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탈 당한 땅, 온기를 찾다.. 그리스도 사랑 증거한 서울 속으로
“그 길에 사랑도 있더이다.” 20년 가까이 한국사를 가르쳐온 최태성(44·분당 갈보리교회) 대광고 교사는 서울 중구 정동길을 걸은 뒤 기독교 유적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 정동은 구한말 우리가 주권을 잃던 치욕의 현장이었지만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 곳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선교 130주년과 광복 70주년을 맞아 최 교사와 올해 휴가기간에 갈 만한 서울시내 기독교 유적지를 찾았다.
지난 13일 정오 서울 동대문구 안암로 대광고에서 오전 수업 종료를 알리는 차임벨이 울렸다. 최 교사가 잠시 후 “모처럼 외출을 하네요”라며 밝은 표정으로 나왔다. 고3 담임이자 역사 담당인 최 교사는 낮에는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저녁에는 EBS 한국사 강의와 KBS 역사저널 ‘그날’ 녹화 등으로 바쁘다. 학생들 사이에 ‘큰별샘’으로 불린다. 그의 EBS 강의는 연간 20여만명이 수강한다.
“필경은 천국이 한국을 다 먹을 줄 아노라”… 선교사의 근거지 ‘정동’
대광고에서 정동제일교회로 이동하는 동안 최 교사는 정동에 대해 새로운 공간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정동 하면 역사적 아픔이 늘 떠올랐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후 겁에 질린 고종이 정동의 남의 나라 공관으로 피신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된 곳도 이곳 정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기독교 유적 답사를 준비하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다른 편에서는 선교사들의 헌신과 사랑이 계속됐다는 걸 깨달았어요.”
구한말 정동은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열강의 공사관들이 밀집해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인 1896년 고종은 정동 15-1번지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했다. 이완용 등 조정 대신 5인은 1905년 정동 5-1번지의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에 사인을 했다. 마음이 어수선하거나 날씨가 흐릴 때 하는 ‘을씨년스럽다’는 말은 이 조약이 체결된 해인 을사년에서 유래한다. 민족의 한(恨)이 느껴진다.
최 교사가 정동 34번지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앞에 섰다. “선교사 스크랜턴 모자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민간의료기관인 시병원을 시작한 곳이 여기입니다. 첫 환자가 누구인지 아세요? 길거리에 버려진 여인과 그의 어린 딸이었어요.” 1886년 유행하던 콜레라에 걸린 모녀는 의료선교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의 치료로 회복됐고 어린 딸은 후일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간호사가 됐다. 이 병원이 이화여대 부속 병원과 의과대학의 전신이다.
“대한을 세 나라가 먹으려 하니 일본과 러시아와 천국이라. 비록 일본과 러시아가 한국을 먹는다 하여도 필경은 천국이 다 먹을 줄 아노라.” 윌리엄 스크랜턴이 남긴 말이다. 우리는 구한말 배재학당으로 사용됐던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대 교육기관도 모두 정동에서 출발했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는 대부분 정동에서 시작됐죠. 초기 학생 중에는 고아가 많았습니다.” 1880년대 선교사들이 정동에 세운 배재학당, 이화학당, 구세학당, 정동여학당이 각각 오늘날 배재고, 이화여대, 정신여고, 경신고교의 전신이다. “초기 환자나 학생이 과부나 고아와 같이 힘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구한말 외세의 침략만 있었던 게 아니라 이 땅을 향한 선교사들의 사랑도 있었던 거죠.”
흩뿌리는 비 때문인지 붉은 벽돌로 지어진 배재학당의 외관이 도드라져 보였다. 최 교사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뒤로 정동 전경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정동을 걸으면 항상 외세의 침탈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과부와 고아를 돌봤던 젊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사랑이 느껴집니다. 학생들에게 근현대사를 설명할 다른 한 축이 생겼어요.”
하나님 부르신 곳에 청춘 바치고 묻히다… 외국인선교사묘원 ‘양화진’
“이제 정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 양화진으로 갑시다.” 스크랜턴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선교사 145명이 묻혀 있는 마포구 양화진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 교사는 성큼성큼 묘원 안으로 걸어갔다. 그는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했던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1872∼1909)의 묘비 앞에 멈췄다.
“베델은 대한제국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던 시기에 신보를 통해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신보는 항일의병의 활동을 보도하고 비밀결사 신민회 본부, 국채보상운동 의연금 총합소 역할도 했어요. 장지연의 황성신문에 나온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 호외로 보도하기도 했어요.” 최 교사는 베델의 묘비 뒷면을 보라고 했다. 묘비 한쪽이 깎여 있었다.
“베델의 장례 때 조선인들이 줄지어 추모를 했어요. 장지연이 ‘드높도다 그 기기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라고 추모사를 썼어요. 일제가 추모사가 새겨진 묘비 뒷면 일부를 칼과 망치로 긁어낸 겁니다.” 바로 옆에는 헐버트(1863∼1949)의 묘가 있었다. “제가 매일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헐버트 선교사님이십니다.” 최 교사는 반가운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감사합니다”라며 고개를 넙죽 숙였다.
1886년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던 헐버트는 을사조약 후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조국 미국으로 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겠다’고 적혀 있었다. 수업을 위해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최 교사는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청춘을 바쳤던 분들을 뵈니 내 사명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2001년 EBS 강의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스타 강사’를 꿈꾼 건 아니었다. “2004년 EBS 인터넷 게시판에서 한 학생이 ‘유명 사이트에서 인터넷 강의를 돈 주고 듣는 친구를 보면 무료로 EBS 수업을 듣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진다’고 쓴 글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강의가 좋아서 선택하는 EBS 강의를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밤새워 공부하며 강의했습니다.”
그는 민주적 시민을 길러내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유명 인터넷 강의 업체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곤 합니다. 계약서에 적힌 어마어마한 액수를 보면 마음이 흔들려요. 하지만 하나님이 저를 부르신 목적이 공교육 안에서 역사의식 있는 민주시민을 길러내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헤어질 때 “덕분에 학생들에게 추천할 만한 좋은 근현대사 답사 코스를 걸었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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