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황제는 왜, 태산을 또 다른 황제로 모셨나

2015. 2. 12.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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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東이야기 ⑦] 태산의 보물 창고, 대묘(岱廟)

[오마이뉴스 김대오 기자]

▲ 왠지 모를 아우라를 간직한 태산

태산의 자기장에 철가루처럼 빠져들 수밖에 없다.

ⓒ 김대오

버스는 화북(華北)평야를 달리고 있다. 추수를 끝낸 너른 들판이 창밖을 스쳐간다. 당나라 두보가 "제와 노나라 땅의 푸르름이 끝없이 이어졌구나(齊魯靑未了)"라고 <망악(望嶽)>에서 노래했던 걸 보면 두보는 아마 어느 여름 이 길을 지났을 것이다.

지난(濟南)에서 타이안(泰安)으로 가는 약 70km의 길옆으로 어느새 태산(泰山)의 산 능선이 따라와 함께 달린다. 이 평야의 북쪽에, 이 능선의 정점에 태산이 자리해 있을 것이다. 태산이라는 이름이 워낙 커서인지 인구 550만 명의 작지 않은 도시 타이안은 도시라기보다는 그저 태산 너머의 배경처럼 여겨진다.

다른 산이 범접할 수 없는 태산만의 아우라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며 날씨는 더욱 쌀쌀해지는데, 가족과 함께 태산을 오를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태산 근처를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태산의 강력한 자력에 철가루처럼 끌려 산을 오르지 않고는 못 배긴다. 태산은 오악 중에서도 세 번째로 높은, 뭐 그리 높은 산이 아니다. 경치가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태산은 분명 다른 산들이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일찍이 유우석이 <누실명(陋室名)>에서 "산은 높다고 명산이 아니라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고, 물은 깊다고 신령한 것이 아니라 용이 살아야 신령하다(山不在高,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고 했으니, 태산이야말로 역대 황제와 수많은 명인들의 숨결이 신선처럼, 용처럼 깃들어 사는 명산이자 영산이다. 비와 안개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아우라의 태산을 곁눈질하며 블랙홀에 빨려들 듯 타이안에 안긴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리는 봉선(封禪)의식은 순임금 때부터 행해졌으며 춘추전국시대에는 왕에 의해 계승되었다. 아마 그 당시 사람들에게 태산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아들(天子)인 황제는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태산에 올라 하늘에 제를 올리고 하늘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도 봉선의식을 통해 통일을 만천하에 공포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과거의 제·노나라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진시황은 불로장생의 방약이 동쪽에 있을 것이라 여겼으니, 해가 뜨는 동쪽에 자리한 태산을 단연 으뜸으로 생각했으리라.

한나라 때부터 황제는 자신의 치세가 미치는 영역에 오악(五嶽)이라는 깃발을 꽂았다. 동악 태산, 서악 화산(華山), 남악 형산(衡山), 북악 항산(恒山), 중악 숭산(嵩山), 이 오악은 단순한 각 지역 명산의 의미가 아닌 중화문명이 미치는 강역을 표시한 좌표이자, 황허와 창장의 중하류로 중국인의 삶의 터전을 아우르는 말이었다.

중국인들은 간절하게 기원할 일이 있으면 마을의 산이나 사원을 찾지 않고, 오악을 찾아 소원을 빌고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중악을 중심으로 동서와 남북이 열십자 모양으로 이어진 오악은 그래서 중화문명이 미치는 구주(九州), 신주(神州), 화하(華河)와 함께 중국의 강역을 나타내는 대명사이자 중화문명이 미쳐 민간에 잘 구현된 지역을 뜻한다. 그 중화문명의 대명사인 오악의 으뜸이 바로 태산이다. 중국인의 역사와 문화가 태산에 가장 잘 녹아 있다는 의미니 어찌 빗줄기 따위가 태산행을 막을 수 있으랴.

▲ 대묘방(垈廟坊)

모든 패방의 의미가 그렇듯 대묘방을 지나면 본격적인 대묘가 모습이 드러난다.

ⓒ 김대오

역대 황제들이 태산에 오르기 전에 미리 대묘(岱廟)를 찾아 태산신에서 제례를 올렸던 것처럼 태산 아래 홍문(紅門)에 여장을 풀고, 먼저 태산 정상 옥황봉과 남천문의 정남향 축선 상에 위치한, 타이안 시내 대묘를 찾았다.

대묘는 진시황 시절 이미 그 터가 마련되었으며 한나라 때 짓기 시작했다. 송대에 그 규모가 크게 확장되어 황제의 궁궐 못지않은 위용을 갖추고 있다. 자연물에 대한 숭배 차원에서 태산을 신으로 받드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태산을 살아있는 황제처럼 모시며 황궁까지 지어놓은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마저 든다.

