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가야교역' 있다는 사실 아세요?

이윤옥 2016. 1. 14.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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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한국문화] 오사카 '다카이시신사'.. 왕인 모시다가 지금은 일본신으로 바꿔

[오마이뉴스이윤옥 기자]

오사카 날씨는 겨울인데도 마치 이른 봄처럼 화사했다. 이틀 전 반야사에 들렀을 때 활짝핀 수선화 꽃을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그제(11일) 왕인박사 신사를 찾아 나선 날도 구름 한 점 없이 쾌적했다. 왕인박사(王仁博士)를 모시는 다카이시신사(高石神社)는 숙소인 신오사카에서는 약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지만 열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한적한 오사카 외곽지역에 있었다.

▲ 다카이시신사 오사카 다카이시시(高石市)에 있는 과거 왕인박사 신사였던 다카이시신사 전경.
ⓒ 이윤옥
▲ 왕인 무덤 빗돌 오사카 히라가타시(枚方市)에 있는 왕인박사 무덤 빗돌.
ⓒ 이윤옥
참고로 왕인박사 신사는 다카이시시 다카시하마(高石市 高師浜4-1-19)에 있으며 무덤은 히라가타시 후지사카히가시마치(枚方市 藤阪東町2)에 있다. 이 두 곳은 같은 오사카부(大阪府)에 있지만 열차로 1시간 반 거리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왕인박사 무덤은 여러번 갔던 곳이라 이번에는 왕인박사 신사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다카이시신사(高石神社)를 찾아 가기 전에 기자는 김달수 선생이 쓴 <일본 속의 조선문화(日本の中の朝鮮文化, 講談社, 1972>를 정독하고 갔다.

"이곳에 있는 구가야교(舊伽羅橋)는 당시 가야국사람들이 일본에 건너와 이 부근에 거주한 곳으로 주변에 아시다가와(芦田川)에 놓은 다리 이름에 가야국 이름으로 붙여 놓은 것이다. 가야인들이 살던 곳은 훗날 백제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는 다카이시교육위원회가 쓴<다카이시시(高石市)에 관한 문헌집>에 있는 기록 가운데 일부로 김달수 선생의 책 178쪽에 있는 글이다.

"우리들은 가야교역(伽羅橋驛)이랑 주택으로 꽉 들어찬 주변을 걸으며 아아 ! 이곳이 그런 곳(가야인 들이 살던)이었단 말인가? 라는 생각밖에는 달리 할 수 없었다."

김달수 선생은 왕인박사 신사를 찾아가는 길에 가야교역(伽羅橋驛)에 내려서 서성였다고 했다. 김달수(1919~1997) 선생은 <일본 속의 조선문화(日本の中の朝鮮文化>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작가로 1970년부터 1991년까지 모두 12권 속에 고대 한반도인이 일본땅에 심어놓은 역사적인 사실을 발로 뛰어 써놓은 분이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가야교역

▲ 가야교역 1 과거 왕인박사 신사를 보러 가는 길에 만난 오사카 난카이철도 가야교역(갸라바시에키).
ⓒ 이윤옥
▲ 가야교역 2 가야교역은 작은 간이역으로 시계탑 뒤쪽이 차를 타는 홈이다.
ⓒ 이윤옥
▲ 가야교 공원 가야교역 앞의 작은 공원 표지판에도 '가야'라는 글자가 뚜렷하다.
ⓒ 이윤옥
왕인박사 신사로 가는 길은 다카이시하마역(高石濱驛)이 가깝다고 했지만 기자는 일부러 한 정거장 전인 '가야교역(伽羅橋驛, 갸라바시에키)에서 내렸다. 역이름만으로도 왠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가야교역은 아주 작은 시골 간이역이었다. 차표 파는 곳도 없이 가야교역에서 탔다는 확인표만 발급 해주는 역이었지만 기자에게 역의 크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철로는 고가 위를 달리고 있었는데 1층으로 내려와 개찰구도 없는 출구를 빠져나오니 아담한 가야교역공원(伽羅橋驛公園)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원이랄 것도 없는 나무 몇그루가 전부인 작은 공원에는 낡은 표지판이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도 '가야'라는 말이 쓰여 있어 반가웠다.

