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에 핀 유채꽃, 여기도 난리가 아니었단다
[오마이뉴스 글:유혜준, 편집: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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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부스키의 상징인 가이몬다케. 산 정상은 구름이 보여주지 않았다. 다음에 또 오라는 거지? |
ⓒ 유혜준 |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걸으러 갈 때 꼭 준비하는 것들이 있다. 비옷, 장갑, 모자. 언제든지 배낭을 들고 집을 나설 자세가 되어 있으니, 그것들은 늘 찾기 쉬운 장소에 보관해둔다. 한데 배낭을 꾸리면서 찾는데, 없다.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이러고 있는 거다. 결국, 비옷을 찾지 못해 1회용 비옷을 챙겼다.
비옷의 행방이 떠오른 건 가고시마행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이었다. 아, 그렇지. 배낭을 바꿨지. 내 발 아래 엎어져 있는 배낭은 지난 1월에 선물 받은 새것이었다. 걸으러 갈 때마다 메던 배낭이 아니라. 비옷은 옛 배낭 안에 넣어두었다. 도보여행을 떠날 때 가져가는 걸 잊지 않으려고. 그리고 까맣게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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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숲길은 가뭄의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
ⓒ 유혜준 |
규슈올레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주말마다 규슈올레 축제가 열리고 있다. 길 위에서 열리는 축제는 별 거 아니다. 걷는 것이 전부다. 코스를 온전하게 걸어서 내 마음에 품는 게 규슈올레 축제가 아닐까.
규슈올레 축제는 3월까지 열릴 예정이다. 나는 지난 13일과 14일에 이부스키 가이몬 코스와 기리시마 묘켄 코스를 걸었다. 걷고 난 소감은? 규슈올레 축제가 끝나기 전에 배낭 메고 규슈로 떠나라, 고 권하고 싶다. 길은 그대를 행복하게 하리니.
2012년 2월, 4개 코스가 길을 열면서 시작된 일본 규슈올레는 17개 코스로 늘어났다. 전체 길이는 196.5km에 이른다. 매년 4개 코스가 꾸준히 늘어난 셈이다. 이 가운데 6개 코스를 걸었는데, 이번에 가고시마현의 이부스키 가이몬 코스와 기리시마 묘켄 코스를 걸으면서 걸은 길이 8개 코스로 늘었다. 걸은 코스가 하나씩 늘어나는 재미, 아주 쏠쏠하다.
제주올레와 규슈올레의 관계는 이미 너무 잘 알려져 있으므로 생략한다. 궁금하면? 인터넷 검색하시라. 널린 게 정보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해남 땅끝마을 정도인 이부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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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최남단에 있는 JR니시오야마역. 철로는 어디를 향해 이어지고 있을까? |
ⓒ 유혜준 |
이부스키 가이몬 코스 출발지는 일본 최남단역인 니시오야마역이지만, 이날 우리(규슈올레 축제 참가자들)는 도착지인 가이몬역에서 출발해 나시오야마역까지 걸었다. 코스를 거꾸로 걸었다.
가고시마 현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이부스키는 우리나라로 치면 해남 땅끝마을 정도라고 할까? 교통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 개인이 찾아가려면 시간과 함께 마음도 넉넉히 잡아야할 것 같다. 어차피 규슈 남쪽 끝까지 갔는데, 여유를 부리면서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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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R가이몬역. 무인역에 기차가 들어왔다. |
ⓒ 유혜준 |
때 맞춰 가이몬역에 한 량짜리 기차가 들어온다. 기차를 탈 것도 아닌데 시간을 기차게 맞췄다. 역무원이 없는 역에 멈춘 기차에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정감이 있어 보이는 건 내가 여행자이기 때문이리라.
역 주변에는 유채꽃들이 듬성듬성 피었다. 제주도보다 남쪽에 있는 가고시마현 이부스키는 1월에 유채꽃이 핀단다. 겨울이 오다가 주춤거리는 사이에 봄이 오는 곳이 이부스키인가 보다. 하지만 올해, 가고시마현에도 우리나라 제주도처럼 이상기온 영향으로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40~50년만의 폭설이었다나. 그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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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라키키 신사의 구지(宮司)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길을 걷는 건 이래서 행복하다. |
ⓒ 유혜준 |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걷던 구지는 신사 밖에 세워둔 자동차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자동차에서 남녀 한 쌍이 내린다. 아, 무엇을 하려는지 알겠다. 새 차의 안전운행을 기원하는 간단한 의식을 치르려는 것이다.
구지는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나무상자 뚜껑을 열어 손에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차를 향해 뿌렸다. 공중으로 점점이 흩어졌다가 떨어지는 화려한 색깔의 종이조각들. 남자와 여자는 구지를 향해 공손하게 절을 한다.
의식을 마친 구지는 근엄한 표정을 풀지 않고 신사 안으로 사라졌고, 남자와 여자는 자동차를 타고 떠났다. 의식을 치르는 시간은 짧았지만, 구지의 축복은 그 자동차가 운행하는 동안 이어지리라. 나도 그 차의 안전운행을 기원했다.
이부스키 가이몬 코스를 걸을 때는 인내심을 갖고 길 표시를 찾아야 한다. 길을 안내하는 리본이나 표지판이 사라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나섰을 때, 한 번도 길을 잃지 않는 건 정말 재미없다. 길이란 몇 번쯤 잃고 헤매야 그 길을 온전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야 애착도 간다. 아닌가, 집착인가?
파란 하늘이 너무 아름답다는 이부스키 가이몬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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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길이 흙길일 수 없다. 이부스키 가이몬 코스는 이런 길을 오래 걸을 각오를 해야 한다. |
ⓒ 유혜준 |
이부스키 가이몬 코스는 흙길보다는 포장된 아스팔트길이 긴 구간이다. 베테랑 도보여행가도 이런 길에서는 발에 물집이 잡힐 수 있다. 길이란 말이지, 초보와 프로를 구분하지 않는 법이지.
작두콩 밭을 지나고, 마을길을 지나고, 밭과 밭 사이를 지나는 동안 흙길이 없어 아스팔트길을 걸어야 했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을 타박타박 걸었을 것이나, 비 덕분에 길이 푹 젖어 그럴 일은 없었다.
이부스키를 상징한다는 가이몬다케는 정상 부근이 비구름으로 덮여 끝내 모습을 완전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은 아쉬웠다. 비는 걷는 내내 끈질기게 내렸다. 비구름이 하늘을 장막처럼 덮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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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지리 포구에서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했다. |
ⓒ 유혜준 |
끝없이 펼쳐진 것 같은 양배추 밭을 뒤로 하고 도착한 곳은 일본 최남단역인 니시오야마역. 오지마을에 있으니 찾는 이가 없을 것 같지만, 이런 역을 찾아 떠나는 여행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 아시는가?
역무원이 없는 니시오야마역에서는 노란 우체통이 서서 나그네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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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R니시오야마역에 있는 노란 우체통.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떠나온 곳은 그리움으로 남았다. |
ⓒ 유혜준 |
어느 사이엔가 비는 그쳐 있었다. 하지만 일기예보는 맑음이 아니다. 내일도 비가 이어질 거란다. 화창하게 갠 날, 이부스키 가이몬 코스를 걷고 싶어졌다. 파란 하늘이 가슴에 아로새겨질 정도로 아름답다는 게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의 설명이었기 때문이다.
이부스키 가이몬 코스를 걸을 때 푸른 하늘을 볼 수 없었기에 푸른 하늘을 볼 때마다 이부스키 가이몬 코스가 생각날 것 같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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