대묘에는 한 무제가 심은 한백(漢柏)을 비롯해 오래된 고목과 중국 고대 원림의 멋을 잘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진나라 이사(李斯)의 소전체 석각 등 수많은 서체의 변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비석들이 보관되어 있어 그야말로 타이안의 보물창고이자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통한다.

태산신에 참배하기 전, 꼭 들려야 하는 요참문

대묘의 맨 앞에는 전정(前庭)인 요참정(遙參亭)이 있다. "태산신에 참배하려면 먼저 요참문에 참배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은 태산신을 모신 대묘에 들어서기 전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곳이다. 독립된 건축물이면서도 대묘와의 조화를 위해 단을 쌓고 다섯 칸의 황색 기와 건물로 지어져 있다.

요참정을 지나면 청 강희제 때인 1672년 세워진 대묘방(垈廟坊)이 있다. 4개의 기둥에 사자, 말, 학, 용 등이 양각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청대 석각 예술의 수준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태산신의 위엄과 이를 우러르는 숭배의 의미가 담겨 있다. 모든 패방의 의미가 그렇듯 대묘방을 지나면 본격적인 대묘가 모습이 드러난다. 딸은 원래 30위안(5400원)하는 입장권 4장을 모두 학생 할인 반값으로 끊어와 기뻐한다.

▲ 정양문(正陽門)

황제를 모신 궁궐처럼 웅장한 대묘의 정문이다.

ⓒ 김대오

▲ 정양문의 좌측 모서리에 땅을 상징하는 곤루(坤樓)

자금성의 각루처럼 멋진 황궁으로서의 위엄을 갖춘 모습이다.

ⓒ 김대오

대묘방 바로 앞이 대묘의 정문인 정양문(正陽門)이다. 정양문은 해방 전과 문화대혁명 때 크게 훼손된 것을 송대의 건축양식에 따라 최근 개축한 것이다. 성벽의 높이는 11m, 문의 높이만 8.6m에 이른다. 성벽의 좌측 모서리에 땅을 상징하는 곤루(坤樓, ?)가, 우측 모서리에 바람을 상징하는 손루(巽樓, ?)가 있으며, 북문인 후재문(厚載門) 양 모서리에는 각각 하늘을 나타내는 건루(乾樓, ≡), 산을 나타내는 간루(艮樓, ?)가 베이징 고궁처럼 멋지게 궁궐의 위엄을 보여준다.

하늘·땅·물·불을 나타내는 '건곤감리'에는 익숙하지만, 하늘·땅·산·바람의 '건곤간손'은 뭔가 낯설다. 태산신앙이 당대 이후 중국 전역에 퍼져 도처에 동악묘(東嶽廟)가 세워졌다고 하니 그 본고장에서 산을 높게 받드는 것은 어쩜 당연하리라. 무소불위의 황제의 권위를 위해 민간에서는 황색 기와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을 감안하면, 태산을 황제로 설정하고 태산을 위해 또 하나의 황궁을 지었다는 발상이 놀랍다. 봉선의식의 전통이 어린 태산의 위엄을 빌어 신과 같은 황제 자신의 권위를 더욱 드러내려했음일 것이다.

태산신을 황제로 만들었지만... 독으로 돌아오다

정양문을 들어서면 정원이 펼쳐지고 작은 연못에 물고기가 노닐고 있다. 1009년 송나라 진종(眞宗) 때 지어진 대묘의 두 번째 문인 배천문(配天門)은 덕은 하늘과 땅을 그 짝으로 삼는다(德配天地)는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1338년 원대 건립된 세 번째 문, 천하가 어짊으로 돌아간다는 천하귀인(天下歸仁)의 인안문(仁安門)과 호응한다.

▲ 상부비(祥符碑)

상부비 뒷면에 오악 중에서도 독보적 존재라는 오악독종(五嶽獨宗)이 크게 새겨져 있다.

ⓒ 김대오

▲ 선화비(宣和碑)

선화비 뒷면에 적힌 만대에 거쳐 우러르리라는 의미의 만대첨앙(萬代瞻仰)이다.

