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에게 선물로 보낸 울산동백, 어떤 꽃이길래

정만진 2016. 1. 25.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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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의 확산을 막은 '1차 울산성 전투' 현장 답사기

[오마이뉴스 글:정만진, 편집:최은경]

 울산왜성 전투도의 일부(울산 충의사 전시관)
ⓒ 충의사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달성동)의 '달성공원' 안에는 '달성'이 있다. <삼국사기>에 '(신라 첨해왕 15년인 261년) 달벌성을 쌓고 내마 극종을 성주로 삼았다(築達伐城以奈麻克宗爲城主)'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달성은 지금도 당당히 실물을 보여주면서 대구의 문화유산 자랑에 큰 힘을 보태고 있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달성이 국가사적 62호로 지정된 근거를 설명해준다. 누리집은 달성에 대해 '경주 월성처럼 평지에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 지방에서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략)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달성공원에는 '달성'이 있지만, 학성공원에는 '학성'이 없다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공원3길 54(학성동)의 '학성공원' 안에는 '학성'이 없다. 하지만 1928년부터 '공원'이 된 이곳에도 1597년 이전까지는 학성이 있었다.

학성도 대구의 달성처럼 삼국시대 때 축성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계변성(戒邊城, 물가를 지키는 성)이었다. 그런데 신라 말 언젠가 천신(天神)이 학을 타고 내려왔다 하여 "신학성(神鶴城)"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고, 다시 "학성(鶴城)"으로 줄여서 불려졌다.

학성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부수어버렸다. 가토는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허문 돌을 옮겨와 학성 자리에 왜성을 쌓았다. 그 결과 지금의 학성공원에는 '학성' 아닌 '울산왜성(蔚山倭城)'의 일부만 남게 되었다. 형태마저 사라진 학성은 문화재의 지위를 상실했고, 침략군의 유물인 울산왜성의 잔재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7호로 지정받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울산좌병영성은 1417년(태종 17)에 축성되었다. '2010년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병영성이 임진왜란 때 파괴된 후 보수한 흔적이 다수 확인되었다.'는 현장 안내판의 마지막 문장은 가등청정이 이 성을 부수어 그 돌들로 울산왜성을 쌓았다는 뜻이다.
ⓒ 정만진
1597년 12월 23일(음력) 조명연합군이 일본군의 본거지 울산왜성을 공격한다. 도원수(都元帥, 조선 군부 최고위직)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 1만여 명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조선 파병 명군 2인자) 양호가 이끄는 명군 4만여 명은 울산왜성을 포위했다. 울산왜성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1만여 장졸이 주둔하고 있었다. 조명 연합군은 약 5만 명에 이르러 군대 규모로는 일본군을 압도했다.

조명연합군은 울산에서 승전하면 침략군을 바다 너머로 내쫓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울산성 전투에 그토록 큰 힘을 쏟았던 것이다. 명나라 황제 신종이 병부상서(국방부장관) 형개에게 상무검(尙武劍)을 내린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신종의 검 하사는 '병마(兵馬)를 부리는 권한을 전적으로 위임하니 반드시 전승을 이루라. 혹 명령에 불복하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참수하라'는 자신의 의지를 널리 선포한 정치적 행위였다.

명군 지휘관 양호, 선조에게 울산성 전투 동참을 제안  

선조 역시 울산성 전투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었다. 숙종 때 편찬된 역사서 <조야첨재>(朝野僉載)에 따르면, 형개의 지시를 받아 울산성 전투를 총지휘하게 된 양호가 '불초한 이 몸이 군사를 이끌고 남정(南征)하니 국왕께서 동행하시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하고 권유했을 때 선조는 즉각 그 제안을 수락했다. 국왕이 전투를 지켜보고 있으면 장졸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울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울산왜성 사적비가 태화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본래 이 성은 바다와 태화강에 닿아 있었다. 그래서 신라 때는 "계변성(戒邊城)"이라 불렸다. 계변성이라는 이름은 이두식으로 해석하면 대략 '물가(邊)를 지키는(戒) 성(城)' 정도의 뜻으로 추정된다. 사진에서도 태화강의 푸른 물결이 비의 왼쪽 앞부분에 비치고 있다.
ⓒ 정만진
이튿날 선조와 양호 두 사람은 나란히 한양 성문을 나섰다. 양호가 일부로 험한 길을 선택하더니 갑자기 급하게 말을 몰았다. 영문도 모르는 채 선조 또한 채찍을 날려 나란히 달렸다. 한참 뒤, 양호가 선조를 돌아보며 말했다.

