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번역책을 새롭게 읽었습니다
[오마이뉴스 최종규 기자]
▲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남신서점'은 '청산서점'과 나란히 있다. |
ⓒ 최종규 |
그런데 오늘날 사회에서 배우는 말은 '제도권 말'입니다. 고장에 따라서 다른 고장말을 학교에서 배울 수 없습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광주이든 대전이든 모두 '똑같은 표준말'만 배웁니다. 시골에 살아도 시골말을 배울 수 없는 사회 얼거리입니다. 게다가 교과서에서 쓰는 말조차 아직 일제강점기 찌꺼기를 털지 않았고, 일본 한자말과 일본 말투, 번역 말투가 어지러이 춤추기까지 합니다.
어지러이 춤추는 한국말도 한국말이니, 이대로 '어지러운 말'만 익혀도 나쁠 일은 없습니다. '양파'를 놓고 '다마네기'라 하든, '마늘'을 놓고 '갈릭'이라 하든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요, '사랑'을 놓고 '애정'이라 하든 '러브'라 하든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 사회이니까요.
오래된 번역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우리말의 향기
▲ 책방 앞에 놓인 걸상 |
ⓒ 최종규 |
오래된 번역책이라고 해서 이런 말투가 안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같은 책이라 해도 오래된 번역과 최근 번역을 한자리에 놓고 살피면, 서로 쓰는 말이 사뭇 달라서 여러모로 한국말을 새롭게 바라볼 만합니다.
▲ 책 하나 찾는 손길. |
ⓒ 최종규 |
[1979년 판]'그래요.' 내가 말했어요. '우리는 비밀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군요. 섭섭해요.' '모든 것을 발견하려고 해서는 안 돼.' 마이가 말했어요. 나는 그 말이 맞지 않으며, 사람들은 모든 것을 발견해야만 한다고 마이에게 말했어요. 그가 말했어요. '발견되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나타난단다.'
[2010년 판]"아, 그렇군요. 그때 우리는 우리만 아는 비밀을 하나 갖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 알려져 있으니 비밀도 아니네요. 진짜 아깝네요." "뭐든지 다 밝혀낼 필요는 없지." 난 모든 걸 확실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해 메이 형사한테도 그렇게 말했다. "밝혀질 것은 저절로 밝혀지는 거야."
▲ 1979년에 처음 나온 뒤 조용히 사라진 책 |
ⓒ 최종규 |
어느 쪽 번역이 한결 낫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두 가지 번역책을 살피면, 여러모로 실마리가 풀립니다. "진짜 아깝네요"처럼 '眞짜' 같은 아리송한 말투를 굳이 쓸 일이 없다는 대목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오래된 번역을 읽으면 '필요' 같은 일본 한자말이 잘 안 나타납니다. 다만, 인문책이나 학술책에서는 이런 일본 한자말을 자주 쓰지만, 어린이문학에서는 사뭇 달라요. 요즈음 어린이문학이나 청소년문학 번역은 어른문학 번역하고 거의 똑같이 '여느 인문책 어른 말투'를 쓰지만, 지난날 어린이문학이나 청소년문학 번역은 '어린이와 푸름이가 배울 말'을 여러모로 더 살폈다고 느낍니다.
[1979년 판]"무엇을 나에게 이야기하시려고 해요?" 내가 물었어요. 그가 말했어요. "중요한 것은 너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나는 네가 비밀을 지키리라고 확신한단다. 이제 들어 보렴. 며칠 전에 여기 집 앞에 앉아서, 집이라고 해도 좋겠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단다."
[2010년 판]"그런데 저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시려고요?"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스스로 알아내게 될 거야. 아마 그렇게 되면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할 거다. 자, 들어 보렴. 난 며칠 전에 집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두 가지 번역본에서 '나에게'와 '저한테'처럼 말씨가 다릅니다. 이 대목에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이가 어른한테 하는 오래된 한국말은 '나한테'입니다. '나에게'도 '저한테'도 아닙니다. 1979년 판은 '나'라고 적고, 2010년 판은 '-한테'라는 토씨를 붙입니다. 둘이 더 곱게 어우러졌다면 훨씬 나았을 테지만, 두 가지 번역책을 함께 읽으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실마리를 풉니다.
▲ 책방 건너편에는 찻집이 있다. |
ⓒ 최종규 |
[1979년 판]"비밀일 수는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알아요. 하지만 실마리와 결과만 알고 있어요. 이야기의 연결은 우리 외에 마이라고 부르는 마이어 라인과 한스 무크만 알고 있는데, 한스 무크는 말할 수가 없어요."
[2010년 판]"에이, 비밀이라고까지 할 건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데, 모두들 아주 조금씩만 알고 있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우리 말고 메이 형사님하고 한스 아저씨밖에 없어요. 그런데 한스 아저씨는 이제 말을 못 해요."
책이름을 <분수의 비밀>로 붙이니 '비밀'이라는 한자말을 자꾸 씁니다. 두 가지 책 모두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비밀'이라는 한자말을 써서 잘못일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오래된 한국말 얼거리를 살핀다면 "비밀스런 분수"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더 살필 수 있다면 "수수께끼 분수"처럼 쓸 수 있어요. 그래서, 1979년 판에서는 '실마리'라는 낱말을 쓰는데, '수수께끼·실마리'는 늘 함께 어울립니다.
1979년 판에서는 "우리 外에"로 적고, 2010년 판에서는 "우리 말고"로 적습니다. 1979년 판은 "알아요"처럼 적다가 "알고 있어요"로 적고, 2010년 판은 "알고 있는데"와 "알고 있거든요"로 적습니다. "-고 있다"는 서양 말투(현재진행형)입니다. 1979년 판은 "마이라고 부르는"처럼 '부르다'를 잘못 썼고, 2010년 판은 "메이 형사님"이라고 단출하게 씁니다.