ⓒ 김대오

배천문 양 옆으로 대묘에서 가장 큰 비석이 있는데 동쪽에 선화비(宣和碑), 서쪽에 상부비(祥符碑)가 있다. 상부비는 1013년 송대 진종 때 건립되었으며 뒷면에 오악 중에서도 독보적 존재라는 오악독존(五嶽獨尊)이 크게 새겨져 있다. 선화비는 상부비가 세워지고 111년이 지난 1128년 송대 휘종 때 건립되었다. 선화비 뒷면에 적힌 만대에 거쳐 우러르리라는 의미의 만대첨앙(萬代瞻仰) 글귀는 글자 하나가 1.2m로 대묘 비문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걸로 평가받는다. 20톤에 달하는 비문에는 20년에 걸쳐 대묘를 증축한 과정과 의미가 적혀 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두 비석이 건립되던 당시 송대의 역사가 좀 아이러니하다. 진종은 요나라와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요나라에 보낸다는 굴욕적인 전연의 맹(?淵之盟, 1004년)을 맺는다. 진종은 약화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꿈에 태산의 천서(天書)를 받았다며 2만5000명을 동원하여 봉선의식을 치른다.

이때 대묘는 천황전이 건설되는 등 대대적으로 확장되었으며, 매년 6월 6일 천황절에 올리는 제례가 정례화 됐다. 그러나 봉선의식에 참가한 모든 문무백관의 지위를 한 단계 올려주고 대묘를 확장하는 데 많은 재정을 탕진한 송나라는 1126년 금나라에 망하니 태산신을 황제로 만들고 대묘를 황궁으로 확장한 게 득이 아닌 독이 되었던 셈이다.

▲ 한백원(漢柏院)

한무제가 심었다는 측백나무와 90여개의 석각이 고즈넉한 석각 공원을 이루고 있다.

ⓒ 김대오

배천문의 동쪽 선화비를 지나 더 오른쪽에 들어가면 한백원(漢柏院)이 있다. 한 무제 때 심었다는 측백나무가 고목이 되어 말라가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푸른 잎을 돋아내고 있다. 한백원에는 90여 개의 비석들이 있는데 동한시대 지동의를 만든 장형(張衡)의 <사사편(四思篇)>, 건륭제의 <등대시(登岱詩)> 등의 석각이 유명하다.

수많은 석각의 숲을 오가며 비문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와 가이드가 한참 설명을 하기에 가 보니, 혁명가이자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부인인 덩잉차오(鄧潁超)가 쓴 "태산에 올라 조국 산하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보노라(登泰山看祖國山河之壯麗)" 라는 비문이다. 태산 산정에 있는 것을 이곳에 복제해 세워둔 것이라고 한다.

▲ 제일산(第一山) 태산

가장 중국적인 문화를 간직한 태산은 천하의 으뜸으로 여겨져 왔다.

ⓒ 김대오

한백원 안쪽으로 청대 원림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어좌(東御座)가 있는데 그 앞에 유명한 이사(李斯)의 진태산각석(秦泰山刻石)이 놓여 있다. BC 219년 진시황이 태산 봉선의식을 행할 때 이사가 써서 태산 정상인 옥녀지(玉女池)에 세웠던 것이다. 태산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가치 있는 석각이다.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글자가 서로 달라 진시황은 통일 후 문자 개혁을 이사에게 맡겨 소전체를 완성한다.

문자 통일을 진두지휘한 이사가 직접 남긴 소전체의 첫 번째 얼굴인 이 석각의 운명은 그 탄생만큼이나 기구하다. 산정에 있다가 그 아래 벽하사(碧霞祠)에 모셔졌지만 화재로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청 가정연간에 다시 찾아 지금의 대묘에 모셨다. 이후에도 붕괴와 도난의 수난을 겪으며 222자 중 '신거질신청의신(臣去疾臣請矣臣)' 일곱 글자만 완전하고, '사매사(斯昧死)'는 그 형태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비록 이사의 석각은 뭉개진 채 서 있지만 강력한 문자 통일 덕분에 중국은 유럽처럼 언어가 분화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온 셈이다.

▲ 당괴원(唐槐院)

당나라 때의 회화나무가 아들을 안은 당괴포자(唐槐抱子)의 형상이다.

ⓒ 김대오

배천문을 사이에 두고 한백원의 서편 맞은편에 당괴원(唐槐院)이 있다. 당나라 때 심은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었으나 1951년 완전히 죽어 1952년 나무가 죽은 중앙에 새로 나무를 심으니 당나라 때의 회화나무가 아들을 안은 당괴포자(唐槐抱子)의 형상이다. 흩어진 낙엽을 배경으로 만력 연간에 쓴 비문과 함께 있으니 제법 세월의 풍모가 느껴진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는 없는 법

태산 인근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비석을 모아둔 대묘석각원을 보고 인안문을 지나 대묘의 주건물인 천황전(天?殿)을 향한다. 굵어진 빗줄기 속에서 한 아주머니가 통로 중앙에 놓인 암석을 돌고 있어 옆에 붙은 푯말을 보니 재미있는 민간풍습이 소개되어 있다. 눈을 감고 미호석(迷糊石)을 잡고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반시계방향으로 세 바퀴를 돌고 5m쯤 북쪽에 있는 편백나무의 파인 홈을 손으로 만지면 태산신이 복을 준다는 것이다. 아들과 딸이 시도해 보았으나 눈을 감고 정확한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 미호석(迷糊石)

눈을 감고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반시계방향으로 세 바퀴를 돌고 5m쯤 앞 편백나무의 홈을 만지면 복이 온다고 한다.