"국왕께서 신색(神色)이 한결같으시고 용안이 편안하신 것을 보니 군국대사(軍國大事, 외국과의 큰 전쟁)를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다."

류승서

문화류씨(文化柳氏)로, 1566년(명종 21)에 태어나  1648년(인조 26) 타계했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류승서는 임진왜란 초기 선조를 호위하는 선전관으로 재직했고, 그 이후 부산첨사, 인동도호부사, 함경도남병사(南兵使) 등을 역임했다.
류승서는 본래 전북 태안에서 출생했지만 만년에는 현재의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에 거주했다. 그가 약목으로 이주한 것은 1605-1607년 초대 인동도호부사를 역임했기 때문이다.
경북 선산과 칠곡 사이에 있는 현(지금의 면) 규모의 인동이 도호부(목과 군 사이)가 된 것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곳의 군사적, 지리적 중요성이 부각된 결과였다. 류승서는 인동도호부사 재임시 천생산성(天生山城, 경상북도 기념물 12호, 경북 구미시 장천면 신장리) 조방장(助防將)을 겸임했는데, 그의 임기 중에 천생산성이 보강, 축조되었다.
'함께 할 수 있다'는 양호의 말에 선조가 불쾌한 낯빛을 드러내었는지 여부는 <조야첨재>가 그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 까닭에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이날 선조의 뒤를 제대로 따라붙은 호위무사는 한 명도 없었다. 오직 선전관 류승서(柳承緖)만이 혼자 추격해 와 임금이 말에서 내리려 할 때 고삐를 잡았을 뿐이었다.
<조야첨재>의 저자는 이 부분을 쓸 때 선조의 기마술을 상찬하는 데 집필 목적을 두었을 듯하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의 오류'와는 무관하게, 이 기사는 선조와 명군이 울산성 전투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증언해준다.

'한강까지 동행한 양호가 국왕에게 환궁하시기를 굳이 권하여' 선조가 울산성 전투에 동행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임금의 참전 결심을 곁에서 직접 보았거나, 또는 말로 전해들은 조선의 장졸들이 사기충천하여 싸움에 임했을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5만 조명연합군, 1만여 일본군을 총공격

울산왜성이 조명연합군의 총공격을 받게 되자 순천에 머물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울산에서 가장 가까운 서생포와 양산 주둔 일본군부터 시급히 원병으로 보냈다.

조명연합군은 양산에 군대를 보내 적을 압박하는 한편, 서생포 왜성에서 오는 일본군 구원병들을 태화강에서 전멸시켰다. 별장 김응서를 중심으로 한 조선군 특공대의 활약으로 왜성 둘레의 급수원이 차단된 것도 적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울산왜성의 일본군들은 말을 죽여 끼니를 해결하고, 눈을 녹여 식수로 사용하는 처지에 빠졌다.

 울산왜성 사적비는 자신을 '사적 9호'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7호'일 뿐이다. 1963년 지정 때는 국가사적으로 인정받았지만 1997년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로 하향, 재조정되었다. 일본침략군이 남긴 왜성을 한국의 국가 사적으로 떠받들 수는 없는 일이다.
ⓒ 정만진
그러나 1598년 1월 4일, 조명연합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13일에 걸친 전투 결과 울산왜성의 1만여 일본군도 500명 안팎만 살아남고 대부분 죽었지만, 조명연합군 또한 1만 5천 명이나 전사했다. 뿐만 아니라, 부산, 양산, 안골(진해), 가덕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11명의 일본군 장수들이 6만여 대군을 이끌고 들이닥친 데에는 불가항력이었다. 전세가 역전되었다.

일반적으로 보면 1차 울산성 전투는 서로가 "이겼다"고 할 수도 없고, "졌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쌍방간의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을 바다로 내몰아야 하는 조명연합군의 본래 공격 목적에 견준다면 이 전투의 결과는 아군의 패전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승전했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가 명 황제 신종의 분노를 사 처형 직전까지 몰린 끝에 간신히 벼슬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마무리된 양호의 신세가 그 점을 단적으로 상징해준다.

울산성 1차 전투, 정유재란 전선 확대 막아

그래도 1차 울산성 전투가 정유재란의 경과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는 정유재란 때 전선이 더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데에 1차 울산성 전투가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정유 재침을 주장한 가등청정도 시종 군량 부족과 식수마저 끊긴 열세 속에서 최악의 고전을 경험하게 되어 왜란이 종결될 때까지 북상을 단념하고 수성에만 힘쓰게 되었다'는 해설이다.