그나저나 1979년에 나온 <분수의 비밀>하고 2010년에 나온 <분수의 비밀>을 함께 놓고 읽으니, 이야기 느낌이나 결은 적잖이 다르구나 싶습니다. 어느 쪽 책으로 읽든 줄거리는 찬찬히 훑을 만하지만, 같은 번역책이라 하더라도 누가 번역하느냐에 따라서 글맛과 이야기맛이 바뀝니다.
▲ 헌책방에서 오래된 번역책을 만난다. |
ⓒ 최종규 |
▲ 한국말로 처음 나온 '파파라기' |
ⓒ 최종규 |
"파파라기는 늘 시간에 대해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더 주지 않는다고 위대한 정신을 비난한다. 그리고 그는 매일 다가오는 새로운 하루를 정확한 계산으로 짜개고 나눔으로써, 신과 신의 위대한 지혜를 모독하고 있다. 마치 크고 단단한 칼로 연약한 야자 열매를 마구 짜개듯, 파파라기는 그렇게 시간을 짜개고 있다. 그리고 짜개진 시간의 모든 부분에는 그 이름이 주어진다. 그것은 초, 분, 시간 등이다." - 본문 65쪽 중에서
나는 한국말도 배우려는 생각으로 오래된 번역책을 읽습니다. 늘 한국 사람으로 살지만, 막상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국말을 돌아보고, 오늘 이곳에서 살며 문득 잊거나 놓친 '오래된 한국말'이 있으리라 여겨서 오래된 번역책을 읽습니다. 언제 누가 옮겨서 나온 번역책이든 알맹이는 같으니, 어떤 책을 골라서 읽든 크게 대수롭지는 않습니다. 빈틈없이 아름다운 번역책을 찾기는 쉽지 않기에, 아름다운 번역책을 찾기보다는 영어도 배우고 프랑스말도 배우고 독일말과 스웨덴말과 러시아말도 몽땅 스스로 배워서 읽을 때에 가장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나 스스로 외국말을 배울 생각은 안 하고, 번역책을 놓고 투덜거리는 셈이구나 싶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수많은 외국말을 몽땅 배워서 책을 읽기는 만만하지 않으니, 어떤 번역책을 마주하든 고맙게 읽을 노릇일 텐데, 번역책을 읽으면서 고맙다는 마음을 자꾸 잊는구나 싶어요.
▲ 겉그림 |
ⓒ 가톨릭출판사 |
그런데 이 책은 천주교 관련 출판사에서 일찌감치 번역해서 제법 널리 알렸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이 1980년대에 새롭게 나왔을 적에도 <명랑한 돈 까밀로>는 버젓이 책방에 함께 꽂혔지요. 그러니까, 중복출판인 셈일 텐데 요즈음 같으면 이렇게 나올 수 없었겠지요.
"'크리스머스이브에는 인제 그 시를 나에게 읽어 줄 테지. 즐거운 일이다.' 빼뽀네의 얼굴은 명랑하였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도 반드시 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강물은 발 아래 뚝 밑을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 또한 훌륭한 시이었다. 시는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닳아서 매끄러운 조약돌을 강 밑에 깔기까지에는 몇 천 년의 시간이 걸리었다." - 본문 308∼309쪽 중에서
아무튼, 새로운 마음으로 오래된 번역책을 가만히 되읽습니다. 나는 오늘 2010년대를 살지만, 1960년대에 이 책을 처음 마주했을 분들은 어떤 마음이 되어 이 책을 읽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차근차근 읽습니다.
시를 말하고, 시를 즐기며, 시를 생각하는 이야기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지난날에도 오늘날에도 시는 삶을 북돋운다고 느낍니다. 시가 있는 삶에는 이야기가 흐르고, 시가 없는 삶에는 이야기가 흐르지 못합니다. '문학이라고 하는 시'가 아니라 '노래하는 시'입니다. 삶을 노래하는 시요, 사랑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꿈을 노래하는 시요, 사람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숲을 노래하고 바람을 노래합니다. 햇님을 노래하고 별빛을 노래합니다. 흙을 노래하고 품앗이랑 두레를 노래합니다.
▲ 책꽂이 한쪽에 계산기. |
ⓒ 최종규 |
<수학의 유학>(강석진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2002)이라는 책을 들춥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제도권 학교를 안 보내고 집에서 가르칠 생각이기에, 어버이로서 수학을 한결 깊이 살펴야겠다고 느껴서 이 책도 집습니다.
"그런데 왜 방정식을 세울까? 우선 이렇게 써 놓으면 언뜻 복잡해 보이는 상황을 간결하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수학의 특징 중 하나인 '간결한 아름다움'이다." - 본문 49쪽 중에서
수학은 '간결한 아름다움'이라고 합니다. 다른 학문도 이처럼 저마다 '아름다움'을 찾는 길이라고 봅니다. 지식 때문에 배워야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정치나 경제나 문화 때문에 배워야 할 학문이 아닙니다.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길을 밝히려고 배우는 학문입니다.
한국말이나 영어를 배울 적에도 삶을 더욱 아름답게 북돋우는 길을 찾으면서 배웁니다. 삶과 함께 생각과 사랑과 꿈을 더욱 넉넉하게 살찌우는 길을 찾으려고 이모저모 즐겁게 배웁니다.
부산 보수동〈남신서점〉 |
051-244-0008 부산 중구 보수동1가 104-10 |
▲ 책으로 빽빽한 골마루. |
ⓒ 최종규 |
▲ 먼지를 떠는 붓 |
ⓒ 최종규 |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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