을 만들어 날아갈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신라 조정은 커다란 알을 만들어 경주 가운데에 놓았다. 무거운 흙덩어리를 실었으니 이제 배는 빨리 가라앉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신라가 멸망한 뒤 봉황의 알이 바로 봉황대라는 소문이 퍼졌다. |
고려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이 도선굴과 대혈사(大穴寺, 도선굴 아래 해운사)에 숨어살며 도학(道學, 성리학) 공부에 전념한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도선굴은 임진왜란 때에는 암벽 틈으로 기어 오르는 칡덩굴을 부여잡고 올라와 사람들이 숨어지냈던 피란처이기도 했다. 대혜폭포에서 절벽 옆을 타고 나 있는 통로는 1937년경 선산군 구미면에서 개통한 것이다.'
안내판의 내용을 문법에 맞게, 글의 흐름을 바로잡아가며 읽어본다. 물론 원문도 굴의 규모, 성격, 이름 유래, 깃들어 있는 전설, 진입로 개설 주체와 시기 등을 빠짐없이 잘 설명하고 있다.
다만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빠뜨리고 있어 굴을 찾아온 역사여행자들을 아쉽게 한다. 도선굴과 관련되는 사람으로서는 도선과 길재 못지않게 이 지역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인물인데, 그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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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지리의 창시자인 도선 대사의 신라 멸망 유도 설화가 깃들어 있는 경주 봉황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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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이 김종무에게 전해졌다. (경남 함안) 사근도역에서 찰방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종무는 부랴부랴 (경북) 선산으로 올라와 가족들을 금오산 대혈(大穴, 도선굴)에 피신시켰다. 그리고는 단신으로 상주로 달려갔다. 그 날이 4월 23일.
이날 상주 북천변은 피바다가 되었다
조정에서 내려보낸 순변사 이일(李鎰)은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고 없었다. 진중은 텅 비어 있었다. 김종무는 상주판관 권길(權吉, 1550-1592)과 함께 의병 800명 규합,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과 맞섰다. 그러나 중과부적에다 낙후된 무기로는 도저히 적들을 이길 수 없었다. 이날 상주 북천변 백사장은 피바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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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선굴에서 내려다 본 정면 풍경. 아래 작은 집이 대혈사의 후신인 해운사이다. 1592년, 김종무의 가족들은 상주 싸움터로 간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도선굴에서 줄곧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주 북천변에서 죽었다. |
ⓒ 정만진 |
어느덧 아이는 자라 스무 살이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유년의 한이 맺힌 도선굴 아래에 움집을 짓고 글을 읊으며 은둔하여 살았다. 조정에서 그의 선친 김종무를 기려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지만 그는 "벼슬 하러 한양으로 가려면 상주땅을 거쳐야 하는데 선고(先考,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도 거두지 못한 불효 자식이 어찌 그 길을 밟아 또 다시 불효를 저지를 수 있으리오?" 하며 사양하고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아버지가 죽은 땅을 내가 어찌 밟을 수 있겠는가!
<구미 시지>는 '뒷사람들이 그의 높은 뜻을 기려 도선굴 안에 욕담 김선생 영귀대(浴潭 金先生 詠歸臺)를 새겼다'고 전한다. 도선굴 안이 너무나 캄캄하여 '욕담 김선생 영귀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발견해도 일반인은 글자의 윤곽을 파악할 수도, 내용을 독해할 수도 없다. 당연히 김종무와 그의 가족들이 겪은 임진왜란의 비극은 우선 안내판을 통해서라도 알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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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무 충신정려비, 구미시에서 고아읍으로 가는 대도로변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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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가 '산 14'로 되어 있어 이곳 역시 산이 아닌가 싶지만, 도시 개발로 인해 지금은 어마어마한 대도로변이 되었다. 아주 잘된 일이다. 이런 비석과 비각을 '현창(顯彰, 밝게 드러냄) 시설'이라고 하는데 이보다 더 가시적인 현창 사업을 달리 없을 듯하다. 길가에 말끔하게 서 있는 정려비 앞에 서서 안내판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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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신 김종무지려'가 새겨져 있는 김종무 비. 1675년(숙종 1)에 세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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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원년(1675) 국가에서 충신을 정려하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忠臣 金宗武之閭(충신 김종무지려)'이고 현판에는 임진왜란 때의 전공과 1675년 정표(旌表) 이래 상주 충렬사 배향, 이조판서 증직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려각은 고종 3년(1896)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계 변씨의 애절한 죽음, 그녀는 무엇을 소망하였을까
도선굴과 김종무 충신정려비를 보았으니 이제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 563번지에 있는 '초계 변씨 정려각'을 찾아볼 일이다. 그녀는 도선, 길재는 물론 김종무에 견줄 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당대 이 지역 사람들의 큰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다. 빗돌은 1859년(철종 10)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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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구미시 도개면 신곡리 563번지에 있는 변씨 정려각과 비석. 왜적들의 능욕을 피해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은 그의 혼령이 애초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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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서는 바람을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갔다. 혈서는 집들을 넘어 마을 어귀에 가서 떨어졌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녀의 마음을 혈서는 잘 받들어주었던 것일까.
'뒷날 나라에서는 변씨에게 숙부인을 증직하고 혈서가 떨어진 자리에 정려를 세워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였다'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녀에게는 숙부인과 이 정려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고, 애꿎게 죽은 여섯 살 딸의 목숨을 살려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소망이었던 것을! 문암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마을 어귀 논밭 가운데에 쓸쓸히 서 있는 '초계 변씨 정려각' 앞에서 나그네는 문득 눈물이 젖는다.
▲ '선산 삼강(三綱)정려'는 문화재자료 333호이다. 삼강정려는 이곳 봉계마을(봉한리)에서 난 충신, 효자, 열녀 세 분을 기려서 후세에 귀감(龜鑑)이 되도록 나라에서 표창한 징표이다. 충신은 야은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이고, 효자는 부모님을 지성으로 봉양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한 배숙기(裵淑綺)이며, 열녀는 남편이 왜구에 잡혀간 후 8년을 하루같이 정절을 지킨 조을생의 아내 약가(藥哥)이다. 이 삼강정려는 경북 구미시 고아읍 봉한3길 28에 있다. 주소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모든 곳'의 안내 주소가 틀려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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