 학성공원에 남아 있는 일본왜성 성벽의 흔적
ⓒ 정만진
'1차 울산성 전투(도산성 전투)는 시종일관 조명연합군의 공성전(攻城戰, 성을 공격하여 벌이는 전투)과 왜군의 수성전(守城戰, 성을 수비하느라 벌이는 전투)으로 이어졌다. 이중성(二重城)인 도산성의 외성은 토성과 목책으로 수축되어 있어 (조명연합군이) 개전 초기에 돌파하였지만, 내성은 험한 지형을 최대한 살려 석축을 쌓고, 토굴(土堀, 흙을 파서 만든 굴)과 방옥(房屋, 집 안에 임시로 만든 작은 방)을 적절히 배치하여 조총전에 매우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성을 공격하는 기계와 기구를 준비하지 못한 조명연합군은 화포 공격 등 화공전만으로 힘을 쓰지 못하였다. 그리고 성의 배후지는 바다로 통하여 서생포와 부산포 방면의 왜군이 응원하여 왔으므로 조명연합군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많은 부상자와 전사자를 남긴 채 회군하였다. - <신편 한국사>

<신편 한국사>는 '1차 울산성 전투'의 경과를 위와 같이 요약하고 있다. <임진전란사>의 이형석도 '끝내 동정군(東征軍, 명군)이 함성(陷城, 성 함락)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적에게 구원병이 있었다는 것이 그 첫째요(원문은 '其 一이요'), 천시(天時, 날씨)가 냉한(冷寒, 맹추위)하고 불순(不順, 연일 폭우가 쏟아지는 등)하였다는 것이 그 둘째요, 공성 준비가 불충분하였다는 것이 그 셋째'라고 기술하여 대략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다만 류성룡은 전혀 다른 견해를 <징비록>에 밝혀 두었다. 유성룡은 "천병(天兵, 명군)이 전리품 챙기는 데 욕심을 내어 즉각 공격을 미룬 탓에 적들이 문을 닫아 걸고 지킬 수 있게 되어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天兵貪擄獲之利 不卽進攻 敵閉門固守 攻之不克)"라고 기술했다. 평가의 타당성 정도는 논외로 하더라도, 겉으로는 명군을 하늘이 보내준 군사로 떠받들면서도 내용상으로는 물욕에 찌든 오합지졸로 힐난하고 있는 류성룡의 수사법이 눈길을 끈다.

 울산왜성 본환(본성)의 흔적
ⓒ 정만진
가토는 산 정상 중심에 본성을 세운 다음 그 북쪽과 서북쪽에 2겹, 3겹의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1300m에 이르렀고, 높이는 10∼15m나 되었다. 그리고 성벽 상단에는 공격군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다시 망루 12개를 설치했다. 바다에 닿아 있어 배가 성 아래까지 들어와 정박할 수 있는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의 둘레에는 흙 제방을 쌓고 그 위에 나무 울타리도 설치했다.

공원 정상부에 닿으면 본환(本丸)을 설명해주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왜성의 본환은 우리말로 본성(本城)을 뜻한다. 울산왜성에 본환이 존재했다는 것은 두(二) 번째 성(城)인 이지환(二之丸)과 세(三) 번째 성(城)인 삼지환(三之丸)도 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해발 50m 산 정상부에 자리잡은 본환의 지대가 가장 높고, 본환 서북쪽 해발 25m 지점의 삼지환이 가장 낮아, 본환 북쪽 35m 높이에 축성된 이지환이 그 둘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왜성의 본환(本丸)은 우리말 본성(本城)에 해당

본환은 축성 당시 둘레가 763m에 달했는데, 성벽은 모두 병영성과 울산읍성을 허문 뒤 옮겨온 돌로 쌓았다. 성벽 상부에는 담장(土?, 도베이, 아래 네 사진 중 맨 왼쪽)을 설치했고, 내부에는 전투용 누각(矢藏, 야구라, 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6개와 거주용 막사 건물 2동을 건립하였다. 출입구는 동쪽과 북쪽 두 곳에 내었다. 북쪽 출입구는 이지환으로 오가는 통로가 되었다. 