공원에 높이 서 있는 시계탑의 시간은 오후 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사람 그림자는 하나도 없었다. 이곳에서 사진 몇 장을 찍은 뒤 왕인박사 신사까지 걸어갈 요량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려 길을 물으니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가야교역에서 한 7분쯤 걸었을까?

▲ 다카이시신사와 기자 과거 왕인박사 신사였던 다카이시신사 앞에 선 기자.
ⓒ 이윤옥
멀리 왕인박사 신사인 다카이시신사(高石神社)를 알리는 커다란 깃발이 펄럭거린다. 아 저기가 왕인박사를 모시는 신사란 말인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신사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양력설을 쇠는 일본은 1월 15일까지 신사참배를 하는 기간이라 웬만한 규모의 신사에서는 참배하러 온 사람들로 바글거릴 테지만 왕인박사 신사는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이 신사의 현재의 제신(祭神)은 스쿠나히코나노미코토(少彦名命), 아마테라스오오미가미(天照大神), 이자나미노미코토(伊邪奈美命)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왕인박사를 모시는 곳이었다"라고 김달수 선생은 지적했지만 다카이시신사(高石神社)의 안내판에도 이곳이 왕인박사를 모시던 신사였음을 밝혀놓고 있었다.

이 신사의 이름인 다카이시(高石)는 왕인박사의 씨족인 고시씨족(高志氏族)을 가리키는 말로 옛 문헌에는 고지(古志), 고석(高石), 고지(高志), 고각(高脚)을 모두 일본어 고시(こし)로 발음을 했으나 지금은 고석(高石)이라는 한자를 '고시'라고 읽지 않고 '다카이시'라고 읽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왕인박사를 모시는 신사였지만 지금은 천조대신 등 다른 신을 모시고 있다고 다카이시신사 누리집에는 써놓고 있었다. (일본의 신사는 과거에 모시던 신을 명치 때 대대적으로 천조대신 등으로 바꾼 역사가 있다)

▲ 다카이시신사 다카이시신사 안에는 한때 왕인박사를 모시던 신사라는 유래가 적혀있다.
ⓒ 이윤옥
그러나 이곳은 1972년 김달수 선생이 방문했을 때도 제신(祭神)이 천조대신이었지만 선생은 이 신사를 '왕인박사를 모시는 신사'로 규정한 바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일대가 과거 가야인을 이은 백제인의 무대였으며 이 터에서 오래도록 백제계 고시씨족인 왕인박사를 모셔온 곳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원래 왕인박사를 모시던 터에 잠시 다른 신을 모신다고 해서 '왕인박사'와 무관한 곳이 될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전에 히라가타시(枚方市)에 있는 왕인박사 무덤에 갔을 때나 왕인박사를 모시던 이곳 다카이시신사에서나 느끼게 되는 찡한 가슴은 서로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 요시토메가즈오 오사카 히라가타시에 있는 왕인무덤을 보살펴 주는 요시토메가즈오 씨. (사진 민단신문 제공)
ⓒ 민단신문 제공
불현듯 텅 빈 신사 경내에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왕인박사는 4세기 백제로부터 공자의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왜국의 아스카문화(飛鳥文化)를 꽃피웠다, 이로서 일본에서 처음으로 한중일 3개국이 조우하게 된 것이다, 왕인박사를 심볼로 동아시아의 선린우호, 민간교류을 계속해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한 오사카 '왕인무덤의 환경을 지키는 모임(王仁塚の環境を守る?)'의 대표인 요시토메가즈오 씨(吉留一夫)가 그 사람이다.

그는 왕인박사 무덤이 있는 오사카 히라가타시(枚方市 藤阪東町)에 살면서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왕인박사 무덤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면서 왕인박사의 높은 뜻을 지난 30여 년간 지켜오고 있는 사람이다. 왜 왕인박사 신사에서 요시모토씨가 갑자기 생각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왕인박사 신사(神社)가 그렇게 초라하게 변질되어 있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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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신한국문화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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