ⓒ 김대오

▲ 천황전(天?殿)

천황전은 고궁의 태화전, 공묘의 대성전과 함께 중국 3대 궁전으로 꼽힐 만큼 위엄 있고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 김대오

천황전은 고궁의 태화전, 공묘의 대성전과 함께 중국 3대 궁전으로 꼽힐 만큼 위엄 있고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1009년에 지어졌으니 태화전(1420년)이나 대성전(1021년)보다 이른 시기에 세워졌다. 고궁의 태화전을 따라 지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태화전이 천황전의 건축양식을 참고했겠다고 생각하니 더욱 근엄해 보인다.

겹처마에 정면 아홉 칸, 측면 다섯 칸, 곧 <주역>에서 용을 묘사하는 구오지존(九五之尊) 형식이다. 용은 곧 황제이니 황제를 모신 건물이라는 얘기다. 하늘 아래 어찌 황제가 둘일 수 있었을까. 형세가 몹시 다급했던 송나라 진종이 태산을 황제로 모시며 태산신의 도움을 받고자 했던 웃지 못 할 역사의 흔적이 천황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천황전 안에는 금동상 앞에 '동악태산지신(東嶽泰山之神)'이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역사적으로 부침을 거듭한 공자에 대한 평가처럼 태산의 지위도 시대별로 달라져왔다. 도교신앙에서는 태산신을 생사를 주관하는 백귀지신(百鬼之神)으로 여겼으며, 당대에는 천제신(天齊神), 송대에는 천제인성안(天齊仁聖安), 원대에는 동악천제대생인황신(東嶽天齊大生仁皇神)으로 점점 높아져 황제에 달했다.

▲ 천황전 안의 벽화

동쪽은 산에서 내려오는 태산신의 행렬이, 서쪽은 다시 돌아가는 모습이 섬세하고 정밀하게 그려져 도교벽화의 으뜸으로 뽑힌다.

ⓒ 김대오

하지만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다며 "황제의 칭호를 거둬간다"는 거제호비(去帝號碑)를 대묘에 설치하고 지금의 동악태산지신으로 명했다. 천황전 내부에는 또 송대에 제작된 길이 62m, 높이 3m의 <태산신계필회란도(泰山神啓?回?圖)>라는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다. 동쪽은 산에서 내려오는 태산신의 행렬이, 서쪽은 다시 돌아가는 모습이 섬세하고 정밀하게 그려져 도교벽화의 으뜸으로 뽑힌다.

천황전 앞에 송·명·청대의 비석들이 서 있는데 각각 태산에 대한 봉선의식이나 대묘를 보수한 기록을 담고 있다. 아직 노란 잎을 몸에 걸친 오래된 은행나무 아래 은행을 줍고 있는 할머니들이 정겹다. 할머니는 어느덧 천황전 뒤 중침전(中寢殿)까지 나를 따라와 태산신의 선물이라며 은행을 사라고 한다.

▲ 후재문에서 바라본 중침전과 천황전

대묘에서의 워밍업을 마치고 이제 태산을 향한다.

ⓒ 김대오

중침전 동쪽으로 1615년 건립된 동으로 된 정자 동정(銅亭)이 있는데 원래 태산 정상 벽하사에 있던 걸 1972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맞은편에 1533년 세워진 철탑(鐵塔)과 균형감 있는 조화를 이룬다.

대묘 관람을 마치고 후재문으로 나오는데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기만 한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 정도로 비가 와도 태산 산행이 가능한지를 현지인들에게 물으니 계단이 미끄러워 못 올라갈 것이라는 사람에서부터 계단으로 빗물이 쏟아지는 장관을 보게 될 것이라는 사람까지 의견이 다양하다.

아이들에게 외우게 했던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를 "비가 와도 뫼이로다"로 바꿔 되뇌며, 두보처럼 "반드시 정상에 올라 뭇 산의 작음을 보리라(會黨凌絶頂, 一覽衆山小)"고 다짐한다. 태산에서 떨어지는 굵은 빗소리를 들으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한다.이 기사를 응원하는 방법!☞ 자발적 유료 구독 [ 10만인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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