 왜성의 모습 (왼쪽부터) 담장(일본 구마모토성熊本城 사례), 전투형 누각(요마츠아마성伊像松山城), 삼지환 출입구(카부키몬冠木門, 아코성赤穗城), 본환 출입구(야구라몬櫓門, 히코네성彦根城)
ⓒ 울산중구청
이지환으로 연결되는 본환의 북쪽 출입구는 안으로 꺾여들어간 'ㄱ'자 형태로 만들어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런 출입구를 '마스가다 고구치(?形虎口)'라 불렀는데, 일본 성곽 중 가장 발달한 형식이었다.

마스가다 고구치는 외부의 적이 문 안을 볼 수 없게 만듦으로써 불안감을 조성하고, 만약 통과하려는 공격자가 있으면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효율성을 자랑하는 구조였다. 그런 점에서 마스가다 고구치는 우리나라 성곽의 옹성(甕城)과 비슷했다.

가토는 석축과 석축 사이에 누각 건물을 걸친 후 그 아래에 출입문을 단 2층 성문(櫓門, 야구라몬, 위 사진 맨 오른쪽)을 만든 다음, 2층 벽면에 총구를 만들어 조총 사격의 거점으로 사용했다.

가파른 언덕을 기어올라야 하는 아군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편한 자세로 사격을 하는 일본군에 비해 원초적으로 불리했을 뿐만 아니라, 휼륭한 은폐 및 엄폐물의 보호를 받고 있는 적군과 달리 몸을 드러낸 채 싸워야 했다. <신편 한국사>가 '(울산왜성 전투는 일본군의) 조총전에 매우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라고 기술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층 성문 벽면에 조총 사격할 총구 구멍 설치

이지환은 축성 당시 성벽 둘레가 462m였고, 성벽 상부에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담장(위 사진 맨 왼쪽)을 설치했다. 성벽 모퉁이에는 전투형 누각(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 2개를 건립했다. 물론 담장과 누각은 삼지환의 성벽 위에도 설치되었다. 다만 삼지환에 설치된 외부 출입용 문은 아주 간단한 구조를 지닌 단층문(冠木門, 카부키몬, 왼쪽에서 세 번째 사진)이었다.

 필자가 추천하는 울산왜성 답사로
ⓒ 정만진
울산왜성 답사로

* 주차장에서 학성공원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산 정상부로 가는 계단길이 나온다. 그러나 이 계단길만 걸어서는 울산왜성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성은 무릇 성벽 아래에서 위로 보아야 실감이 난다.

닦여진 길은 없지만 <'봄 편지' 노래비>에서 곧장 길을 오른쪽으로 이탈하여 산비탈, 즉 성벽 비탈을 걷는다. 무너져 곳곳에 쌓인 돌들이 울산성 전투의 격렬한 현장을 실감나게 해준다. 대략 중간쯤 왔다 싶은 곳에서 위로 쳐다보면 공원 정상부의 평평한 땅과 울산왜성 사적비가 보인다. 여기서 비탈을 타고 곧장 올라간다.

(1) 울산왜성 사적비를 읽는다. 1차, 2차 울산성 전투의 경과를 학습하고, 또  문화재자료를 사적이라고 새겨놓은 까닭도 헤아려본다.
(2) 사적비 앞에 조성된 작은 동백나무 단지를 본다. 가등청정과 관련되는 내용이므로 반드시 안내판을 읽어야 한다.
(3) 사적비와 동백나무 단지를 오른쪽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면 본환(안내판과 유적)이 나온다,
(4) 본환 유적을 둘러보는 중 <김홍조 공적비>를 보게 된다. 울산왜성은 1913년 이래 학성공원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경상좌병영 우후를 역임한 후 계몽운동가로 활동한 김홍조(1866-1922)가 이곳 일대의 개인 소유지 23,141㎡을 사들여 흑송, 매화나무 등을 심은 것이 공원화의 시초였다. 그러나 미처 조성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그는 사망했고, 1927년 아들 김택천이 아버지의 유업을 잇기 위해 땅과 식목을 울산면에 기증했다. 1928년 4월 15일, 울산 최초의 도심 공원 '울산 공원'이 탄생한다.
(5) <김홍조 공적비>에서 편편한 산책로를 따라 걸어 이지환 터를 답사한 후
(6) 삼지환 터(처음 공원 안으로 들어올 때 진입한 광장)로 들어간다.
(7) 삼지환 터에 있는 <'봄 편지' 노래비>의 동시를 읽는다.
(8) 노래비와 마주보는 채로 광장 건너편에 서 있는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 추모비에 참배한다.

* 박상진 의사 추모비 뒤에 서서 도로 건너편 높은 곳에 있는 충의사를 바라본다. 지금의 충의사 자리는 울산성 전투 당시 조명연합군이 본부를 설치했던 곳이다.
가토는 학성도 부수어 없앴지만 이곳에서 자라고 있던 꽃 한 종도 종적을 감추게 만들었다. 가토는 '울산동백' 또는 '오색팔중산춘'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받아온  이곳의 동백꽃을 모두 캐내어 도요토미에게 선물로 보냈다.

울산동백은 한 그루에 여러 색깔의 여덟 겹 꽃잎이 피어나는 겹꽃으로 일반 동백처럼 꽃잎이 통째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잎 한 잎 흩어지며 낙화하고, 개화 시기가 3월 하순부터 시작되는 특징을 지닌 희귀 품종이다. 게다가 울산동백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것이 죄가 되어 울산동백은 가토의 검은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보통의 동백꽃과는 달리 한 잎 한 잎 낙화하는 '울산동백'을 신두산(울산왜성)에서 발견한 가등청정은 그 꽃을 풍신수길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후 울산동백이 자취를 감추었는데 1992년 다시 그 종자를 일본에서 가져와 학성공원 안에 심게 되었다. 사진은 학성공원 정상부의 안내판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찍은 것이다..
ⓒ 울산중구청
세월이 흐르고 흘러 1989년, 울산동백이 교토 지장원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꽃을 처음 발견한 최종두 한국예총 울산지부장과 박삼중 스님 등은 많은 노력 끝에 임진왜란 발발 400주년이 되는 1992년, 울산동백을 우리나라로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2015년 5월 해방 70주년을 맞아 울산동백 종자나무를 다시 학성공원에 심었다. 물론 그렇게 한 것은, 울산동백에 우리의 역사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울산동백만큼 임진왜란과 직접적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학성공원에서 꼭 보아야 할 기념물이 하나 있으니 '봄 편지' 노래비가 바로 그것이다. 이 노래비는 1907년 울산에서 태어나 1940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서덕출을 기려 세워졌다. 서덕출은 다섯 살 때부터 척추 장애인이 된 후 서른넷 시퍼런 청춘에 생을 마감한 아동문학가로, '봄 편지'는 그의 나이 열여덟인 1925년에 썼다.

'봄 편지'는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본과 아주 무관한 시는 아니다. 핵심은 시어 '조선 봄'이다. 제비가 돌아오는데,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다.

최덕출의 '봄 편지'는, 현진건의 단편소설 '고향'의 제목이 1926년 처음 발표될 때는 '그의 얼굴'이었는데 창작집 <조선의 얼굴>에 실리면서 그렇게 바뀌었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 현진건도 최덕출도 조선의 '봄'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왼쪽부터 김홍조 공적비,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추모비, 서덕출의 '봄 편지' 노래비
ⓒ 정만진
1910년대 국내 무장독립투쟁을 이끈 박상진 의사

그런가 하면, 학성공원에는 1910년대 국내 무장 독립 투쟁을 이끈 의사를 기리는 추모비도 있다. 삼지환 터였던 광장을 가운데에 둔 채 '봄 편지' 노래비와 마주보고 서 있는 이 비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추모비'이다. 울산 태생의 박상진 의사는 판사 직을 내던지고 무장독립투쟁을 이끌던 중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식민지 전락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모두가 방황 중이던 1913년, 채기중, 김한종 등을 중심으로 한 경북 영주 풍기광복단과 서상일, 이시영 등을 중심으로 한 대구 조선국권회복단(전신 달성친목회)이 독립운동을 위해 각각 창단된다.

이 두 단체는 1915년 대한광복회로 발전적 통합을 이룬다. 박상진은 1910년대 국내 최대 독립운동단체였던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이었다.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1919년 3.1만세운동과 만주 항일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박상진 의사 추모비를 끝으로 학성공원 답사를 마친다. 의사의 추모비를 등진 채 도로 건너편을 바라보니 학성공원보다 훨씬 높은 산봉우리가 하늘을 가로막고 있다. 울산성 전투 당시 조명연합군 본부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울산 지역 의사들을 기리는 충의사가 건립되어 있다. 충의사를 향해 길을 떠날 차례다. 

 울산광역시는 박상진 의사의 고향답게 생가 복원(사진, 위), 동상 건립(사진, 아래 왼쪽), 흉상 건립(사진, 아래 오른쪽), 추모비 건립(학성공원) 등 의사를 기리는 사업을 많이 진행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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